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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정이현 단편소설 『삼풍백화점』

by 언덕에서 2021. 2. 23.

 

정이현 단편소설 『삼풍백화점』

 

 

정이현(鄭梨賢, 1972~)의 단편소설로 2006년 51회 [현대문학상] 수상작이다. 2007년 간행된 단편소설집 <오늘의 거짓말>에 수록되었다.

 이 작품은 벌써 우리의 기억에 가물가물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주인공 '나'는 삼풍백화점에서 고등학교 동창 R을 만나게 되고, 둘도 없는 단짝이 된다. 그렇게 지내던 중, R의 부탁을 들어 매장에서 하루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고, 무례한 손님을 대하게 된다. 그 후, '나'는 취업을 하고 남자친구도 생겨 R과 소원해진 후 ‘삼풍백화점 붕괴’ 소식을 듣는다. 당시 R은 그곳에서 근무 중이었다.

 '우리의 고도성장의 상징과도 같은 부정과 날림의 성채가 단 일 초 동안에 무너져내리면서 그 안에 있던 오백여 명은 대부분 구조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어떤 대형사고든지 기적적인 구사일생이나 특별히 억울한 죽음 아니면 유명인사가 당한 불행에 관심이 집중되다가 잊힌다. 인명에 대한 기억력은 날림공사에 대한 분노나 비웃음보다도 오히려 그 지속시간이 짧다. 이제 그 사건은 우리의 기억에 잊히기 충분한 시간이다.

 작가는 사건의 그 날까지의 시간을 주변 환경과 그 시절만의 독특한 문화 현상을 통해 사실적으로 압축해 들어가면서, 오백여 명이라는 숫자로 집단화된 죽음 중에서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살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어간 한 아가씨의 죽음을 그려냈다. 작가는 소리 없이 죽은 그녀의 생애가 아무하고도 바꿔치기하거나 헷갈릴 수 없는 아름답고 고유한 단 하나의 세계였다는 사실을 치밀하고 따스한 필치로 표현했다(박완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소설의 주인공 '나'는 20대 여성이다. '나'는 안락한 대학 생활을 보냈지만, 사회인으로 진입하는 문턱이 높아 막막하다. 졸업식 때 입을 옷을 사려고 들른 삼풍백화점에서 '나'는 고교 동창 R을 만난다. 고교를 졸업하고는 매장 직원으로 일하는 R과 교류하면서, '나'는 그간 사회에서 낙오된 ‘취준생’으로 매일을 견딘다. 그러나 하루 동안 아르바이트로 일했던 R의 매장에서 ‘고객’에게 실수를 거듭하면서 R과 멀어진다.

 주인공이 드디어 취업에 성공하고 새 남자친구와 평범한 데이트를 하던 어느 날, 자신이 막 들렀다 나온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마도 R이 계속 일하고 있을 즈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R이 생각나지만, R을 찾지 않는다.

 '나'는 R의 자취방 키도 가지고 있어 생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생사를 확인하지 않고 미니홈피에서 R과 닮은 여자를 보며 R이 살아있기만을 바란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한국에서 일어난 역대 참사 중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최악의 사고다.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2분경 서울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부실공사등의 원인으로 붕괴돼 501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됐으며 937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는 한국전쟁 이후 단일 사건으로 가장 큰 인적 피해였다.

 삼풍백화점은 설계 시 대단지 상가로 설계됐지만 정밀한 구조 진단 없이 백화점으로 변경됐고 이후로도 무리한 확장공사가 수시로 진행됐다. 붕괴사고가 일어나기 수개월 전부터 균열 등 조짐이 있었지만 경영진은 영업을 계속하기로 결정했고 사고 직전에 탈출했다. 거대한 백화점은 20여 초 만에 완전히 붕괴됐다. 삼풍백화점 참사는 1년 전인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와 함께 한국식 압축 성장의 부작용을 여실히 드러낸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됐다.

 

 

 작품 속 '나'는 R과 지내며 의식이 성장하게 되는데, 무례한 손님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친구인 '나'를 대하는 태도를 봄으로써  누군가의 처지를 걱정하고 고민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삼풍백화점은 화려함과 사치, 향락의 상징이다. 동시에 삼풍백화점은 부실하여 무너져 내리는 건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는 화려하게 보이고 싶어 하지만 실속이 없어 무너져내리는 청년 세대를 상징하기도 한다.

 중간에 '팔목에 상처'라는 소재가 등장하는데, 이는 8cm의 구두와 나란히 비교된다. 8cm의 구두는 청년들이 낙오되지 않게 고통을 감수하며 신던 것이고, '나'의 상처 또한 아이들 앞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자랑스럽게 여기는 상징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여학교 동창생 R의 부탁으로 삼풍백화점 일일 점원으로 나갔을 때, 그때 기억의 토막이 선명하여 인상적이다. 유니폼으로 갈아입자 생각보다 무거웠으나, 일을 끝내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자 이번엔 평상복이 오히려 무거웠다는 부분이다.

 황석영은 기억 속의 이런 단층 의식이 글쓰기의 기원이 아니었을까 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삼풍백화점의 위풍당당함과 그것이 한순간 무너져 감쪽같이 사라짐에 그 기억의 단층이 선명하다. 허구와 현실이 한순간 엇갈리는 그 장면이란 일종의 공백이자 죽음과 같은 순간이다. 글쓰기로서의 소설은 이 단층이 만들어내는 공백의 체험에서 비로소 탄생한다. 그 단층의 순간이 얼마나 순진한가를 아울러 보여주는 것도 이 작품이 지닌 미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