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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광수 장편소설 『마의태자(麻衣太子)』

by 언덕에서 2022. 10. 28.

이광수 장편소설 『마의태자(麻衣太子)』

 

 

 

이광수(李光洙. 1892∼1950)가 지은 장편 역사소설로 상ㆍ하편으로 나뉘어 1926년 5월 10일부터 동년 10월 2일까지 상편이, 그리고 1926년 10월 11일부터 1927년 1월 9일까지 하편이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이듬해, 1928년 1월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려 하자, 금강산으로 입산하여 마의(麻衣)를 입고 풀을 뜯어 먹으며 일생을 마친 마의태자의 이야기를 소설화한 내용이다. 역사소설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려는 계몽주의적인 의도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광수는 소설가ㆍ평론가ㆍ시인ㆍ언론인 등으로 근대 한국문학에서 가장 많이 활동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 일본 유학(와세다대학 철학과 중퇴)을 했으며, 상해임시정부에도 가담했다. 1921년 귀국 후에는 작가로, 언론인으로 활약했으며,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을 겪고, 친일문학에 가담했다. 해방 후 반민법(反民法)에 기소되었으며, 6ㆍ25 때 납북되었다.

 그의 최초의 소설은 <사랑인가>(1909)라는 일본어로 된 단편이며, 한글로 된 것은 단편 <무정>(1910.대한흥학보 11∼12호)이다. 그런데 보통 이광수의 초기의 대표작으로 치는 <무정>(1917)은 장편으로 [매일신보]에 연재되었으며 이 장편소설은 한국 근대소설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장편소설 『마의태자』는 이광수가 쓴 최초의 역사소설이자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장편 역사소설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 <마의태자>, 1956년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애꾸 소년 미륵은 어느 날 유모로부터 자신의 출생에 관한 비밀을 듣는다. 자신이 신라 경문왕의 아들이며, 자신의 어머니 설 부인은 경문왕의 왕후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미륵은 모친의 원수 갚기를 결심하고 신라 궁으로 들어가나 발각되어 쫓긴다. 태백산으로 도망친 그는 승려 선종이 된다. 서른 살 되던 해 다시 속세로 내려와 세력을 키운 그는 궁예란 이름으로 태봉국을 세우고 왕이 된다. 그러나 신하 왕건이 반역을 일으키고 궁예는 사망한다. 고려라는 국호를 정하고 왕이 된 왕건은 전쟁 없이 삼국을 통일하고자 한다.

 한편 신라에서는 경순왕이 등극하지만, 귀족들의 세력 다툼에 국력은 점점 약화하여 간다. 왕건은 딸 낙랑 공주를 경순왕의 아들 김충과 결혼시키기로 하고 딸을 신라로 보낸다. 낙랑 공주는 김충의 의로운 마음에 탄복하여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김충은 공주와 결혼하기를 거부한다. 경순왕은 신라를 다스릴 힘이 없자 고려에 항복하고, 낙랑 공주는 경순왕과 결혼한다. 나라가 망하자 김충은 베옷을 입고 금강산에 들어가 은거한다. 어느 날 왕건과 낙랑 공주가 금강산에 온다. 낙랑 공주는 깨달은 바 있어 출가하고, 중이 되어 마의태자 김충과 재회한다. 왕건은 김충과 마주치자 용서를 빌고, 마의태자 김충은 왕건을 용서한 후 홀연히 사라진다.

 

KBS TV 드라마 <태조 왕건>, 2000년

 

 이 작품은 이광수가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창작한 역사소설이다. 이 작품은 크게 상편과 하편으로 나뉘는데, 상편에서는 궁예를 중심으로 한 사건이 전개되고, 하편에서는 왕건을 중심으로 한 삼국통일 과정이 상세히 그려진다.

 작품 제목으로 보아서는 ‘마의태자’를 중심으로 한 사건이 전개되어야 하나, 실제 작품에서는 궁예를 중심으로 한 신라 말년의 정치 상황에 관한 서술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점은 김동인 이후 많은 평자에 의해 구성상의 약점으로 지적됐다. 또한, 인물 대부분이 권선징악적 도덕성에 의해 지배되어 선악의 이분법적 대립을 보이고, 인물 성격의 변화 과정과 사건 전개의 필연성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광수의 소설 『마의태자』의 주인공은 제목과는 달리 궁예이다. 소설의 전반부는 궁예의 출생과 입신출세의 과정이, 또 후반부는 왕건의 후삼국 통일 과정이 주요한 줄거리를 이룬다. 마의태자는 소설의 말미에서 신라의 초빙을 받은 왕건이 데리고 온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와의 관계에서 잠깐 드러나 있을 뿐이다.

 이 소설에서 궁예는 담대하고, 용맹스러운 힘이 출중하며, 진실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는 신라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궁중의 음모로 인해 버려지고 다시 자신의 힘으로 자수성가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에 비하면 궁예의 동문으로 그려져 있는 견훤이나, 궁예를 배반하고 왕권을 찬탈한 왕건조차도 부정적인 인물로 표현되어 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서 일본의 검열에 걸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일반 독자들에게 애국정신을 고취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공리주의적 효용성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문학적 형상화에는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소설은 1926년 5월 10일부터 1927년 1월 9일까지 동아일보에서 연재되다가 1928년 단행본으로 출간된 춘원 이광수의 장편 소설이다. 이광수가 집필한 최초의 역사소설이자 한국 근대문학에 있어서 역사소설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현시대에 이 작품에 대한 인지도와 달리 신문연재 때에도 인기가 높았고, 1930년대까지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던 인기작이었다.
제목만 보면 마의태자가 주인공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실상 주요 주인공은 오히려 궁예이다. 아무래도 마의태자 김충에 대한 사료도 부족하고, 최초의 기획 의도와는 달리 연재가 계속되면서 후반부의 분량이 줄게 되면서 전체적인 이야기의 비중이 궁예쪽으로 쏠린 듯이 보인다.
 이 소설이 연제된 1920년대는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 통치가 되돌릴 수 없어 보이는 암흑기이다. 이런 시대에 식민지 시대의 한반도 지식인이 어떠한 역사 인식을 하고 있었는지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면 후삼국시대의 혼란한 정치 상황과 이를 극복하고 일어나는 우리 민족의 저력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볼 수 있으나,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면 왕건의 반역, 신라 경순왕의 고려에의 항복 등 우리 민족의 아픈 부분을 강조함으로써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려한 것이 아니냐는 부정적인 시각이 동시에 존재한다.
 실제로 춘원 이광수의 친일 이력이 부각됨에 따라 후자의 의혹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 이 작품이 현대에서 크게 각광 받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최초의 역사소설로서의 가치는 제대로 인정해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이 책을 읽고, 주체적으로 이 작품과 춘원 이광수의 공과에 대해서 논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광수는 소설 『마의태자』에서 마의태자의 이름을 '김충'으로 정했으나 실제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의 이름은 '김일(金鎰)'이며, '김부(金富)'는 마의태자의 또 다른 이름으로 추측된다. 지난 1987년 인제 갑둔리에서는 고려 초기에 주조된 것으로 보이는 5층 석탑이 발견되었다. 석탑에 새겨진 명문을 판독해 보니 "김부(金富)라는 사람의 수명이 오래되고 또 집안이 오래도록 잘 되기를 기원하며 이 탑을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명문 속의 김부(金富)는 누구일까? 시기적으로 봐서도 마의태자와 무관하지 않은 김부(金富)는 바로 마의태자 김일(金鎰)의 또 다른 이름임이 조사를 통해서 밝혀졌다. 부(富)와 일(鎰)은 글자로만 본다면 무관해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표기가 향찰이었기 때문에 부와 일을 같이 썼던 것이다. 이러한 예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도 흔히 보이고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름을 숨기고자할 때 뜻으로 이름을 표기했다고 보인다. <동아일보, 2013-01-25>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  :

 1926년 1월 서울에서 조직된 계몽적 독립운동단체. 21년 상해에 있던 이광수(李光洙)는 안창호로부터 흥사단의 한국지부 조직의 사명을 받고 귀국하여 22년 2월 서울에서 청년들의 수양기관을 표방한 [수양동맹회]를 결성하였다. 23년 1월 평양에서 대성학교 졸업생과 전 신민회원들을 중심으로 [동우구락부]가 만들어졌다. 두 단체는 같은 [흥사단] 계열로 26년 1월 통합하여 [수양동우회]라고 하였다. 이 해 여름 정치적 결사로서의 개조문제가 토의되었으며, 주요한ㆍ조병옥 등이 수양단체로는 청년투사를 양성하기 곤란하므로 실력양성주의를 청산하고 정치적 훈련투쟁을 거쳐 직접적 혁명운동을 단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1929년 11월 [수양동우회]는 국외에 있던 [흥사단]과 통합하여 [동우회]로 개칭하였다. 회원의 다수는 변호사ㆍ의사ㆍ교육자ㆍ목사ㆍ저술가ㆍ광산가ㆍ상공인 등으로 상당한 자산을 가지고 있었던 부르주아들이었다. 기관지 [동광(東光)]을 발행하였고, [수양동우회]가 전개한 농촌운동은 주로 이상촌 건설과 협동운동이 중심이었다.

 동우회원들은 1937년 8월 경성지회 관계로 55명, 11월에 평양선천지회 관계로 93명, 38년 3월에 안악지회 관계로 33명 등 모두 181명이 붙잡혔다. 이 중 41명이 기소되었다가 7월에 모두 보석되었고 1941년 11월에는 전원 무죄임이 선언되었다. 1937년 종로경찰서에서 해산결의 도장을 찍고 해산하였다. 이후 동우회는 본회와 회우의 현금은 물론이고, 그 사무기구를 판 대금과 통속교육보급회의 토지와 동광사의 사무기구까지 팔아 국방헌금으로 냈다.

 수양동우회사건은 1937년 6월 [수양동우회]가 [흥사단]과 같은 민족단체임을 안 일본 경찰이 흥사단원 200여 명을 잡아 가둔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동우회는 강제 해산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