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국 현대소설

알퐁스 도데 장편소설 『사포(Sapho)』

by 언덕에서 2022. 11. 8.

 

알퐁스 도데 장편소설  『사포(Sapho)』

 

 

프랑스 자연주의 소설가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1897)의 장편소설로 1884년 발표되었다. ‘파리의 풍속’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사포(Sapho)라는 별명을 가진 창부(娼婦) 파니 르그랑과 남프랑스 출신의 청년과의 연애 생활에다 여자와 데카당의 무리와의 애욕 생활을 점철시켜 당시의 파리 풍속을 생생하게 그려낸 연애소설이다. 줄거리는 극히 단순하여 파리에 나온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출생의 성실한 청년 '장 고셍'과 사포(시인과 음악가들에게 그 이름이 구가되던 옛 그리스의 여류시인)라는 별명을 가진 미모의 모델 '파니 르글랭'과의 열렬한 관능적인 연애가 주제이다.

 6월 어느 날 밤, 야자나무와 양치류 식물이 가득 찬 온실에서 한 이집트 여인이 외교관 지망생 장 고셍 앞에서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소설에서 알퐁스 도데는 남녀 간에 내재한 잠재적인 사랑의 심리적 욕망과 갈등을 회화적이며 음악적인, 한 편의 시를 연상시키는 문체로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프랑스 영화 <sapho>, 1997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사포’는 그리스의 여성 시인 사포를 가리키는데 소설에서는 여주인공 파니 르글랭의 별명이다. 사포의 조각상의 모델이 되면서 파니는 사포라고도 불린다. 주정뱅이 마차꾼의 딸인 파니는 남의 손에 자라다가 열일곱 살에 조각가 카우달의 눈에 띄어 모델이 되고 동거녀가 된다. 그런 그녀를 시인 라구르너리가 달콤한 시로 유혹하고 파니는 새로운 동거생활에 들어간다. 그렇지만 그 또한 삼 년 만에 종지부를 찍게 되고 그녀는 또 다른 예술가의 손에 넘어간다. 파니의 남성 편력은 그런 식으로 이십 년 가까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어느 가면무도회에서 장 고셍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6월 어느 날 밤, 야자나무와 양치류 식물이 가득한 온실에서 한 이집트 여인이 외교관 지망생 장 고셍 앞에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흰 비단 레이스가 달린 스페인 수녀 복장의 사포는 푸른색 양모로 만든 긴 드레스에 어깨까지 맨살을 드러낸 채 장 고셍 곁에 다가와,

 “당신 눈동자 색깔이 마음에 들어요. 이름이 뭐죠?”

라고 묻는다. 그것이 장 고셍에게 밀어닥친 폭풍 같은 사랑의 시작이다. 파니는 무엇보다도 장의 젊음에 반한다.

 스물한 살의 미남 청년 장은, 파니를 희롱하거나 숭배한 예술가나 부르주아들이 갖고 있지 않은 젊음이라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스물한 살의 나이와 단지 사랑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 단순함, 그게 바로 아름다움’이라는 게 파니의 생각이다. 열다섯 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동거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들은 두 가지 장애에 부딪힌다. 하나는 파니의 과거이고 다른 하나는 두 사람의 계급 차이다. 남부 프로방스 출신으로 파리 사교계에 익숙하지 않았던 장은 파니의 남성 편력을 알게 되면서 당혹감을 느낀다. 파니가 내뱉는 저속한 말들도 불편하다. 장은 지방 호족의 장남으로 외교관이 되기 위해 파리에 상경했으며 시험에 합격한 뒤 연수 기간만 한시적으로 파니와 동거하리라 생각한다. 사회 통념상 하층계급 출신의 ‘매춘부’ 파니는 동거 상대는 될지언정 배우자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자 파니와의 관계에 점점 염증을 느끼던 장이 이렌느라는 젊은 처녀를 사랑하게 된다. 둘의 관계는 파국에 이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두 사람은 서로를 “더러운 부르주아!” “화냥년!”이라고 부르면서 감정의 밑바닥까지 내보인 상태였다. 비록 파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장과의 이별을 아쉬워하지만, 장에게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도 이해한다.

 파니를 떠난 장이 이렌느와 결혼하고 자신의 사회적 위치로 복귀한다. 그러나 파니가 사랑했던 가난한 조각가 플라망이 위조수표 발행 혐의로 구속됐다가 풀려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장은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금 파니를 찾아간다. 이 선택의 결과로 장은 이렌느와의 파혼하게 되고 아버지와도 의절한다.

 장은 다만 외교관으로 파니와 페루로 가려고 한다. 마지막 순간 파니는 자신이 동참하기엔 이제는 젊지 않다는 이유로 장을 거부한다. 이미 자기가 젊지 않음을 자각한 사포가 제의를 거절하자 장은 간신히 애욕의 수렁에서 해방된다.

 

프랑스 자연주의 소설가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1897)

 

 “더러운 부르주아!”

 “화냥년!…… 끝장나서 속이 다 후련해…… 더는 너와는 살지 않겠어!”

 “가, 썩 꺼져. 나도 지긋지긋하던 참에 잘됐어…….”

 조셉은 팔을 걷어붙이고 욕을 퍼부어대며 싸우는 그들의 모습을 잔디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았다. 한참 싸움이 무르익어 가는데 난데없이 뚜우 하는 무시무시한 뿔 나팔 소리가 숲의 정적을 깨고 연못에 부딪쳐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지겹지도 않아요?…… 아직도 싸울 힘이 남았어요?”  ―본문 208쪽

                                                (중략)

 그는 실내복 안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파니의 몸을 품에 안았다. 농익은 여자의 육체가 발산하는 열기와 체취 그리고 자기 입술에 그녀의 눈물이 번져 드는 입맞춤에 그의 감정은 혼란스러워져 갔다. 그녀는 그윽하게 그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하룻밤만, 딱 하룻밤만…….”

 그때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기차!……’

 그는 그녀에게서 몸을 빼내고 역까지 단숨에 줄달음질 쳤다. ―본문 275쪽

 

 

 장편소설 사포는 <별>을 비롯해 <마지막 수업>, <풍차 방앗간 편지> 등 주로 순수한 아름다움과 따뜻한 시정(詩情)을 담은 작품으로만 알려진 알퐁스 도데의 이질적이고 이색적인 작풍의 소설이다. 여자를 만나 첫눈에 반한 주인공은 그녀를 안고 5층까지 올라간다. 처음에는 새처럼 단숨에 날아오른다. 하지만 차츰 무게가 느껴지며 피아노를 운반하는 것처럼 헐떡거리게 된다. 마지막 계단을 오를 즈음에는 무시무시한 바위에 짓눌리듯 숨이 막힌다. 여자를 내동댕이치고 싶은 충동마저 느낀다.

 ‘시작은 깃털처럼 가볍지만, 끝자락엔 쇳덩이처럼 무거워지는 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알퐁스 도데는 사랑의 자초지종을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

 장편소설 사포는 강렬한 유화와 같이 원초적이고 농염한 소설이다. 원래 평론가들이 도데의 대표 걸작으로 꼽아 온 성애 소설이기도 하다. 외교관 시험을 준비하는 명문가 출신의 스물세 살 장 고셍과 열다섯 살 연상의 여자 파니 르글랭의 열정적이고 비극적인 사랑의 전말을 그렸기 때문이다. 알퐁스 도데가 유례없이 민감하고 섬세한 에로티시즘 감수성, 신경질적이면서도 세련된 재치로 그려낸 작품이기도 하다. 남녀관계의 변모에 대한 소름 돋도록 현실적인 묘사와 촘촘하고 직관적인 심리 묘사가 돋보인다. 정확한 심리분석, 화려한 풍속 묘사, 서정적인 문체 등으로 도데의 작품 중 최고 걸작의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