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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김유정 단편소설 『산골나그네』

by 언덕에서 2022. 11. 16.

 

김유정 단편소설 『산골나그네』

 

 

김유정(金裕貞.1908∼1937)이 지은 단편소설로 1933년 3월 [제일선(第一線)] 제3권 제3호에 발표되었다. 이후 1936년 [서해공론]에 다시 발표되었으며, 그 뒤 1938년에 간행된 단편집 <동백꽃>에 수록되었다. 김유정의 작품에서는 1930년대 식민지 시대, 약탈당하고 배고픈 하층민들의 부도덕한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아내 팔기’라는 해학 속 비극도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남편이 도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아내에게 매음을 종용해 동네 유지에게 보내는 줄거리가 해학적이고 향토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소낙비>, 들병이 아내를 얻고자 하는 욕심에 제집의 솥을 훔치는 <솥>, 술집 작부까지 하다가 혼인 혼수를 들고 본남편과 도망가는 『산골 나그네』 등의 중심에는 생존을 위해 윤리마저 버린 일제강점기 농촌의 비참한 현실이 깔려 있다. 

 이 작품은 작자가 그의 고향인 실레 마을에서 십 리쯤 떨어진 덕두원에 있는 돌쇠네 집에 놀러 다니며 돌쇠 어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작품화했다. 줄거리가 몇 가지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등 완벽하지 못하고 끝나는, 비록 미숙한 초기 작품이다. 하지만 토착적인 우리말의 적절한 구사, 풍부한 어휘 그리고 분위기 전달 능력 등 농촌소설의 전형을 묘사하는 여러 가지 김유정만의 미덕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영화 [산골 나그네] , 1978 (사진 출처 : 시네21)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인 ‘산골 나그네’는 헐벗고 굶주린 유랑민 아낙으로 산골의 어느 가난한 주막집에 걸식 목적으로 들렀다가 과부인 주인의 호의로 며칠간 기식하게 된다. 그러다가 본의 아니게 작부 노릇도 하게 되고 여러 가지 곤욕도 치른다. 그러던 중, 그 집 아들 덕돌이가 함께 살자고 치근대는 바람에 몸까지 허락하게 된다.

 주인은 그녀가 큰 수입을 올려주자 집요하게 며느리가 되어 주기를 권유하여 마침내 덕돌이와 성례까지 치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이 그녀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오직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처지에서 이루어지며, 그녀 자신은 통 말이 없다. 어머니와 아들은 행복하지만, 무언으로 일관하는 여인의 속은 알 수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갑자기 여인은 덕돌이의 옷을 싸서 도주한다. 자다가 깬 덕돌이도 주모도 모두 그 이유를 모르고 허둥댄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병든 남편이 있었는데 그는 근처의 폐가에 몸져누워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고 있는 덕돌이는 수런대며 찾아 나서고, 여인은 훔쳐 온 옷을 남편에게 입힌 뒤 밤길을 재촉하여 산길을 달아난다.

 

영화 [산골 나그네] , 1978 (사진 출처 :시네21)

 

 아들과 홀어미가 사는 가난한 주막집에 한 여자 나그네가 찾아오고 홀어미는 나그네를 가족처럼 받아들여 함께 술집을 한다. 홀어미는 첫 결혼 시도가 돈 문제로 파토가 난 아들 덕돌과 술집에서도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어여쁜 나그네를 엮어주려고 한다. 그런데 둘이 결혼한 후 어느 날 한밤중에 덕돌이 불러 가보니 덕돌은 발가벗고 있고 나그네는 옷을 들고 달아난다. 홀어미는 처음에 나그네가 도둑이라고 생각했지만 베게 밑에 은비녀가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무언가 사연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홀어미와 덕돌이 나그네를 찾고 있는 한편, 나그네는 알고 보니 원래 남편이 있었고 그 남편에게 옷을 갖다주기 위해 도둑질을 했지만, 자신의 베개 밑에 있었던 은비녀는 훔치지 않았다.

 이 작품은 김유정의 다른 대부분 소설과 마찬가지로, 산골을 배경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 기법 면에서도 토속적 어휘를 많이 구사하고 있고, 아이러니와 유머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유정의 작가적 경향을 잘 대변한다.

 

 

 밤이 깊어도 술꾼은 역시 들지 않는다. 메주 뜨는 냄새와 같이 쾨쾨한 냄새로 방안은 괴괴하다. 윗간에서는 쥐들이 찍찍거린다. 홀어미는 쪽 떨어진 화로를 끼고 앉어서 쓸쓸한 대로 곰곰 생각에 젖는다. 가뜩이나 침침한 반짝 등불이 북쪽 지게문에 뚫린 구멍으로 새드는 바람에 반뜩이며 빛을 잃는다. 헌 버선짝으로 구멍을 틀어막는다. 그러고 등잔 밑으로 반짇고리을 끌어당기며 시름없이 바늘을 집어든다.
 산골의 가을은 왜 이리 고적할까! 앞뒤 울타리에서 부수수 하고 떨잎은 진다. 바로 그것이 귀밑에서 들리는 듯 나직나직 속삭인다. 더욱 몹쓸 건 물소리 골을 휘돌아 맑은 샘은 흘러내리고 야릇하게도 음률을 읊는다.
 퐁! 퐁! 퐁! 쪼록 퐁!  - 본문에서

 이 작품은 작가가 아이러니와 유머 기법으로 희극처럼 분장하였지만, 사실은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병든 남편의 솜옷을 위하여 위장으로 혼인까지 하여 몸을 허락한 후 야간도주 해야 하였던 여인의 행위가 얼핏 이해되지 않지만, 그러나 이것은 형벌보다 무서운 비극적 장면이다.

 한마디 거짓말도 하지 못하는 그녀의 순박함과 혼인예물로 받은 은비녀를 베개 밑에 묻어두고 가는 선량함 때문에 그녀에 대한 연민의 정은 더욱 절실해진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강한 휴머니즘의 정신으로 불행한 시대를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의 눈물겨운 삶을 생생하게 형상화하였다. 이로써 가난한 이들을 향한 독자의 사랑과 연민의 정을 일깨우려는 작가의 창작 의도를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