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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나도향 단편소설 『벙어리 삼룡이』

by 언덕에서 2022. 11. 11.

 

나도향 단편소설 『벙어리 삼룡이』

 

 

나도향(羅稻香.1902∼1926)의 단편소설로 1925년 [여명] 7월호에 발표되었다. 나도향이 죽은 이듬해인 1928년 8월에 [현대평론]에 재수록되었으며, 나운규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던 작품이다. 신체적 불구와 함께 신분적인 멸시를 받는 한 인간의 순수하고 강렬한 사랑을 통해, 고결한 사랑의 가치, 독자적인 인간임을 자각하는 과정이 불의 이미지 속에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일제하 한국인의 인물상을 그린 작품이란 해석도 있다.

 이 작품은 서두에 ‘나’라는 관찰자가 나와서 오 생원과 그 집안, 그리고 벙어리 삼룡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나’가 객관적 관찰자로 나오지만, 삼룡이를 소개하면서부터는 ‘나’는 사라지고 시점은 삼인칭으로 바뀌게 된다. 독자는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다가 갑자기 전혀 다른 화자의 이야기로 관심의 방향을 돌리게 된다. 시점이 일정치 않아 약간의 혼란은 오지만, 이야기의 큰 줄기는 삼룡이를 중심으로 짜임새 있게 전개된다.

 벙어리 삼룡이는 비록 병신이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 의미를 인식하고 발견해 가는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오직 주인에게 복종하는 일을 자기의 운명으로 알고 있던 삼룡이는 새아씨가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주인 아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자신도 사람이라는 주체적 존재로서의 눈을 뜨게 된다. 새아씨를 향한 연민의 정을 통해 삼룡이는 새롭게 탄생한다. 이 작품은 벙어리인 삼룡이가 에로스의 힘과 자기희생으로써 새로운 인간으로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1929년 나운규에 의해, 1964년 신상옥에 의해 , 1973년 변창호에 의해 세 차례나 영화화되었다.

 

영화 [벙어리 삼룡이] 1964년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십사오 년 전, '내'가 열 살 안팎일 때의 일이다. 청엽정(동리 이름에 '정'이 붙는 것은 일본 강점기기 때문이다)을 연화봉이라고 부를 무렵, 그 동네에는 인심이 후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세력도 있는 오 생원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오 생원의 집에는 삼룡이라는 벙어리 하인이 있었는데, 볼품없는 외모에 흉한 걸음의 그는 마음이 진실하고 충성스러우며 부지런해서 주인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한편, 버릇이 없고 성격이 고약한 주인 아들은 삼룡이를 괴롭히나 삼룡이는 언제나 참는다.

 주인 아들은 현숙한 처녀에게 장가를 든다. 그러나 매사에 훌륭한 신부와 비교되자 열등감에 사로잡힌 그는 자기 아내를 미워한다. 삼룡이는 그것을 안타까워한다. 주인에게 충성스러운 삼룡이에게 새아씨는 부시 쌈지를 하나 만들어 주었는데, 그것이 말썽이 되어 삼룡이는 주인 아들에게 죽도록 맞은 뒤 내쫓긴다. 어느 날, 삼룡이는 주인 아씨가 중병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걱정 끝에 그 방에 들어갔다가 들켜서 오해를 받고는 매를 맞고 쫓겨난다.

 그날 밤, 그 집에 불이 난다. 삼룡이가 그 집에 불을 지른 것이다. 길 속으로 뛰어든 삼룡이는 주인을 구출해 낸 다음 다시 불길로 들어가, 타 죽으려고 불 속에 누워 있는 새아씨를 찾아내어 안고 지붕으로 올라간다.  결국은 새색시를 안은 채 죽게 된다. 삼룡이는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평화롭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영화 [벙어리 삼룡이] 1929년

 

 이 소설은 일인칭에서 갑자기 삼인칭으로 시점이 바뀌는데, 이는 내부 이야기와 외부 이야기로 이루어진 액자소설의 구조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구조는 다소 불완전하다. 인물의 구성은 소박하고 표현 능력이 거세된 소외자인 삼룡이가 가장 분명한 성격을 지닌다. 그 대척점에 새서방이 놓인다. 새서방은 이를테면 적대자인 셈이다. 삼룡이는 주인 아씨에 대한 숭고한 정신적 동정과 애정을 지니고 있다.

 주인공 삼룡이는 육체적으로나 신분적으로 너무나 미천하고 열등한 인물이다. 그는 키가 작고 벙어리이며, 얼굴엔 마맛자국이 남아 있는 하인이다. 그는 주인집에서 소처럼 일하면서도 만족하며 살아간다. 그런 삼룡이와 대조적으로 주인어른의 사랑을 받는 인물이 주인의 아들이다. 주인 아들은 너무나 천방지축으로 놀아나고, 버릇없고, 성격마저 포악하다. 그러나 주인어른은 제 아들을 감싸기만 한다. 그런 주인 아들은 단지 육체적 결함을 지녔다는 이유로 삼룡이를 괴롭히면서 즐거워한다. 삼룡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순응한다.

  그런데 아들이 장가를 들어, 맞이한 새아씨의 인물됨을 시기하여 새아씨에게도 삼룡이처럼 학대하며 매질을 한다. 점차 삼룡이는 새아씨에게 행하는 어린 주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게 되고, 새아씨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지니게 된다. 이때부터 삼룡이의 의식이 바뀌기 시작한다. 자신이야 모든 것이 형편없어서 짐승 같은 취급을 당하지만, 어린 주인보다 더 뛰어난 인품의 새아씨가 어린 주인에게 학대받는 것에 의심하기 시작한다. 삼룡이의 신분 질서에 관한 생각이 점차 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어린 주인의 오해 속에서 심하게 매를 맞고 쫓겨나게 된다. 믿었던 주인어른의 비정함과 지주의 횡포로 삼룡이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이후 삼룡이는 자신을 아껴주던 주인어른도 단지 자신을 하인으로 생각할 뿐,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주인집에 대한 배신감에 집에 불을 질러 복수한다.

 

 

 나도향은 한국 문단에서 이상·김유정과 더불어 이십대의 나이에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세상을 떠난, 천재 작가 중 한 명이다.  나도향은 3·1운동의 여파가 채 식지 않은 1920년, 생애 첫 소설 「청춘」을 탈고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1926년 폐결핵으로 사망하기 직전까지의 6, 7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기에 남긴 소설들은 단편 23편, 중편 1편, 장편 2편, 미발고 장편(유고) 1편에 이른다. 그중 나도향의 대표작으로 통설되는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뽕>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에 남긴 명작들이다.

 작중 삼룡이는 주인어른을 불길 속에서 구하고 새아씨를 구하려다 죽고 만다. 삼룡이가 복수하고 싶었던 대상이 지주의 아들이지만, 자신에게 애정을 준 주인어른을 구하려 한 점에서 삼룡이가 얼마나 인간적인 인물인지 엿볼 수 있다. 삼룡이의 행동을 살펴보면, 작품의 전반부에서는 무조건 순종하는 하인이지만, 주인집에서 비인간적인 태도로 아씨를 대하는 것을 보고 의심하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자신의 판단대로 행동하는 적극적인 인물로 변해간다. 자신이 하나의 인간임을 깨달아 가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단편소설에서는 보기 어려운 입체적 경향을 가진 인물 설정이다.

 마지막 결말에서 삼룡이의 방화와 죽음은 그 의미가 크다. 1920년대 유행하던 사회주의 경향의 신경향파의 결말 처리 방식과 유사하지만, 방화와 죽음에서 ‘불’이라는 상징을 통해 지주의 부당함에 대한 분노와 저항심을, 죽음을 통해 사랑의 숭고한 희생을 나타낸 것은 이 작품의 뛰어난 소설적 예술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