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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현대소설

하인리히 뵐 장편소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Und sagte kein einziges Wort)』

by 언덕에서 2021. 3. 25.

 

하인리히 뵐 장편소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Und sagte kein einziges Wort)』

 

 

독일 소설가 하인리히 뵐(Heinrich Theodor Böll, 1917∼1985)의 장편소설로 1953년 발표되었다. 뵐은 쾰른에서 가구 제작자(목공)의 아들로 태어나 1937년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점 점원으로 일하다가 2차대전이 발발하자 1938년 노무자로 징용당한 뒤 독일군 사병과 하사로 6년 동안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전선에 참가했다. 그가 전장에서 겪었던 경험은 '병사가 되어 자기편이 패전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어야만 했던 무서운 운명'이라고 요약된다. 그 기억은 뵐의 작품 세계에서 중심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고향인 쾰른에 정착했다.

 뵐은 전후문학을 ‘폐허 문학’, ‘전쟁 문학’, ‘귀향 문학’으로 정의하면서 전쟁의 파괴적 폭력성, 전후 사회의 모순과 비극적 참상, 고통스러운 소시민의 일상 등 역사가 개인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을 주로 다루었다. 이 작품은 초기 성공작으로 뵐은 ‘47그룹’에서도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뵐은 작품의 제목을 예수의 수난을 다룬 흑인 영가(gospel)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He Never Said a mumblin' Word)」에서 빌렸다. 이 작품에서는 이전에 발표한 소설 <아담,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와는 달리 두 사람의 사랑이 외부의 저항을 이겨내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뵐은 이 작품으로 197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배경은 전후 1952년 서독에서의 어느 주말, 48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다. 주인공 보그너 프레드와 아내 캐테는 결혼 15년 차 부부다. 부부 슬하에는 3명의 아이가 있다. (2명은 죽었다) 캐테는 6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다. 프레드는 성당의 전화 교환수로 일하지만, 박봉이어서 부업으로 과외까지 병행한다. 그는 폭력을 본능적으로 혐오하지만 다섯 식구가 단칸방에 살면서 마음이 여유를 잃다 보니 사소한 일로 아이들에게 손찌검까지 한다. 그는 더 참지 못하고 집을 나와 두 달째 가족과 떨어져 지낸다.

 집주인 프랑케 부인은 열렬한 가톨릭 신자로 주변인들에게는 우아하고 교양있는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케 부인의 실제 모습을 아는 이는 프레드 가족뿐이다. 여러 개의 방을 가지고 있으면서 응접실조차 가난한 부부에게 내어주지 않는 야박한 인물이다. 프랑케 부인은 프레드 가족에게 작은 소음부터 물을 쓰는 것까지 눈치를 주며 괴롭힌다.

 가난하고 힘든 현실 속에서 임신을 직감한 캐테는 프레드와 헤어질 결심을 한다. 아이들과 남은 캐테의 일상은 더러움과의 투쟁으로 채워진다. 장롱을 조금만 움직여도 회칠한 벽에서는 석회 덩어리가 우수수 떨어져서 하루에도 몇 번씩 걸레질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구역질 나는 현실 속에서 캐테는 ‘신’이라는 단어만이 자신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무엇이라고 여기는 진정한 신자다.

 캐테는 프랑케 부인과 같은 사람들이 ‘하느님 장사’를 하는 건 아니냐고 생각한다. 부부라고는 하지만 한 집에 살지 않으므로 프레드와 캐테는 가끔 바깥에서 만나 밤을 보낸다. 값싼 호텔에라도 하룻밤 묵으려면 프레드는 여기저기 돈을 빌리러 다녀야 하는 형편이다. 이들에게 자신에게 희망이 있을까 묻곤 한다. 오랜만에 만난 주말에 아내는 헤어지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말을 꺼낸다. 가난은 그렇게 부부의 사랑까지 파괴하는 듯이 보인다. 부부는 이번 만남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캐테는 프레드를 여전히 사랑하지만 단칸방으로 돌아오려 하지 않는 남편과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신부의 심부름으로 은행으로 가는 중에 프레드는 우연히 캐테를 목격하고 뒤를 쫓다가 죽은 아이들의 무덤을 찾는 그녀의 모습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을 느끼고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 &nbsp;1949년 서독 베를린의 한 공사장 모습

 

 먼지와 얼룩담배 연기로 가득 찬 전후 풍경과 가난한 부부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간 이 작품 전체에서 작가의 가톨릭교회에 대한 절망감을 느낄 수 있다주인공 프레드는 상이군인인 아버지, 지적장애아 동생과 같이 살아가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이웃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다.

 지역의 성직자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프랑케 부인은 주택을 배정하는 문제에서 부부를 도와주기는커녕 방해를 한다. 사회에서 낙오한 프레드 보그너는 진실이 없는 불공평한 사회에서 권태와 좌절을 느끼며 그 사회에 동참하기를 거부함으로써 탈락자이자 국외자가 된다. 아이를 많이 갖지 말라는 사회적 권유를 묵살하고 네 번째 아이를 가진 캐테 역시 사회 부적응자라 할 수 있다.

 뵐은 원래 프레드 보그너의 귀향을 묘사하는 14장을 구상했지만 실제로 쓰지는 않았다. 가난은 사회의 책임이란 사실이 작품에서 분명히 제시되었는데 아내에 대한 사랑을 재발견하고 집에 돌아온다고 해서 반드시 사회적 환경이 좋아지리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보그너 부부는 서로 번갈아 가면서 일인칭 화자가 되어 이 곤궁한 시기의 고통과 절망을 내면 고백의 형식으로 서술하는데, 여기서 특히 전후 서독의 사회복지제도와 가톨릭교회의 문제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지만 뵐은 보그너 부부처럼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는 자들이나 소외된 자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전쟁으로 상실된 인간성의 회복 가능성 또한 제시한다. 이 작품에는 가톨릭 가정에서의 유년 시절, 6년간의 전쟁 참전 등 작가의 전기적 사실들이 많이 투영되어 있다.

 부부인 프레드와 케테는 그들의 지난 주말의 체험을 그들의 결혼 체험처럼 서술하고 있다. 교회관저의 전화 교환수인 보그너 프레드는 술꾼이었다. 그는 여러 잡일을 하는데도 끊임없이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린다. 6년간의 노력 끝에 집을 얻으려는 프레드의 시도가 가톨릭 사제와 여자 집주인 때문에 실패하자 가족이 사용하는 단칸방이 비좁다는 이유로 집을 나간다. 뵐은 침묵 속에서 소외된 자들의 얼굴을 담담히 조명한다. 상이군인 아버지와 지적 장애가 있는 동생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보살피는 소녀의 얼굴은 환한 빛을 발하는 천사와 겹쳐지며 절망한 부부에게 힘을 주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작품의 제목은 예수의 수난을 다룬 흑인 영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He Never Said a Mumbalin’ Word>에서 따온 구절이다. 가톨릭과 시민 계층의 폭력 속에 침묵하는 사람들은 이 작품을 필두로 뵐의 여러 작품에 지속해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