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자키 준이치로 장편소설 『세설(細雪)』
일본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 1886∼1965)의 장편소설로 1943년 1부 발표 이후 태평양전쟁 하의 검열 강화로 발표를 금지당하였다가 전쟁 중에도 계속 집필하여 1948년에 완성하였다. 그는 이 작품으로 [아사히(朝日)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작자의 부인 마쓰코(松子)의 자매를 모델로 하여 오사카ㆍ고오베 간 철도 연변의 별장촌에 사는 몰락한 상가(商家)의 네 딸의 생활상을 묘사한 작품이다. 내향적이지만, 강인한 성격을 지닌 셋째딸 유키코(雪子)와 근대적이고도 행동적이지만, 그만큼 위태위태한 데가 있는 넷째딸 다에코(妙子)를 대비시켜 유키코의 혼담이나 다에코가 일으키는 말썽을 처리하고, 둘째 딸 마쓰코 부부의 생활을 묘사하여 유키코의 결혼에서 결말을 맺고 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첫 부인 이시카와 지요코가 자신의 친구이자 시인인 사토 하루오와 사랑에 빠지자 두 사람을 결혼시키겠다는 인사장을 보냈던 일본 근대의 대표적인 작가다. 그는 1923년 간사이 지방으로 이사한 뒤 현지 문화에 매료돼 1938년 세 번째 부인 마쓰코의 집안을 모델로 이 소설을 썼다. 다니자키의 대표적 장편소설 『세설』은 자신의 아내 마쓰코와 그 자매가 모델이 된 이야기다. 간사이 지방 '가미가타(上方)문화'의 화려한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치코로 그려져 있는 인물은 실상 마쓰코로 알려져 있다.
마쓰코는 오사카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다니자키와 마쓰코는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다니자키가 마쓰코를 처음 만난 지 얼마 안 돼 쓴 편지에는 “당신이란 분의 꿈을 날이 새도록 꿨습니다.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후 4년이 지나 다니자키가 마쓰코에게 보낸 편지에는 “저는 숭배하는 고귀한 여성이 없으면 창작할 수 없습니다만, 드디어 오늘에야 그러한 분을 만나게 됐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그는 여체에 대한 탐닉, 사도-마조히즘과 결합된 에로티시즘 등을 특징으로 하는 작품들을 선보이며 독자적인 문학세계를 구축했는데 이는 그가 특정 여성 일반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소설 속에는 계절마다 즐기는 꽃놀이와 반딧불이 잡이, 가부키 공연, 토속 음식 등 1930년대 간사이 문화가 녹아 있다. 제목 세설(細雪)은 ‘가랑눈’이라는 뜻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마키오카 가(家)는 다이쇼 시대(1912∼1926)까지 명문가로 인정받았으나 지금은 가세가 기울었다. 집안에는 네 딸이 있다. 맏이답게 어른스러운 쓰루코, 동생들을 섬세하게 챙기는 사치코, 내성적이고 말이 없지만 고집스러운 유키코, 자유분방하고 매사에 당돌한 다에코 등 네 딸의 성격은 제각각이다.
이 집의 현안은 셋째 유키코의 혼사다. 쓰루코와 사치코는 결혼해 아이도 낳았지만 셋째와 막내 다에코는 혼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다에코는 인형 제작과 양재로 자립한 데다 10대 시절 함께 가출했던 오쿠바타케 가의 아들과 혼담도 오가는 상태다. 하지만 유키코는 다르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맞선을 볼 때 “침울해 보인다”라는 평을 듣는 데다 나이도 서른이 넘었다. 결국, 자존심을 굽혀 재취 자리나 나이가 많은 남자라도 너무 늙어 보이지만 않는다면 괜찮다는 데까지 물러선 상태다.
마키오카 집안이 내세우는 결혼 조건은 까다롭다. 서로 격이 맞아야 하고 사윗감은 건실한 직업과 장래성을 갖춰야 한다. 외모가 지나치게 늙어 보여도 곤란하고 재혼이라면 아이들 성격이 유순한지도 관건 중 하나다. 여러 번 편지를 주고받고 상대방의 배경을 조사하기 위해 흥신소에 일을 맡기는 일도 다반사다. 맞춤 남자를 만나더라도 상대 집안의 정신병력이 드러나는 등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
하지만 이 같은 관습에 개의치 않고 자유분방한 넷째 다에코는 마음껏 연애를 즐긴다. 별 볼 일 없는 사진사 이타쿠라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그가 병으로 죽자 오쿠바타케 가의 아들과 연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바텐더를 유혹해 임신한다.
동생과 달리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유키코는 결혼을 모두 언니 사치코와 형부 다이노스케에게 맡기고 물러서 있다. 유키코는 결정적인 순간에 남자가 지적인 멋이 없다거나 재혼한 부인의 위패를 집에 모시고 있다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퇴짜를 놓는다. 마침내 유키코의 혼담이 성사돼 혼례 의상이 도착한 날, 그토록 동생의 결혼을 기다리던 사치코는 자신이 결혼 직전 지었던 ‘오늘도 옷을 고르느라 날이 저무누나/시집가는 몸의 공연한 서글픔이여’라는 시를 떠올린다.
이 작품은 2차 대전 당시 몰락한 오사카 상류 계층의 네 자매의 이야기로, 특히 셋째인 유키코의 혼담을 중심으로 당시 풍속을 잔잔하게 그려냈다. 다니자키는 이 작품으로 일본의 국민 작가 반열에 올랐다.
『세설』은 결혼 이야기를 중심으로 자매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오만과 편견’이 베넷 가의 둘째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사랑의 결실을 보는 과정을 그렸다면 ‘세설’은 결혼보다 결혼을 둘러싼 풍속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 또한, 다니자키는 “나는 여자를 나보다 높은 존재로 우러러본다. 우러러볼 만한 존재가 아니면 여자로 보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이런 그의 여성관을 잘 보여 주는 것이 이 작품 『세설』이기도 하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로 국내에 알려진 소설가 다나베 세이코(田辺聖子, 1928~2019)는 이 소설에 대한 해설에서 유키코는 언뜻 과거의 수동적 여성상을 떠올리게 하지만 조용하면서도 할 말을 다 하는 간사이 여성의 전형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일본의 전통적인 풍류 행사라든가, 오사카 서민층 동네의 낡은 상가에 남은 세련된 구 문화의 아름다움, 전쟁과 홍수가 엄습해 오는 세태의 소란과 노끈 꼬듯이 엮어 놓았다. 현대에서 소재를 잡았다고는 하나, 이제는 매우 특수한 풍속이 많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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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당시 다니자키는 비행기 공습 때마다 『세설』 원고를 안고 도망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종전 다음 해 드디어 소설을 간행했다. 만년에 다니자키는 마쓰코와 함께 사는 시간이 늘어났는데 오른손이 불편해지면서, 구술 집필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다니자키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소설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마쓰코가 지켜보는 가운데 79년의 생을 마쳤다.
『세설』은 다니자키의 세 번째 부인이자 그가 희구하던 여성인 마쓰코와 그 자매들을 모델로 한 이야기다. 간사이 문화에 대한 애정이 짙게 배어 있는 가운데 몰락한 오사카 상류 계층의 네 자매 이야기, 특히 셋째인 유키코의 혼담을 중심으로 당시의 풍속을 잔잔하게 전하는 풍속 소설이다.
소설 속의 시간은 계절의 변화와 함께 실제 생활처럼 천천히 지나간다. 봄의 벚꽃 구경, 여름밤의 반딧불이잡이, 가을의 단풍 구경, 후지산, 가부키, 피아노, 인형, 프랑스어 교습, 무용 교습, 무용 공연, 각기병, 장티푸스, 주사, 약, 만주, 홍수, 기모노, 사진기, 전화, 도쿄 말과 간사이(오사카) 사투리, 미용실, 파마, 호텔, 병원, 학교, 셋집, 독일인, 백계 러시아인, 갖가지 일본 음식들, 피아노, 커피, 제과점, 백화점, 신혼여행, 해수욕, 온천, 기차, 연애, 맞선, 여객선 등이 계절의 변화와 함께 쓰루코, 사치코, 유키코, 다에코의 주위를 파노라마처럼 서술된다.
장편소설 『세설』은 <겐지 이야기(源氏物語)>의 현대역(現代譯)을 완성하고, <음예예찬(陰翳禮讚)>을 쓴 작자가, 그 주장을 구체화하여 보인 작품으로, 다니자키 문학의 하나의 도달점을 표시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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