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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문열 장편소설 『불멸(不滅)』

by 언덕에서 2022. 8. 26.

 

이문열 장편소설 『불멸(不滅)』

 

 

이문열(李文烈. 1948 ~ )의 장편소설로 2010년 [민음사]에서 간행되었다. 을사늑약이란 시대적 격변기 속에서 불꽃처럼 타오른 청년 안중근의 서른두 해 짧은 생애를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추상적인 '영웅 안중근'이 아닌, '너무나 인간적인 영웅'으로서 안중근의 삶을 들추어 내려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작중 주인공 안중근은 시대와 외세의 흐름을 읽는 데 실패하기도 하고, 포부를 안고 시작한 사업에서 좌절을 겪는 청년이다. 그뿐만 아니라 의병을 이끌고 나선 싸움터에서 여지없이 패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는 모든 약함을 딛고 넘어서서 단 한 번의 위대한 행동을 역사에 아로새길 수 있었다.

 “나는 조국에 대한 내 의무를 다하였다. 이미 각오하고 한 일이므로 내가 죽은 뒤의 일은 더는 아무것도 남길 말이 없다.”

 안중근이 남기고 간 이 말은 이 땅의 모든 청춘에게 들려주는, 죽음을 눈앞에 둔 진정한 영웅의 결연한 외침이다. 이 작품의 안중근은 인간 안중근보다는 실패를 딛고 일어선 영웅 안중근에 가깝게 그려졌다. 흔한 로맨스 하나 찾을 수 없었던 안중근의 삶을 엿본 작가는 “인간적인 사생활, 일탈 같은 건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라면서 “인간적인 부분을 많이 끌어내 영웅을 만들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그래서 추상적으로 끌어낸 것이 불멸”이었다고 토로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안중근 일가는 의인들의 은신처였던 황해도 천봉산 기슭 청계동으로 이주, 자리를 잡는다. 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청계동을 요새로 삼아 지방 호족으로서의 세력을 키워나간다. 청일전쟁의 씨앗이 된 동학도들을 토벌하기 위해 안태훈은 의병을 일으키는데 이 싸움에서 안중근은 선봉에 서서 홍의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싸움을 승리로 이끈다. 그러나 싸움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일본군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순박한 백성으로서의 동학교도들을 목격하고 안중근은 충격에 휩싸인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 진사는 명성황후시해사건, 아관파천, 단발령 등 풍전등화의 어지러운 시대와 맞서려는 방편으로 천주학을 끌어들인다. 안중근도 아버지와 빌렘 신부의 도움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심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천주교 역시 외세의 하나일 뿐 진정 의지할 곳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탐관오리의 폭압과 착취에 맞서기 위한 사병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오늘날 로또 복권 같은 채표회사를 운영하게 된다.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국력이 다해서 마침내 이토 히로부미의 압력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된다.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안중근은 아버지를 여의고 삼화항(평남 남포)으로 근거지를 옮긴다. 그곳에서 안중근은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운영하며 인재 양성을 위한 대학 설립의 꿈을 되살리는 한편 석탄회사를 운영하고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국권 회복을 위해 여러모로 노력한다.

 그러나 국권 회복의 꿈은 멀어져만 가고 중근이 힘을 잃어 가는 와중에 안창호, 유인석을 만나게 되고 다시 국권 회복을 위한 결심을 새로이 하나, 나라는 망국의 길로 접어들어 군대가 해산되는 지경에 이른다. 안중근은 국외로 나가 국운을 회복시킬 방법을 모색하고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난다. 거기서 최재형, 유인석을 만나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본 군인들을 풀어주어 의병들의 빈축을 사고 일본군의 역습을 당해 산속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다. 패장으로서 연추(러시아 연해주에 있었던 한인 마을)로 돌아온 안중근은 분열되어 있던 의병 세력 사이를 오가며 단결을 역설하는 한편, 11명의 동지를 모아 손가락을 끊어 충성을 다짐하는 동의단지회를 결성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노력에도 나라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무너져 간다.

 대동공보(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교포단체인 한국국민회의 기관지로 1908년에 창간한 신문. 교민단체신문) 이강의 화급한 부름을 받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안중근은 고락을 함께해 온 든든한 동지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으로 오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할 계획을 한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전에서 삼천리 강토를 병탄한 왜적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된 안중근은 일본 측에 넘겨져 뤼순의 감옥에 갇혔다가 이듬해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하고 감옥에서 평소 꿈꾸어 오던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다가 3월 26일, 침착하고 떳떳하게 의사로서 최후를 맞이한다.

 

 

 안중근의 민족주의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그가 현실에서 경험한 나라는 부정부패가 판치는 권력자들의 국가였고, 안중근의 나라는 현실의 나라가 아니라 이상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는 지방 토호의 아들로서 백성 위에 군림하기보다 백성을 어떻게 보살필까를 고민했다. 소설 『불멸』은 안중근의 가톨릭 귀의조차 호민의 한 방편으로 종교의 힘을 빌리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렸다. 종교에 귀의하면서 정신적으로 고양되었고, 그것이 너와 내가 함께 잘사는 나라를 꿈꾸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았다.

 안중근은 적의 수뇌를 척살했을 뿐, 무고한 민간인의 목숨을 해치지 않았다. 의병 활동을 할 때도 포로로 잡힌 일본군을 죽이지 않고 풀어주었으며 이토를 저격한 후에는 만국공법에 따라 정당한 포로 대접을 해 줄 것을 일본 측에 요구했다. 이것은 그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일본과의 전쟁에 나선 의병장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일본의 대동아공영이 조공 질서에 따르는 제국주의적 평화라면, 안중근이 주창한 동양 평화론은 다자적이고 수평적인 국제 질서다. 안중근은 한·중·일 3국 젊은이들로 공동의 군대를 조직하고, 각국 젊은이들이 서로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이미 100년 전에 오늘날의 유럽연합과 같은 다자간 협력 질서를 꿈꾸었다.

 

 

 이 작품에는 '단지 동맹' 장면을 담고 있다. 안중근의 열여섯 살 청년 시절부터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안중근은 의병 동료 열한 명을 모아놓고 말한다.

 "오늘 내가 여러 동지를 모신 것은 시급히 서둘러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오. 우리는 그동안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으나 소리만 요란할 뿐 앞뒤로 아무 일도 이룬 바 없으니 남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오. 하지만 이제 우리가 다시 무엇을 꾀하고자 해도 특별한 단체가 없으면 그 목적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외다. 이에 오늘 동지들에게 먼저 그 단체부터 만들 것을 제안하오. 우리 모두 손가락을 끊어 하늘에 맹세하고 그 뜻을 적은 다음, 한마음으로 단체를 만들어 이 한목숨 나라에 바칠 각오로 기어이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애써 보는 게 어떻소?"

 이 각오의 상징이 단지(斷指)다. 일본 제국주의가 대동아공영이란 이름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안중근이 추구했던 동양평화의 높은 뜻이 훼손된 측면이 있다. 작가는 이 부분을 부각하여 안중근의 사상을 올바로 보여 준다.

 안중근은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라는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가치를 모순 없이 함께 구현하길 원했다. ‘동양평화론’을 주장한 안중근은 오늘날의 동아시아 공동체론 선구자였다. 이처럼 안중근은 21세기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다양한 자산을 갖고 있다. 지금부터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새로운 한국적 가치의 원형으로서의 안중근. 그의 삶과 꿈이 소설 『불멸』 속에 재현되어 있다.

 

 

 


 

☞ 안중근의 동양평화사상 :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英雄’ 으로 칭송받는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집필한 미완성 유고(遺稿) '동양평화론'은 안 의사가 국권회복운동을 하면서 세운 지표로 독립운동의 기초적 배경이 된 사상체계다.

 동양평화론’은 서문(序文) 전감(前鑑) 현상(現狀) 복선(伏線) 문답(問答)으로 나눠져 있으며 그 가운데 안 의사는 서문과 전감 일부만을 집필했을 뿐 나머지는 일제가 서둘러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미처 완성 하지 못하고 순국하셨다.

 안 의사는 서문에서 ‘合成散敗 萬古定理’ 즉 '합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한다'는 것은 만고의 정한 이치임을 설명하고 약육강식과 적자생존 논리 속에서 서구열강이 약소국을 제물화 하는 시대적 상황과 같은 인종끼리 전쟁이란 폭력을 통해 패권을 장악 하려는 일본의 침략정책을 통렬히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감은 다섯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첫째, 청일전쟁의 성격을 규명하고 둘째는 제정 러시아의 극동정책과 일본의 과실(過失)문제를 다루고 셋째는 러·일전쟁의 원인과 당시 서구열강의 태도와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넷째는 러일 강화조약을 미국 영토인 포츠머스에서 체결한 이유를 지적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제의 대륙침략에 대한 경종의 순 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상의 서문과 전감에 대한 요약설명만으로는 ‘동양평화론’전체내용을 이해 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안 의사가 1910년 2월 17일 관동도독부 히라이시(平石) 고등법원장과의 면담기록인 ‘聽取書’ 내용 중에는 안 의사가 쓰고자 했던 ’동양평화론’부분에 대한 기록이 일부 남아 있다.

 

<동양평화론>

1. 동양의 중심지인 뤼순(旅順)을 영세중립지대로 정하고 상설위원회를 만들어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2. 한 중 일 3개국이 일정한 재정을 출자하여 공동은행을 설립하고 공동화폐를 발행하여 어려운 나라를 서로 돕고,

3. 동북아 공동 안보체제 구축과 국제 평화군을 창설할 것과,

4. 로마 교황청도 이곳에 대표를 파견하여 국제적 승인과 영향력을 갖게 하자는 것 등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0전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행복을 추구하고자 했던 안 의사의 ‘동양평화사상’은 유럽지역의 EU와 환태평양국가의 APEC, 그리고 오늘날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동아시아 공동체론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아직까지도 주변 강대국들의 군비증강과 북핵 문제로 안보불안이 조성되고 우리 민족의 숙원인 남북통일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당시 안 의사의 평화사상은 후세를 삼고 있는 우리 모두의 값진 교훈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