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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효석 단편소설 『분녀(粉女)』

by 언덕에서 2022. 11. 14.

 

이효석 단편소설 『분녀(粉女)』

 

 

이효석(李孝石, 1907~1942)의 단편소설로 1936년 1∼2월  [중앙]지 합본호에 발표되었다.

 어느 날 밤, 분녀는 집에서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돼지가 갑자기 달려와 막다른 벽에 분녀를 밀어 넣고 꼼짝도 못 하게 했던 꿈과 같은 경험이다. 그곳에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었으나 모두 깊이 잠든 사이, 누군지도 모르게 일어난 일이었다. 그가 나간 후 소리를 지를까 생각했지만 아무 일도 없는 듯 세상은 고요하기만 했다. 분녀 주변에 있는 모든 남자가 의심스러웠다. 반년 동안 사귀어 온 애인 상구가 있었음에도 인부 명준, 가게 주인 만갑을 비롯해서 찬수․왕가 등과 육체적 향락을 나눈 분녀는 상구에게 버림을 받는다. 집에서도 쫓겨났다가 돌아와 들일을 돕는 분녀는 얼마전에 귀향한 명준이가 허락만 한다면 그와 평생을 같이 하리라 생각한다.

 이 작품은 이효석의 <장미 병들다> <화분> 등과 함께 인간 본연의 원시적 성 의식을 다룬 작품으로, 무절제한 분녀의 애욕 행각을 그린 에로틱한 단편이다. 작가는 총독부 경무국 취직사건(1931), 구인회(九人會, 1933) 가입을 계기로 초기 동반자 문학의 경향을 서서히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한 일련의 전기에서 나타나는 문학적 특질인 에로티시즘이 미학적으로 형상화된 ‘애욕 소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분녀라는 여성 주인공을 통해 식민지 농촌의 여성들이 주변 남자들에게 육체적인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소설적 관심은 물론 여성주의적 관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기 주체를 확립하지 못한 여성의 수동적 태도가 그녀의 운명을 정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1968년 김수용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는데, 제2회 [서울신문 문화대상]을 받았고, 제6회 [청룡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후 1982년 리메이크 영화가 <산딸기>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어 흥행에 대성공했다. 

 

영화 [산딸기], 1982년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농장에서 잡일이나 하며 살아가는 분녀는 반 년 동안 사귀어 온 애인 상구가 있다. 어느 날 밤, 분녀는 어머니와 동생이 함께 곤하게 잠자는 방에서 겁탈을 당한다. 농장에서 일하는 명준이었음을 알았지만, 명준은 훌쩍 금광을 찾아 떠나고 만다.

 분녀는 단오 무렵 상점을 하는 만갑에게 또 당하고 큼직한 지폐 한 장을 받지만 던지지 못하고 오게 된다. 그 뒤 만갑의 상점 점원인 천수가 만갑처럼 차리고 와서 분녀를 유인, 몸을 덮친다. 분녀는 체념한 상태 속에서 무엇인가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만갑은 이미 다른 여자에 빠져 있었다. 분녀를 가까이하던 상구마저 투옥되고 나서 분녀는 갈팡질팡한다. 사내에 대한 증오가 분녀의 몸속에선 욕정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녀는 중국인 왕가에 또 당한다.

 그 무렵 출옥한 상구에게 분녀는 대담하게 스스로 몸을 주었으나 상구는 타락을 목격하고 그녀를 떠난다. 거리에 나돌기 시작한 딸의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가 분녀 앞에 나타났을 때 그녀는 죽으려고 들녘을 방황한다. 그때 첫 남자였던 명준이가 나타난다. 분녀는 명준이가 허락한다면 명준과 일생을 같이할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 [분녀], 1968

 

 우리도 없는 농장에 아닌 때 웬일 인가들 의아하게 여기고 있는 동안에 집채 같은 도야지는 헛간 앞을 지나 묘포 밭으로 달아온다. 산도야지 같기도 하고 마바리 같기도 하여 보통 도야지는 아닌 데다가 뒤미처 난데없는 호개 한 마리가 거위영장같이 껑충대고 쫓아오니 도야지는 불심지가 올라 갈팡질팡 밭 위로 우겨 든다. 풀 뽑던 동무들은 간담이 써늘하여 꽁무니가 빠지라고 산지사방으로 달아난다. 허구많은 지향 다 두고 도야지는 굳이 이쪽을 겨누고 욱박아 오는 것이다. 분녀는 기겁을 하고 도망을 하나 아무리 애써도 발이 재게 떨어지지 않는다. 신이 빠지고 허리가 휘는데 엎친 데 덮치기로 공칙히 앞에는 넓은 토벽이 막혀 꼼짝 부득이다. 옆으로 빗 빼려고 하는 서슬에 도야지는 앞으로 왈칵 덮친다. 손가락 하나 놀릴 여유도 없다. 육중한 바위 밑에서 금시에 육신이 터지고 사지가 떨어지는 것 같다. 팔을 꼼짝달싹할 수 없고 고함을 치려야 입이 움직이지 않는다. 분녀는 질색하여 눈을 떴다. 허리가 뻐근하며 몸이 통세난다. - 본문에서

 

 

 단편소설  『분녀』를 비롯한 이효석의 일련의 성적 의식을 담고 있는 작품의 경향은 관능적인 감각과 인간 본능의 생명 감각이 혼합된 작품 구조를 지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 또한 농장에서 잡일이나 하고 사는 분녀가 성적으로 타락해 가는 성 의식의 변모 과정을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처녀인 분녀는 상구, 명준, 만갑, 천수, 왕가 등 다섯 명의 남정네와 성 관계를 갖는다. 이러한 분녀의 성적 타락 과정은 전통적 윤리 의식에 정면으로 대응하면서, 인간 본연의 삶 의식을 추구하려는 원시적 생명감에 충만하여 있다.

 이 작품은 가난한 분녀가 성적으로 타락해 가는 과정을 통해 칠거지악의 엄격한 윤리 의식이나 터부시했던 섹스 모럴의 유교적 관념에 과감한 도전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일면 인간 본연의 원시적인 행위이다. 또한 생물학적인 측면에서도 자연스러운 섹스 생리의 발산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상실해 가는 인간 정신의 윤리 의식이 독자에게 심각한 문제점을 제시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