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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현대소설

고골리 장편소설 『광인일기(Zapiski sumasshedshego)』

by 언덕에서 2021. 2. 10.

 

고골리 장편소설 『광인일기(Zapiski sumasshedshego)』

 

 

우크라이나 출신 러시아 소설가 고골리(Gogoli, Nikolai Vasil'evich,1809~1852)의 단편소설로 1835년 문집 <Arabeski>에 발표된 일기체 소설이다. '주인공의 수기'라는 형식을 통하여 관료사회를 통렬하게 풍자하고, 광기와 착란의 세계에서밖에 살 수 없는 하급 관리의 비참한 모습을 들추어낸 걸작이다.

 <타라스 불바>를 발표 후 세상에 적응할 수도, 도피할 수도 없으므로 속됨과 악을 들추어내려고 더욱 애쓰게 된 고골리라는 낭만주의자의 공격적인 사실주의는 문집 <아라베스키>에 수록된 <뻬쩨르부르크 이야기> 전체에 걸쳐 두드러진다. <뻬쩨르부르크 이야기>는 제정 러시아의 수도 뻬쩨르부르그를 배경으로 쓴 고골의 단편을 모은 것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코'와 '외투'를 비롯하여 「광인 일기」, <초상화>, <네프스끼 거리> 등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을 수록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모두 환상과 현실이 어우러지는 독특한 방식으로, 부조리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소외된 현실을 강렬하게 조형해 내고 있다. 또한 그 독특하면서도 지극히 현대적인 상상력과 신랄한 현실 풍자 의식으로써, 고골을 러시아 근대 문학의 근원지에 자리하게 한 대표작들이다. 여기에 실린 「광인일기」에서는 철저하게 좌절한 나머지 과대망상 속에서 좌절을 보상받으려 애쓰다가 마침내 정신병원에 보내지는 한 관리를 주인공으로 제시하고 있다.

 작품 속 하급 관리인 주인공은 자신의 상관인 국장의 딸을 짝사랑한다. 그 아가씨와 시종 무관 사이의 혼담이 성사되자 그는 가혹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여 결국 광기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는 자신이 9등 문관이란 미관말직이 아니고 에스파냐의 국왕이라고 공상함으로써 현실의 굴욕감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포프리시친>, 1882, 캔버스에 유채, 98x69cm.러시아의 리얼리즘의 대가 일리야 레핀(Ilya Repin, 1844~1930)이 그렸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배경은 19C 초반의 러시아. 42살의 포프리시친은 하급 관리로 자신이 근무하는 부서 국장의 딸을 흠모하고 있다. 직장에 출근하면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포프리시친의 모습은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사회로부터 소외된 양면적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상관인 과장을 조롱하는 포프리시친은 신분의 위계질서를 초월해서 세상을 보며 관등 물신주의에서 벗어나 있는 듯하다. 포프리시친은 과장의 권위에는 도전적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아버지인 국장의 권위는 적극적으로 수긍한다. 포프리시친은 비 오는 날에 우연히 국장의 마차에서 내리는 국장의 딸, 소피를 보게된 후 극심한 짝사랑에 빠진다.

 어느 날 포프리시친은 소피의 강아지인 메찌가 다른 부인의 개 피젤과 이야기 나누는 내용을 듣게 된다. 이후 그는 국장 딸의 생각을 알아볼 요령으로 개집을 뒤져 개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훔쳐 온다. 그런데 편지를 읽고 국장의 딸이 고위 관료인 시종 무관과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게 된다. 하급관리인 자신과 국장의 딸 사이의 신분적 격차를 수용하지 못하는 욕망 때문에 포프리시친은 고뇌하며 괴로움에 시달리게 된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다가, 자신이 사실은 하급 관리가 아니라 스페인 왕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포프리시친은 국장이 서명해야 할 결재란에 '페르디난트 8세'라고 자신이 서명하는가 하면, 국장의 딸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복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며 자신과 부부가 될 거라고 이야기한다. 포프리시친은 자신이 왕으로서 스페인에 와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다.

 

1848년 고골리는 <죽은 혼>을 모스크바에서 완성했으나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정신적 고뇌와 사상적 동요로 인해 정신 착란에 빠져 원고를 불 속에 던지고 10일간의 단식으로 자살하였다.

 

 푸쉬킨 이후부터 러시아 문학에서는 하찮은 일을 하는 ‘작은 인간(Little Man)’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하급 관리가 여러 작품에서 등장하였다. 고골리의 작품에서는 동급의 하급관리들이 「광인일기」, <외투>, <코>에 등장하지만 그 모습은 모두 다르다.  

 '관등 물신주의'는 인위적이고 우연적인 사회적 관계의 부산물인 계층적 위계질서를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관등 물신주의에 동조할 때는 관등 사회에서 생겨나는 차이와 차별을 별 저항 없이 수긍할 수 있다. 고골리가 그린 인물들은 근대적 개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지는 않지만, 보다 높은 지위에 대한 성취 욕망을 가진 인물들로 관등 사회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다. 고골리는 신분적 위계 질서가 확고한 중세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분 상승이나 권력을 추구하는 출세주의적 인물들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하급 관리 포프리시친은 자신의 상관인 국장의 딸을 남몰래 사랑하였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점점 미쳐간다. 하급 관리인 포프리시친이 강아지들의 말을 듣는 것은 그가 미쳐가는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하급관리들의 삶이 강아지의 삶과 같다는 상징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후 그 아가씨와 시종 무관 사이의 혼담이 이루어지는 가혹한 현실에 직면하자 결국 극도로 미쳐간다.

 포프리시친은 말 그대로 허세와 환상에 찌든 사람이다.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사람이기도 하다. 고골리는 그 끝을 독자의 상상을 넘어 스페인 왕으로까지 올려놓는다. 이 작품은 고골리 특유의 풍자를 드러낸다. 개에게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줌으로써, 사람들도 언제든 개만도 못한 말을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개가 편지를 쓰게 함으로써 귀족들만이 가진 능력을 개도 할 수 있는 능력으로 떨어뜨린다.

 

 

 관등 물신주의는 국장의 지위에 오른 사람의 자질, 능력 등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국장이라는 지위 그 자체를 우상화한다. 포프리시친의 신분 상승과 소피를 향한 사랑은 의식 속으로 떠올라 생각 혹은 말로 구체화하지만, 그때마다 사회적 규율, 질서 등이 이를 금지시킨다. 관등 물신주의를 완전히 체득하지 않은 포프리시친은 자신이 바라던 모든 것들이 관등 질서에 따라 상위 계층의 관직자에게 돌아가자 분노한다. 포프리시친은 자신의 실체는 9급 관리가 아니어서 단지 현상적, 가상적으로 9급 관리로 보이는 것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관등 물신주의로부터 벗어난다(자기 합리화). 포프리시친이 9급 관리와 자신을 동일시 했던 과거를 스스로 정신병적 행동이라고 판단한 것은 관등 물신주의 그 자체가 광기임을 암시한다.

 주인공 포프리시친은 급기야 자신이 9등 문관이란 말단 하급 관리가 아니고 에스파냐의 국왕이라고 망상함으로써 현실의 굴욕감을 극복하려고 한다. 작가는 ‘주인공의 수기’라는 형식을 통하여 관료사회를 통렬하게 풍자함과 아울러, 광기와 착란의 세계에서밖에 살 수 없는 하급 관리의 비참한 모습을 날카롭게 들추어낸다. 이 하급 관리의 정체는 자기 주제를 모르는 19C 초반의 ‘러시아’라는 무능한 국가와 국민 모두를 은유하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세상을 바르게 살아야 할 정신은 주인공 스스로 지켜야 하지만 의지와는 관계없이 세속적 욕심, 허세와 허영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렇다면 도스토옙스키가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라고 이야기한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고골리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부조리함을 꿰뚫어 보았고, 실체와 내면보다는 허세와 허영에 찌든 인간 군상의 어리석음을 풍자와 해학을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 있다. 작품 속 특이한 인물들의 캐릭터와 초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사실적 묘사는 탁월하다.

 

 

☞ 관등 : 관리나 벼슬의 등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