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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황석영 중편소설 『한씨(韓氏)연대기』

by 언덕에서 2022. 10. 19.

 

황석영 중편소설 『한씨(韓氏)연대기』

 

 

황석영(1942~ )의 중편소설로 1972년 [창작과 비평] 지 봄호에 발표되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한국 전쟁이라는 왜곡된 역사 속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한 지식인의 시련을 사실적으로 그려 보임으로써 역사의 진행과 개인 의지의 갈등, 역사 전개의 파행 등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다. 즉, 이 작품은 한국 전쟁을 전후해 분단 상황의 북과 남에서 고지식한 한 인간이 겪게 되는 희생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분단 상황 자체에 대한 투시가 아니라, 그 상황에 주인공 한영덕의 인간성을 대응시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씨연대기』는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 북쪽과 남쪽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양심적인 한 피난민 의사의 비극적인 일대기를 그린 작품으로, 끝나지 않은 분단체제가 낳은 인간의 비극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주인공은 북에서 당원과 군인보다 위급한 일반 환자를 먼저 돌보았다는 이유로 투옥된 전력이 있다. 이후 그는 목숨을 걸고 넘어온 남쪽에서도 주변에 이용당하다 간첩으로 몰려 고초를 겪는다. 이 작품은 분단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개인사의 층위에서 어떤 뒤틀림과 단절로 작용하는지를 소설만이 가능한 방식으로 증거한다. 한편으로, 황폐한 역사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인간의 존엄을 증명하며 보편적인 울림을 불러일으킨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노인 한영덕은 낡고 좁은 다세대 주택에 살며 장의사 일을 도와 술로 세월을 보내는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다. 어느 날, 뇌 혈전으로 쓰러진 그는 친구 서학준과 누이동생, 그리고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삶을 마감한다. 

 한영덕은 젊었을 때 김일성 대학 의학부 산부인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며 의사들이 전선으로 징집되었지만, 그는 성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남겨진다. 기독교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반동분자로 낙인찍히고, 전쟁 중 민간인을 먼저 치료한 이유로 비난을 받아 투옥된다. 평양에 입성한 유엔군과 국군이 접근했을 때 그는 총살형에 처해졌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남한으로 내려온다.

  남으로 내려온 한영덕은 가족을 뒤로하고 남하하며, 아들이 인민군으로 징집되지 않았을까 걱정해 포로수용소 근처를 배회하다 의심을 받고 연행된다. 그는 누이동생 한영숙과 재회해 몸을 의탁하지만,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해 무자격자의 산부인과에서 불법 낙태 수술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 직장을 그만두고 부산으로 내려가지만, 결국 자신이 박 씨에게 고발당해 간첩으로 오해받고 고문을 당하게 된다.

  한영덕은 누이동생과 친구 서학준의 도움으로 풀려나지만, 삶의 의욕을 잃고 폐인이 되어 윤 마담과 딸을 버리고 떠난다. 그는 끝내 가족들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딸 혜자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도 울지 않으며, 그가 살았던 시대와 삶을 이해하게 된다.

  한영덕이 세상을 떠난 후, 혜자는 잠시 잠에 빠졌다가 새벽에 깨어 아버지의 수첩을 들고 그 집을 떠난다. 한영덕의 고별식은 끝났고, 그는 이제 더 이상 망령마저 남기지 못한 채 땅 속에 묻힐 운명이다.

 

 한영덕의 인간성은 어릴 때부터 그와 함께 자라나 의사의 길에 들어섰고, 북한과 남한을 다 체험하는 점에서 꼭 같은 길을 걸으면서, 성품으로는 정반대인 서학준 박사와 대조되고 있다. 한영덕에 대한 서학준의 평은 이렇다.

 “한 군은 내 생각에두 너무 고디식하구 순수했디요. 그게 이 친구의 단점입네다. 난 이 사람하군 정반대디만, 어릴 적부터 쭉 같이 자랐댔구, 도재 남을 속일 줄두 모르구 융통성두 없는 이 사람 성미가 짜증이 나멘서두 밉질 않았디요. 아니, 오히려 그런 면을 도와했대시오.”

 이렇게 성격이 정반대인 서학준이 소설 속 사건 전개의 주요 대목에서마다 한영덕에 비교됨으로써 한영덕의 인간성이 더욱 잘 드러나 보이는 효과가 있다.

 한영덕은 6ㆍ25 때 후퇴했던 국군이 삼팔선을 넘어 북상하는 상황을 맞아, 잠시 몸을 피했다가 국군을 맞이하자는 서학준의 제의를 뿌리친다.

 “난 여기 남갔다. 환자가 있는데 의사를 죽이기야 하갔나. 머 죄진 게 있어야디.”

 한영덕의 소신이었다. 한국 백성이야 원래 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다가 일제의 발아래 짓밟혔고, 이제는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 죄 없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만 믿고는 살아갈 수 없게 된 세상에서 한영덕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김일성대학 의학부 교수이며, 의사인 한영덕은 한 소녀의 위급한 환부 수술에 몰두하다가 원장으로부터 질책을 받는다.

 “까짓 애들은 또 낳는 거요. 지금 경무원이 기총 소사의 관통상을 입구 피를 흘리는데, 이런 따위 일에 시간을 낭비하기요?”

 이 질책에 대한 한영덕의 대답은 간단하다.

 “좀 비켜 주시오. 어둡습네다.”

 한영덕은 평양을 철수하는 인민군에 의해 처형되었으나, 총알이 스치고 지나가 살아났다. 월남해서 아들을 찾으려고 포로수용소 주변을 서성이다가 간첩 혐의로 붙들려 고난을 겪는다.

 이후 무면허 의사들과 동업을 하다가 남의 죄를 뒤집어쓰게 되었고, 모략으로 지난날의 간첩 혐의까지 다시 살아나 참혹하게 고문을 당한다. 한영덕이 다시 사회에 나왔을 땐 이미 폐인이 다 된 상태였다. 이렇게 시달리고 행패를 당해 죽어가야 하는 죄 없는 사람, 고지식한 사람의 한 생애가 곧 분단 세대의 본질을 표상하고 있다.

 

 

 아직도 분단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지만, 한영덕 노인의 딸 혜자처럼 미래 역사의 자식들은 탄생했다. 『한씨 연대기』에서 딸 혜자는 분단된 남과 북의 비인간적 체제에 시달리다 죽은 아버지의 매장을 보지 않으려 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한 시대의 비극으로 수렴하고, 죽은 아버지의 유품에서 수첩을 챙겨 들고 새벽에 상가를 뛰쳐나와 제 몫의 다른 삶을 향해 떠난다. 불의에 찬 역사의 희생자에게 딸을 설정해 남긴 것부터가 끝내 일어서는 주제 의식이다.

 이야기는 주로 한영덕을 중심으로 엮어지고 있지만, 강력한 의지의 소유자인 한영숙이 한영덕을 구출하기 위해 쏟는 끈질긴 노력은 절대 좌절하지 않는 인간 의지의 상징이 되고 있다. 그와 납북된 경관의 미망인 사이에서 태어난 한혜자는 이 소설의 끝부분에 잠깐 나올 뿐이지만, 역사에 대한 작가의 깊은 신뢰를 말해 주기에 매우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