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국 현대소설

헤르타 뮐러(Herta Muller) 연작소설 『저지대(低地帶, Niederungen)』

by 언덕에서 2022. 11. 21.

헤르타 뮐러(Herta Muller) 연작소설 『저지대(低地帶, Niederungen)』

 

 

루마니아 출신 독일 소설가 헤르타 뮐러(Herta Muller, 1953~)의 연작소설로 1982년 발표되었다.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다. 15개의 짧은 이야기로 구성된 첫 연작소설 『저지대』는 소녀의 시선을 통해 루마니아 내 소수계 독일 민족이 살아가는 시골 마을의 숨 막힘, 유년 시절의 공포를 분석적인 언어로 그려냈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루마니아 독재를 비판하는 발언을 한 뒤에는 루마니아에서 출판 활동을 금지당했고, 1987년 뮐러는 마침내 독일로 망명했다.

 연작소설 『저지대』는 총 열아홉 편이 실린 원래의 온전한 모습으로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는 삼십여 년의 지난한 세월을 겪어야 했다. 먼저 사회주의 치하의 루마니아 출판사에서 출간되기까지 무려 사 년을 기다려야 했으며, 당국의 엄격한 검열을 거쳐 네 편 - <그 당시 5월에는> <의견> <잉게> <불치만 씨> - 등이 삭제되고, 나머지 '열다섯 편'도 대폭적인 삭제와 수정을 거친 후에야 출간될 수 있었다. 1984년 독일 로트부흐 출판사에서 재출간되었을 때 문단은 열광했고 정치계의 이목까지 끌었으나 여전히 원래의 모습은 되찾지 못한 채였고, 루마니아 당국은 금서 조치를 내렸다.

  뮐러는 망명 후 베를린에 거주하면서는 계속해서 고향 바나트 지역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소수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루마니아의 독재를 비판하는 작품을 써왔다. 주요 작품으로는 루마니아 비밀경찰의 숨이 막히는 억압과 이로 인한 언어상실의 두려움을 그린 <악마는 거울 안에 있다.>(1991), 독재정권 정보부의 감시하에 있던 여교수를 등장시켜 독재 치하의 공포를 그려낸 <그 여우는 당시 이미 사냥꾼이었다>(1992), 차우셰스쿠 독재체제에 살았던 다섯 명의 젊은 루마니아 이야기로 독일 내 여러 문학상을 휩쓴 대표작 <초록 자두의 땅>(1994), 우크라이나 강제노역장으로 이송된 17살짜리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숨 그네>(2009)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등이 있다.

 

루마니아 출신 독일 소설가 헤르타 뮐러 (Herta Muller, 1953~)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린 소녀를 일인칭 화자로 내세워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후 시골 마을의 풍경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답답하고 경직된 일상을 서술된다. 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거짓과 무관심, 음주나 폭력, 가난이다. 또한,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관습과 역할을 그대로 답습하며 살아간다. 마을 남자들은 들판으로 나가 침묵 속에서 일하고는 웃음소리도 노랫소리도 없는 술집에서 고된 일에 지친 몸을 쉬며, 여자들은 한 두루마리의 옷감을 들여 슈바벤 치마를 지어 입고, 머릿속으로는 늘 도망갈 궁리를 하면서도 집안일에 매달린다. 화주를 빚거나 송아지를 도살하는 등의 금지된 일이 버젓이 자행되기도 한다. 늘 두려움에 시달리며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의 자긍심이나 품위를 내던진 삶은 거칠고, 또 그만큼 공허하기 짝이 없다.

 소녀의 가족도 이처럼 무겁고 불행한 공기에 짓눌려 있다. 술에 절어 지내며 툭하면 아내와 딸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아버지, 갖가지 종류의 빗자루를 마련해두고 강박적으로 집 안을 쓸고 닦으며 고달픈 삶에 못 이겨 딸의 뺨에 손자국을 남기는 어머니, 주머니에 못을 한가득 넣어 다니며 늘 망치를 두드려대는 할아버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리를 도살하는 할머니가 있다. 침묵 속에 각자 먹는 데만 열중하며, 식탁에서는 말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물을 달라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저녁 풍경은 메마른 가족관계와 소녀의 “목소리 없는 유년 시절”을 바로 보여준다.

 소녀는 거칠고 차가운 가족에게서 벗어나고만 싶다. 어째서 이 사람들과 한솥밥을 먹고 이 사람들의 습관을 따라야 하는지, 어째서 여기서 벗어나 다른 마을로, 낯선 이들에게로 도망치지 않는지 자문해보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소녀는 들판이나 강가, 그리고 꿈의 세계로 도피해야만 했다.

 

독일과 루마니아는 거리 상 상당히 떨어진 나라다

 

 1950년대에 태어나 독재 치하의 루마니아에서 독일인 소수민으로 자란 헤르타 뮐러의 유년 시절은 더욱 특별했다. 이차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고, 뮐러의 아버지 또한 나치 친위대로 징집되었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어머니는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우크라이나 수용소로 끌려가 오 년간 강제 노역을 해야 했다. 소용돌이치는 역사와 비극적인 가족사는 유년 시절을 무겁게 짓눌렀고 뮐러는 그 강렬한 기억을 작품 속에 담아냈다. 전쟁터에서 다른 군인들과 함께 러시아 여자를 겁탈한 아버지의 이야기나 머리채를 잘라 불태우는 어머니의 이미지는 독자들에게 전율을 안긴다. 뮐러 문학의 힘은 이 전율에서 나온다. 그 찬란한 시작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헤르타 뮐러는 루마니아 바나트 지방의 독일 소수민이 모여 사는 슈바벤 마을에서 태어나 독일어를 모국어로 쓰는 가정에서 자랐다. 나치가 몰락하고 루마니아 독재정권의 횡포가 갈수록 심해지는 바깥세상과는 고립된 고향 마을은 뮐러에게 '모든 것이 고여 있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감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연작소설 「저지대」는 삼백여 년 전부터 그곳에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고향 니츠키도르프의 농부들에 관한 이야기이자 공포와 불안이 숨 쉬는 공기까지 배어 있는 이곳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기록이다. 작가 특유의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통해 유리처럼 투명하지만,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유년 시절의 기억을 독자 앞에 그려 보인다. 이 작품은 소녀의 시선을 통해 분석적이고 환상적인 언어로 소수계 독일 민족이 살아가는 시골 마을의 숨 막힘, 유년 시절의 공포를 그려냈다.

 

 

 이 작품에서 루마니아 독재 정부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나 성찰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타국 루마니아에서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 바나트 슈바벤 사람들의 삶을 미화하지 않고 담담히 묘사할 뿐이다. 그런데도 기계공장의 번역사였다가 당국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작가의 실제 경험을 엿볼 수 있는 <잉게>를 비롯해 검열로 삭제되었던 <불치만 씨> <의견> 등과 그들만의 관습과 규칙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마을 연대기>에서는 예리한 현실 인식과 풍자적인 사회비판, 정치적인 거센 저항의 입김을 느낄 수 있다.

 그럴 뿐만 아니라 표제작 「저지대」에서는 “독일 개구리”로 표현되는 독일적 오만함에 대해서 날카롭게 비판한다. “모두 이곳으로 멀리 떠나오면서 개구리를 한 마리씩 가져왔다. 그들은 이 땅에 존재하게 된 후로 자기들이 독일인이라고 자랑하면서 자기들의 개구리에 대해서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들이 말하길 거부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처럼 뮐러는 독일 고유의 것과는 다른 방식을 절대 용인하지 않고 다른 것을 ‘마녀’로 규정짓고 외면하는 바나트 슈바벤 독일인들을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연작소설 『저지대』 출간 이후 뮐러는 보수적인 독일 소수민 사회에서도, 루마니아 사회에서도 배척당했다. 뮐러는 독일 소수민 사회가 원하는 작품을 쓸 수도, 루마니아 독재정권에 협조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루마니아에서 독일인이었던 것처럼, 1987년 독일로 망명한 이후, 독일에서는 늘 루마니아인이었다. 뮐러는 모국어가 다른 언어와 만나는 것은 그로 인해 사물이 머물 정거장이 한곳에서 여러 곳으로 늘어나는 긍정적인 일이라 말하며, 자신의 영원한 이방의 운명을 작가적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모국어에서 ‘소외’의 표현을 찾아내는 뮐러는 프라하에서 독일어로 글을 쓴 카프카에게 비견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