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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현대소설

엘리아스 카네티 (Elias Canetti) 장편소설 『현혹(Die Blendung)』

by 언덕에서 2022. 11. 29.

 

엘리아스 카네티 (Elias Canetti) 장편소설 『현혹(Die Blendung)』

 

 

불가리아 사상가·소설가·극작가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 1905~1994)의 장편소설로 1935년 발표되었다. 카네티는 불가리아 누에 출생으로 에스파냐계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을 유럽 각지에서 보내고 빈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고 문필생활로 들어갔다. 1939년 영국으로 망명, 주로 독일어로 저작 활동을 하였다. 필생의 작품인 <군중과 권력>(1960)은 신화ㆍ종교ㆍ역사ㆍ인류학ㆍ전기ㆍ정신병학 등에 관한 방대한 문헌을 바탕으로 집필되었다. 어떤 전문과학의 방법에도 의거하지 않은 독창적 통찰로 죽음이라는 ‘힘의 터전’에서 연출되는 군중과 권력의 상호작용 메커니즘을 인류사 속에서 해명한 대작이다.

 카네티가 25세에 집필한 3부작 장편소설 『현혹』(1935)은 책 속에 파묻혀 현실로부터 고립된 중국학 학자를 주인공으로, 지식인의 무력과 소시민층에 잠재한 권력욕을 웅장하고 힘찬 필치로 묘사한 대작이다. 발표 당시에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ㆍ미국ㆍ프랑스에서 널리 읽힌 뒤 독일로 역수입되어 20세기 독일어 문학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졌다. 1981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다.

 군중에 관한 관심은 1920년대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일어난 인플레이션 항의 폭동을 카네티가 지켜보면서 구체화하였다. 이 길거리 폭동은 1927년 성난 군중이 빈 법원 건물을 불태우는 데서 절정에 올랐다. 그는 자신이 목격한 군중의 광기를 8권짜리 대하소설에 담을 예정이었으나 <현혹>(1935)이라는 1권의 책으로 축소했다. 이 작품은 어느 도시의 기괴한 지하세계에서 어느 학자의 삶이 파멸하는 과정을 그린 무시무시한 내용의 소설이다.

 

불가리아 사상가, 소설가, 극작가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 1905~1994)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부 - 세계가 들어있지 않은 머리

 주인공 페터 킨은 자칭 “현존하는 가장 유명한” 중국학 학자이다. 그는 모든 현실적인 관심사에서 벗어나(심지어는 교수직까지도 거절하고) 2만 5천 권에 달하는 책들이 소장된 그의 개인 도서관에서 오로지 연구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소장한 책을 관리하는 가정부 테레제와 두 번째로 결혼하게 되지만, 후에 그것이 중대한 실수라는 걸 깨닫게 된다. 킨은 이 결혼을 통해 얻은 것은 ‘군중’의 천박함이며, 결국은 정신이상에까지 이르게 된다.

 킨의 아내 테레제는 오로지 물질적인 것(아파트의 공간 분할, 가구, 돈)에만 관심을 가진, 물질에 ‘현혹된’ 인간의 전형이다. 결혼 첫날 밤, 킨을 유혹하려는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녀는 오로지 그를 집에서 몰아내고 돈만을 차지한 다음, '푸다 씨(붓다를 잘못 발음한 것이다)'라 불리는 가구점 점원에게 '몫'을 떼어주려고 한다. 그러나 킨에게 별 유산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이제 유일한 재산인 ‘통장’을 찾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이 무렵 킨은 정신이상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다. 통장을 찾은 테레제는 킨을 집에서 내쫓았으나, 역설적이게도 킨은 ‘자기’ 집에서 쫓겨나면서 자기가 ‘위험한’ 그녀를 집안에 가두었다고 생각한다.

 2부 - 머리가 없는 세계

 집에서 쫓겨난 킨은 2만5천 권이 만든 ‘문자의 사회’를 벗어나 직접 외부세계와 만난다. 그러나 킨이 만난 세계는 오로지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끊임없는 속임수와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였다. 이곳에서 킨은 자칭 ‘체스의 천재’라고 부르는 포주, 꼽추 피셜레를 만난다. 피셜레는 비열한 수단을 동원해 킨의 돈을 합법적으로 갈취하지만, 결국 자신이 믿었던 '아내의 손님’에게 살해당한다.

 이에 앞서 킨은 ‘시각장애인’(아내의 손님)으로부터 테레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아내의 살인범으로 의심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사실로 믿게 되었다. 테레제는 경비원과 함께 킨 앞에 나타나고, 극도의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던 킨은 주먹을 휘두르다 경찰에 의해 연행되기까지 했다. 킨을 심문하던 경찰은 그를 테레제의 돈을 훔친 도둑이라 확신하고 이를 자백하라고 강요했으나, 엉뚱하게도 킨은 자기가 테레제를 살해한 살인범이라고 자백한다. 이 와중에 테레제는 킨이 첫 번째 부인을 살해하고 토막을 내서 도서관에 보관하고 있었다고 확신하고, 경비원은 킨이 자기를 딸의 살인범으로 고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3부 - 머릿속에 있는 세계

 피셜레로부터 이해할 수 없는 전보를 받은 킨의 동생 게오르크가 존경하는 형을 구하기 위해 독일로 온다. 게오르크는 정신과 의사다. 그는 형의 주변 인물들과 여전히 테레제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형의 정신 상태를 나름대로 판단하지만, 그것은 ‘오진’이었다. 그는 경비원과 테레제를 건물에서 내쫓고 형을 그의 도서관으로 귀향시킨다. 그는 자기의 임무를 마쳤다고 여기고, 파리로 돌아간다. 하지만 킨은 여전히 그의 불안을 잠재우지 못하고, 결국, 자기의 도서관에 불을 질러 책들과 함께 불에 탄다.

 

 

 카네티는 작품의 주인공을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모든 정치적 제도와 절연한 채 철저한 고립 속에서 자기의 학문 세계에만 침잠하는 전형적인 지식인으로 형상화한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자신이 경험했던 군중을 내면화한다. 주인공 중국학 학자 페터 킨이 자신의 내면성과 서재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보다 책을 더 소중히 여기는 가정부와 결혼을 하는 중대한 실수를 하고 만다. 그리고 결국 가구와 돈에 미친 ‘테레제’(가정부)에게 쫓겨 집을 나오게 된다. 자신의 머릿속의 세계로만 가득한 그에게는 오로지 책밖에 없고(개인) 외부 세계(군중)는 없다.

 엘리아스 카네티가 평생 추구한 화두는 ‘군중이란 무엇인가?’이다. 1927년 7월 15일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법원 건물에서 불이 난 사건이 있었는데, 카네티는 이를 통해서 ‘군중’이라는 화두와 그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화재 사건의 발단은 부르겐란트에서 벌어진 노동자 살인사건이었다. 법원은 살인자들에게 ‘무죄판결’을 내렸고, 이에 흥분한 노동자들이 법원으로 몰려들어 방화했다. 이날 경찰은 무력으로 소요사태를 진압하려 하였고, 9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법원은 불에 탔다.

 이 소요사태를 직접 목격한 카네티는 사람들이 불에 타 죽어가고 있는데도 “문서가 불타버렸어! 모든 문서가 다!”라고 외치며 오직 ‘문서’ 걱정만 하는 한 남자를 목격하게 된다. 카네티는 인간의 생명보다 문서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이 남자의 태도에 경악했다. 몇 년이 지난 후 이 화재 사건과 그 남자는 장편소설 『현혹』의 모티프가 되었고,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의 형상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지금 우리가 읽는 『현혹』은 ‘군중’이라는 모티프가 소설의 서사로 응축된 사회학적 보고서라 할 수 있다.

 

 

 1부에서 킨은 가정부의 모략과 폭력에 의해 집에서 쫓겨남으로써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겪는 숱한 군중적 현상과 다른 유형의 인간 군상들과 만남, 그리고 스스로 군중의 망상과 현혹에 휘말려 들어가게 됨으로써 잃게 되는 개인의 내면성을 통해 자신의 머릿속 세계와 외부세계와의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결국, 머릿속 세계가 아닌 머리가 없는 세계가 되는 것이다.

 2부에서 머릿속 세계와 머리가 없는 세계와의 갈등에서 견디지 못한 킨은 끝내는 정신이상을 일으키게 된다. 그것으로부터 자기를 해방하려는 마지막 노력으로 자기 자신과 서재에 불을 지르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의 머릿속 세계에 미처 파멸하는 것이지 자신을 해방할 수 없는 것이었다.

 (3부에서) 결국, 이 소설의 난해함은 자유주의적 지식인의 고립화와 그의 20세기적 군중체험의 상관관계 속에서 해명된다. 작품은 현혹된 정신, 그리고 문화, 물질과 권력에 ‘현혹된’ 인간들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현혹』이 우리에게 주는 매력은, 개인과 군중의 타협하기 어려운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인간이라는 21세기적 존재의 ‘불안’과 ‘고독’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소설의 낯선 문체와 사회학의 엄밀한 언어가 교차하는 『현혹』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보았던 소설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빠져들게 만든다. 그리고 그의 독특한 언어유희로 웃게 된다.

 이 소설은 현혹된 정신과 ‘순간적으로 눈이 먼’ 사회의 비극을 주문처럼 불러내고 있다. 소설은 인간이 처한 상황, 매수당하기 쉬운 인간, 그리고 인간의 잔악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문화, 예의범절, 질서 잡히고 절제된 행동이라 불리는 것들의 해체가 이 책의 본질적인 주제다. 점점 몰락해가는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과 이념들, 망상과 환영들, 한 시대의 물질들과 한 문화의 지배적인 가치관이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카네티는 영국으로 망명, 창작을 중단하고 권력의 정신병리학적 연구에 전념했는데 <군중과 권력>(1960)은 이에 관한 강력한 흥미의 소산이며 3편의 희곡 <결혼식>(1932) <허영의 희극>(1950) <죽음을 앞둔 사람들>(1964)도 이를 반영한다.

 이 가운데 <결혼식> <허영의 희극>은 1965년 독일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초연되었고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1956년 옥스퍼드에서 초연되었다. 이 작품들은 1964년 <드라마들>로 출판되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비망록을 토대로 <기록 1942~72>(1978)를 출판했으며 인물 스케치를 담은 <증인─50명의 인물>(1974)과 자서전 <구원받은 혀>(2권. 1977) <귓속의 횃불>(1980)을 출판했다. 사상가인 그의 작품은 사회와 대립하는 개인 및 군중심리를 탐구하고 있다. 카네티는 1981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