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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천명관 단편소설 『숟가락아, 구부러져라』

by 언덕에서 2021. 3. 23.

 

천명관 단편소설 『숟가락아, 구부러져라』

 

 

천명관(1964~)의 단편소설로 2007년 출간된 작가의 첫 단편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에 수록된 작품이다. 

 작가는 골프용품 가게의 점원, 보험회사 영업사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서른이 넘어 영화판에 뛰어들었다. 영화 <미스터 맘마>의 극장 입회인으로 시작해 영화사 직원을 거쳐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영화 <총잡이> <북경반점> 등의 시나리오는 영화화되기도 했으며, 영화화되지 못한 시나리오도 다수 있다. 연출의 꿈이 있어 시나리오를 들고 오랫동안 충무로의 낭인으로 떠돌았으나 사십이 될 때까지 영화 한 편 만들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준비하던 영화가 엎어진 마흔 즈음,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어 동생의 권유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3년 [문학동네 신인상] 소설 부문에 <프랭크와 나>가 당선되었으며, 2004년 제10회 문학동네 소설 상에 <고래>가 당선되었다. 작가는 현실과 인간관계에서 한 개인이 부딪히게 되는 곤경이나 사소한 소동과 갈등들 그리고 그와 연루된 곤혹이나 회환과 같은 심리적 양태들에 주목한 작품을 써왔다.

 단편소설 숟가락아, 구부러져라는 주인공이 어린 시절부터 평생을 연습해온 유리 겔러 식 숟가락 구부리기로 각광받았던 순간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주인공이 어찌어찌 회사에서 잘리고, 가족들에게서 퇴출당하고, 노숙자들의 무리에 섞여 있다보니 이들이야말로 이미 일상을 초월한 진짜 초능력자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눈짓 한번에 숟가락 구부리기, 조금만 정성들여 쳐다보면 식탁 옮기기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간절히 원하면 되긴 된다니까!'는 식의 깨달음도 얻는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소심한 남자 주인공은 어린 시절 어느 날, 초능력자 유리겔라가 염력만으로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을 TV에서 보고 따라 하다가 자신도 우연히 숟가락을 구부리게 된다. 이에 고무된 주인공은 학창 시절, 군대 시절, 직장 신입사원 장기자랑 때 그리고 노숙인들 앞에서 자신의 '기량'을 뽐내려다 번번이 실패한다. 혼자 있을 때는 분명히 숟가락을 구부렸는데 여러 사람 앞에서는 '기량'이 발휘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건은 주인공 일생을 거쳐 그를 패배자 또는 거짓말쟁이로 낙인찍는다. 여러 사람 앞에서 염력을 이용해 숟가락을 구부리는 일은 이제 그에겐 남은 인생의 자존감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이 뭐라고. 숟가락을 구부리지 못함을 그는 인생의 패배로 여긴다. 

 아무튼 주인공은 계속하여 그리고 줄기차게 숟가락을 구부리려고 노력한다. 이후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대충 맞는 사람과 결혼한다. 그러나 결혼 후 낳은 딸아이는 그의 아이가 아니라 여자의 전 남자 친구의 아이였고, 그걸 알고 그는 집을 나온다. 

 그 패배감으로 직장에서 잘리고 아내에게 외면받고, 급기야 그는 노숙인 신세까지 전락한다. 그러던 어느 날, 노숙인들이 모두 모인 점심 식당에서 그는 자원봉사를 하는 한 직원으로부터 결정적인 한마디를 듣게 된다.

  "그깟 숟가락 구부리는 것이 뭐라고, 저기 저분은 숟가락 구부리는 것을 넘어서 염력으로 식탁을 30cm나 옮길 수 있어요. 그깟 잡기에 매달리지 말고 그 시간에 열관리 자격증이나 하나 따서 빨리 취직이나 하세요."

 

 

 

 여기에 손 안 대고 숟가락 구부릴 줄 아는 사람이 이 양반뿐인 줄 아슈? 당신들은 여기 처음 들어와서 잘 모르나 본데 이 보호시설 안에만 해도 그런 사람이 열 명은 넘어요. 저쪽에서 밥 먹는 사람 보이죠? 숟가락은 저 사람도 구부릴 줄 알아요. 그런데 저 타령이라고요. 그따위 재주는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안 돼요. 그리고 저쪽에 앉아 있는 노인네 보이죠? 저 사람은 그냥 눈으로 쳐다보기만 해도 식탁이 저절로 움직여요. 지난번엔 아마 한 삼십 센티쯤 움직였을 것에요. 그런데 그런 기술이 무슨 소용이 있냐고요. 차라리 열관리 자격증 같은 거라도 한 장 있는 게 낫지" - 본문 271

 이 작품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를 꼬집고 있다. 염력은 아무에게나 있는 장기가 아니다. 그런데도 자원봉사자를 비롯한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은 취업에 도움이 되는 자격증에다 더 큰 가치를 둔다. 공인된 자격증은 아무나 약간의 노력만 하면 얻을 수 있으나 염력은 사회의 극소수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염력이 나름의 높은 가치를 지니지만 사회는 물질만능주의이기에 오히려 염력과 같은 희귀한 능력을 갖춘 사람을 소외시킨다. 이는 주인공이 노숙자가 되어 사회에서 외면받는 처지의 존재가 되는 데서 알 수 있다. 또한, 주인공이 염력을 줄기차게 보이지 못할 때마다 다수에 의해 폭행을 당하는 장면에서 우리 사회에서 줄기차게 이어지는 다수에 의해 당하는 소수의 소외와 폭력을 목격하게 되는 사례를 접하게 된다.

 

 

 

  내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어릴 적부터 특이한 젓가락질로 가족들로부터 구박을 받았다. 친척이 우리 집을 방문하여 밥상머리에서 내 젓가락질을 발견하면 예외 없이 “너는 젓가락질이 왜 그 모양이니?”라는 지적질이 시작되었다. 그러다 급기야 “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대로 따라 해 보아라!”로 진행되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곤 했는데 문제는 아무리 노력해도 고쳐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놀랄만한 일이 생겼다. 방학이 되어 시골 큰댁에 놀러 갔는데 나의 젓가락질을 유심히 지켜보던 백모님은 혀를 끌끌 차면서 “쟤는 젓가락질이 어찌 저리도 지 아버지와 같을꼬?” 나는 그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는데 내 아버님이야말로 완벽하게 젓가락질을 구사하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버님께 백모님의 그 말을 전했더니 갑자기 얼굴이 붉어진 아버님은 불같이 화를 내셨다.

  “그 여자, 그….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애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그날 일을 유추해 보건대, 아버님과 백모님은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으며, 아버님은 곡절 끝에 겨우 젓가락질을 고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삼십 대를 넘길 즈음에야 (완전한 성인이므로) 남들과 다른 젓가락질로 인한 이런저런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때 깨닫게 된 사실은 우리 사회가 다양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도 나는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나의 젓가락질에서 우리가 느꼈던 불편한 사회의 한 조각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나에게 젓가락질은 그저 먹기 위한 행동일 것이고, 어쩔 수 없이 내몸에 맞게 된 옷, 어쩌면 나만의 노하우, 나만의 개성이었는데 사회는 여전히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기준을 미덕인양 나를 모자란 아이로 취급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