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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문구 중편소설 『해벽(海壁)』

by 언덕에서 2021. 3. 30.

 

이문구 중편소설 『해벽(海壁)』

 

 

이문구(李文求. 1941~2003)의 중편 소설로 1972년에 발표되었다. 작가는 우리말 특유의 가락을 잘 살려낸 유장한 문장으로 자신이 경험한 농촌과 농민의 문제를 작품화함으로써, 소설의 주제와 문체까지도 농민의 어투에 근접한 사실적인 작품세계를 펼쳐 보여 농민소설의 새로운 장을 개척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의 애환과 그러한 상황을 초래한 시대적 모순을 충청도 특유의 토속어로 잘 포착해 형상화하고 있다.

 이 작품은 농촌과 어촌의 중간적 성격을 지닌 가난한 갯벌 염전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포곶' 마을과 어민들이 정치적 배경을 등에 업은 국토 개발 사업과 외세에 의해서 점차 파괴되고 전통적 생활을 잃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근대화의 돌풍으로 인한 운명적 현실 파탄을 통하여 우리의 전통적인 삶에 대한 애착을 비판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해벽」은 전통적인 어촌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점점 파괴되어 가는 사포곶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미군 부대가 들어서고, 농촌 근대화라는 명분 아래 간척 사업이 시작되면서 사포곶 마을에는 변화가 생긴다. 마을 주민들은 도덕의식이나 성 윤리가 타락하고 점점 물질적인 가치만을 좇는다.

 

* 해벽 (海壁) : 「명사」 해안을 보호하기 위하여 물가에 쌓은 돌담이나 벽.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사포곶' 어협 조합장인 조동만은 대대로 이어온 생계 수단인 수산업을 발전시키려는 포부를 안고 고향에 수산 고등학교를 설립한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내놓아 학교 터로 사용하게 하고 자신은 후원회를 조직하여 '출어세'까지 거두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원래부터 천시되어 온 자신들의 생업을 경시하던 주민들은 때마침 밀려온 도시화의 물결에 휩쓸려 조동만이 추진하는 학교 사업을 외면한다. 그래서 '수산 고등학교'는 '인문 고등학교'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육영사업의 실패는 조동만에게 첫 번째 패배를 안겨 주었다.

 이때, 이미 많은 어민으로부터 '출어세' 때문에 반발을 산 조동만은 그곳에 미군 부대가 들어섬으로써 더 큰 패배를 겪는다. 부대 주변에 새로운 부류의 직업여성들이 등장하고, 미군들의 횡포로 홍승태 일가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 수십만 평의 농토를 얻기 위한 간척 사업이 시작됨으로써 '사포곶'은 폐항된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는 그와 같은 변화를 이용하여 자신의 부와 권력을 쌓아가는 인간들이 생겨났다. 이웃 '거문개' 어협 조합장인 오갑성과 '사포곶' 토지 조합장인 박창식이 바로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다. 그들은 조동만의 실패를 십분 이용했다. 이들은 이 어촌 마을에 불어닥친 변화에 잘 적응(?)함으로써 새로운 현실에서 중심적인 인물이 되어 간다. 반면에 조동만은 설상가상으로 그가 소유한 발동선 '해조호'마저 조난함으로써 생계의 기반을 잃고 몰락하여 마침내는 '어살'을 놓아 연명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소설가 이문구(1941~2003)

 소설가 김동리는 이문구 추천사에서 '한국 문단은 가장 이채로운 스타일리스트'를 얻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말 특유의 가락을 잘 살려낸 유장한 문장으로 작가 자신이 경험한 농촌과 농민의 문제를 작품화함으로써, 소설의 주제와 문체까지도 농민의 어투에 근접한 사실적인 작품세계를 펼쳐 보여 농민소설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작가라고 말했다.

 작가는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의 애환과 그러한 상황을 초래한 시대적 모순을 충청도 특유의 토속어로 잘 포착해 형상화하고 있다. 농촌을 소재로 한 대표적인 연작소설 <관촌수필>은 1950∼1970년대 산업화 시기의 농촌을 묘사함으로써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현재의 황폐한 삶에 대비시켜 강하게 환기해 주는 작품이고, 새마을운동 이후 변모된 농민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또 다른 연작소설 <우리 동네>는 산업화 과정에서 농민들이 겪는 소외와 갈등을 가감 없이 보여줌으로써 일종의 농촌문제 보고서와 같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1970년대 이후의 농촌이 물질적으로 이전보다 훨씬 풍요해졌다. 농민이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그들은 흘린 땀의 대가치고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상대적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웃이 이웃을 사랑하고 상부상조하던 전통적인 공동체가, 텔레비전을 전위로 한 상업주의 매스컴의 영향과 독점 자본의 소비문화 조장 때문에 붕괴하였다는 사실이다.

 <오래된 미래>의 저자 헬레나가 지적하듯 가족 공동체 파괴, 탈인간화, 농촌의 물질적. 정신적 황폐화는 노동문제와 더불어 우리 시대에 가장 심각한 상처를 만들어내었다. 그런데 도시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면서 어쩌다가 고속버스를 타고 길가에 전시용으로 지어진 양옥들만을 보는 사람들은 우리의 뿌리인 농촌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가 없다. 그들은 이제 농촌도 잘 산다는 매스컴의 상투적 선전에 마취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오늘 속에 되살리고 오늘의 삶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은 작가의 중대한 임무이다. 이 작품은 이 땅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농민을 애정이 어린 눈으로, 때로는 날카로운 안목으로 바라본 결과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