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현대소설

심훈 장편소설 『상록수』

by 언덕에서 2022. 9. 22.

 

심훈 장편소설 『상록수』

 

 

심훈(沈熏, 1900~1936)의 장편소설로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기념 현상모집 당선작이다. 1935년 [동아일보]에 연재됨으로써 활자화된 이 작품은 농촌 계몽 운동을 주제로 한 내용인데, 이광수의 <흙>과 함께 브나로드 운동의 내용을 담은 대표적인 작품이다. 심훈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작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만든 작품이다.

 심훈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 마을로 잠적할 때인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된 이 작품은 일제하 민족과 사회에 대한 애국적 정열과 이상을 그리고 있다. 심훈은 당선 현상금으로 충남 당진에 [상록학원]을 설립하여 농촌 계몽운동을 실천한다.

 이 작품은 [동아일보]에 1935. 9. 10∼1936. 2. 15까지 연재되었다. 1981년 일본어로 번역, 출판되어 좋은 반응을 얻은 바 있다. 상록수의 내용은 심훈의 큰조카 ‘심재영’이 그의 고향 당진군 부곡리에서 농촌 운동의 실제 조직인 「공동 경우회」 활동과 당시 수원군 반월면 천곡리에서 농촌 계몽을 하다 숨진 ‘최용신’의 삶을 형상화했다. 따라서, 상록수는 1930년대의 농촌 현실 속으로 뛰어들어 농민 계몽과 문맹 퇴치를 위한 교육 보급 등, 계몽 운동을 실천적으로 실행하는 주인공들의 활동을 통하여 민족의 비극적 현실을 적극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 준다. 농촌 계몽을 하는 전형적 인물인 박동혁과 채영신의 성격이 평면적으로 부각되어 있고, 다소 대중적ㆍ낭만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흠을 지적할 수 있으나, 주제의 사상성이 밀도 있게 표출된 작품이다.

 

 

영화 <상록수>, 1961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ㅇㅇ일보사에서 주최한 학생 계몽 운동에 참가했던 학생들이 모인 자리. “절망과 탄식 속에 살아가는 우리 민중에게 힘을 주어야 한다. 그것이 계몽대원의 사명이다.”라고 외치는 박동혁은 그 자리에서 자신과 같은 뜻을 가진 여학생 채영신을 만난다. 영신은 의지가 강하고 농민 속에서 살아가려는 여성이다. 자연스럽게 만나며 이 두 사람은 농촌에 뛰어들어 농민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동혁은 한곡리에서, 영신은 청석골에서 글을 모르는 아이들과 부녀자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마을 회관을 짓기 위해 땀흘리며 일한다. 이런 가운데 둘의 사랑은 깊어 간다.

 동혁은 말한다. “이제 3개년 계획만 더 세우고 노력하면 피차에 일터가 단단히 잡히겠지요. 후진들한테 일을 맡겨도 안심이 될 만큼 기초가 든든히 선 뒤에 우리는 결혼을 하십시다. 그리고는 될 수 있는 대로 좀더 공부를 하면서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하십시다.”

 주재소의 방해 공작은 영신을 한없이 괴롭혔다. 사치를 일삼으면서도 몇 푼의 기부금에 달달 떠는 부자들 사이에서 수모를 겪고, 주재소 신세까지 져 가며 영신은 혼신을 다해 청석골 회관 짓는 일에 매달린 끝에 회관을 다 지어 건립식을 앞두고는 맹장염으로 쓰러져 수술을 받는다. 영신을 간호하다가 한곡리로 돌아간 동혁도 시련을 겪는다. 동혁이 없는 동안, ‘기천’이란 인물이 한곡리 청년회 회장이 된 것이다. 빚 때문에 쩔쩔매는 사람들을 매수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기천은 마을 진흥회장도 겸했다. 동혁은 마을에 닥친 시련을 지혜롭게 이겨 가지만 동생 ‘동화’가 홧김에 회관에 불을 지르려다가 붙잡혀 옥살이까지 하게 된다.

 한편, 약해진 몸을 쉬고 공부를 해보려고 유학을 간 영신은 청석골에 대한 그리움과 동혁에 대한 걱정으로 몸이 더 상해 버렸다. 끝내 청석골로 돌아온 영신은 피로에 지쳐 감옥에서 나온 동혁을 만나지도 못하고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만다.

 동혁은 영신을 장사지내고 산을 내려오면서 전나무, 소나무 등의 상록수를 바라보면서 영신이 혼신의 힘을 쏟았던 농촌을 위해 끝까지 몸바치리라 다짐한다.

 

 

최용신(1909~1935), 상록수 작중 '채영신'의 모델로 농촌 계몽가이다.

 

 1932년 브나로드 운동의 시범작으로 쓰여진 이광수의 <흙>은 농촌의 현실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 한 지식인이 센티멘탈리즘에서 농촌으로 뛰어들어간 결과밖에 가져오지 못했다. 그 초점은 현저히 인과 윤리에 기초한 정삼각형 연애소설일 뿐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농촌 계몽 운동의 허실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상록수는 <흙>에 비하여 현저히 농촌 계몽 운동에 접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상록수」는 세 가지 점을 염두에 두고 <흙>과 비교되어야 한다. 그 하나는, <흙>이 브나로드 운동의 시범작으로 앞서 있었다는 것, 둘째는 작가가 카프(KAPF) 맹원이었고, 이미 <직녀성>으로 쟁쟁한 작가였다는 점, 셋째로는 이 작품의 모델이 투철하게 후광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심훈은 1924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가 1926년 ‘철필구락부사건(鐵筆俱樂部事件)’ 관련으로 그만두고, 영화소설 <탈춤>을 발표하고, 영화 <먼동이 틀 때>를 감독하여 개봉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32년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33년 장편 <영원의 미소>, 1934년 장편 <직녀성(織女星)>을 발표했으며, 1935년 상록수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었다. 1936년 손기정이 베르린 올림픽 마라톤에 우승하자 신문 호외 뒷면에, <오오, 조선의 남아여 !>란 즉흥시를 썼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글이 되었다. 상록수 출판 교정 중 쓰러져 서울대학 병원에 입원했으나 장티브스로 사망했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흙>에 등장하는 ‘허숭’과 마찬가지로 상록수의 주인공 ‘동혁’, ‘영신’의 농촌으로 돌아가자는 외침, 즉 농민에게 희망을 준다든가 민족 운동의 출발을 농촌 계몽에 둔다는 것은 농토를 빼앗긴 농민에 대한 성급한 감상적 동정과 분리될 수 없었다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 그것은 19세기 제정 러시아의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전개된 본래의 브나로드 운동과 연장선상에 놓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지식인 학생층이라는 위에서부터 계몽하는 방법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이 위에서부터의 농촌 계몽은 그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거쳐야 될 필연적 단계임에 틀림없으나, 이것은 조만간 중단될 운명에 놓이는 것이며, 바로 이 점이 그 한계이다.

 장편소설 『상록수』는 주인공의 죽음 이후에도 희망찬 상록의 세계를 암시하지만, 정작 실제 모델인 최용신 여사 타계 뒤에, “형의 희생된 자리에 그 동생이 수업하고 섰는 자태는 눈물겨움이 없이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이 학원도 인가 문제로 인하여 한 달 후에는 폐쇄하게 되리라 하니 한심뿐이라.”는 김교신☜의 기록이 일제하의 농촌 계몽의 한계를 보여 주며, 아울러 『상록수』의 한계도 보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상록수』는 '농촌 소설'이라 할 수 있을지라도 ‘농민 소설’은 될 수 없을 듯하다.

 

 

 

 


☞ 브나로드 운동 : 

 [동아일보]사는 1931∼1934년까지 4회에 걸쳐 전국적인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다. 제3회까지 이 운동은 '브나로드(v narod)'라고 불렸으나 제4회부터는 계몽운동으로 바뀌었다. 본래 브나로드는 '민중 속으로'라는 뜻의 러시아말로 러시아 말기에 지식인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면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구호이다. 이 구호를 앞세우고 1874년에 수많은 러시아 학생들이 농촌으로 가서 계몽운동을 벌였는데, 그뒤부터 이 말이 계몽운동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 국내의 계몽운동은 1920년대 초 서울의 학생과 문화단체, 도쿄의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1926년 천도교 [조선농민사]에서 펼친 귀농운동과 1930년대 수원고등농림학교 한국학생들의 문맹퇴치운동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농촌계몽운동과 함께 한글보급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1928년 [동아일보]사가 창간 8주년 행사의 하나로 문맹퇴치운동을 펼치려다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좌절되었고 이듬해에는 [조선일보]사가 귀향남녀학생문자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동아일보사]가 전개한 브나로드 운동은 고등보통학교 4, 5학년 학생으로 이루어진 학생계몽대와 전문학교 이상의 학생으로 조직된 학생강연대, 학생기자대를 주축으로 하여 행해졌다. 이들은 야학을 열고 음악과 연극, 위생생활을 가르치면서 계몽운동과 문화운동을 병행해나갔다. 이들과는 별도로 1931년에 새로 조직된 [조선어학회]의 후원으로 전국 주요도시에서 조선어강습회를 열기도 하였다. 이러한 민중계몽운동은 언론계와 문화단체, 청년학생들이 힘을 모아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고 독립의 기초를 다지기 위하여 전개하였던 거국적인 민족자강운동으로 평가된다. 

 

 

 

최용신(1909~1935) :

 

 원산(元山) 출생. 루씨고등여학교(樓氏高女)를 나와 서울여자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1년, YWCA  농촌사업부에서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샘골(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 파견되어 농촌교육을 시작하였다. 마을 주민의 협조를 얻어 스스로 교사(校舍)를 신축, 매일 10리 길을 걸어다니며 어린이를 가르쳤다. 1934년 일본 고베신학교[神戶神學校]에 유학하였다가 신병으로 귀국, 샘골에서 요양하면서도 농촌계몽운동을 계속하던 중, 장중적증(腸重積症)으로 죽었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는 1964년 용신봉사상(容信奉仕賞)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해 오고 있다.

 2004년 최용신의 제자인 홍석필이 최용신 기념관 건립을 위해 건물과 땅을 팔아 약 1억 5천원을 기탁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2007년 11월 안산시 상록구 샘골강습소가 있던 그 자리에 최용신 기념관이 개관했다. 또 안산시 광덕로와 만나는 사리사거리에서 기념관 근처를 거쳐 북고개 삼거리까지의 도로가 최용신의 업적을 기념하여 용신로라고 명명되었다.

 

 

 

☞ 김교신(金敎臣.1901∼1945) :

 

 무교회주의를 제창한 종교인·교육자. 함경남도 함흥 출생. 1918년 함흥농업고보를 졸업하고, 도일하여 일본 동경 세이소쿠영어학교(東京正則英語學校) 수학, 1920년 노방(路傍) 설교를 듣고 입신(入信)을 결심하고 성결교회에서 세레를 받았다.

   일본의 종교사상가 우치무라 칸조오(內村鑑三)의 문하에 들어가 7년간 수학 후에 동경고등사범 지리박물학과를 1927년 졸업했다. 이어 함흥 영생고보 교사, 양정고보 교사로 재직하면서 함석헌 등과 함께 1927년 [성서조선]을 창간했고, 1930년 그 주필이 되었다.

   1933년 <산상수훈 연구>를 발간했고, 이어 1940년 함석헌과 공저로 일문으로 <우치무라 칸조오와 조선>을 간행했다. 경기중학 교사가 되었으나, 불온분자라 하여 6개월만에 쫓겨났으며, [성서조선] 158호 권두언으로 항일민족사상을 풍유적으로 표현한 <조와(弔蛙)>가 검열에 걸려 함석헌ㆍ유달영 등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성서조선사건’이 일어나 1년의 옥고를 치렀다. 해방 직전인 1945년 4월에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201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 1861~1930)  : 

 일본 개신교 사상가로  서구적인 기독교가 아닌 일본의 기독교를 찾고자 한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대학생 시절 그는 친구들과 기도 모임을 구성하여 신앙생활했는데, 모임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없는 민주적인 공동체였다. 이러한 새로운 신앙경험은 우치무라의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그가 무교회주의를 주장한 이유도 기독교 신앙의 근거는 교회가 아닌 성서 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치무라 칸조는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근거는 성서뿐, 교회와 그 관습은 기독교를 담아내는 껍데기라고 하였다. 구안록에서는 죄인인 사람은 스스로 평안을 구할 수 없으나,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셨기 때문에 평안을 얻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