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어빙 단편소설 『립 반 윙클(Rip Van Winkle)』
미국 소설가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1783∼1859)의 단편소설로 1819년 발표되었다. 어빙은 법률을 공부했으나, 1807년 맏형과 같이 잡지 [샐머건디(Salmagundi)](1807∼1808) 를 발행했고, 이어서 니커보커(Diedrich Knickerbocker)라는 이름으로 해학과 풍자에 넘친 <뉴욕사(史)>(1809)를 발표하였다. 1815년, 형들의 회사 이권을 도모하기 위해 리버풀에 갔으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파산했다. 런던에서의 문학적 교제는 나름대로 결실을 보아, 월터 스콧 경으로부터 다시 글을 써보라는 격려를 받았다. 그 결과 나온 작품이 풍자와 기이한 착상, 사실과 허구, 구세계와 신세계가 혼합된 <스케치북>(1819∼20)이다. 여기에 실린 30여 편의 글 가운데 근대 단편소설의 효시로 불리는 <슬리피 할로의 전설> · 『립 반 윙클(Rip Van Winkle)』 · <유령신랑(The Spectre Bridegroom)> 등이 있다. 그의 필치는 유머가 넘치고 아름답고 우아하며, 그의 회고취미는 비난을 받곤 했지만, 미국 문학자로서 최초로 영국 문단에서 인정을 받아 명예를 얻었다. 이 때문에 그는 문학사에서 미국 단편소설의 선구자로 불린다.
미국 초기 작가 워싱턴 어빙이 지은 이 작품은 말하자면 구전되는 설화가 어떻게 현대문학의 정화로 대접받는 소설로 발전해 나가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그렇고 그런 시시한 이야기인데도 역사가 워낙 짧은 미국인들 입장에서는 금지옥엽처럼 떠받들면서 미국독립 당시의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립 반 윙클(Rip Van Winkle)』은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과 함께 워싱턴 어빙의 대표작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이야기는 미국 독립전쟁 전부터 시작된다. 립 반 윙클이란 남자는 네덜란드에서 미국에 이주해 아직 영국 통치하에 있는 뉴욕주 카스킬 산맥 자락에 자리를 잡은 작은 마을에서 산다.
립은 아내의 잔소리가 싫어 ‘울프’라는 개와 뉴욕 근처에 있는 카트스킬산 속으로 어슬렁거리며 들어갔다. 그때는 영국 왕 조지 3세가 미국을 다스리던 시절이다. 그는 산속에서 밀주를 마시며 나무 막대기를 세워놓고 ‘론 볼즈’(볼링)를 치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잠이 들고 만다. 한참 잔 후, 어느 날 아침 햇살에 잠을 깨고 보니, 울프는 없어지고 들고 왔던 장총이 녹슬고 자신의 턱에는 턱수염이 텁수룩하게 자라 있었다. 마을로 내려와 평소에 가던 여관에 가니 못 보던 국기와 사진이 걸려있었다. 미국 성조기와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다. 그가 잠깐 자는 동안 조지 워싱턴이 혁명을 일으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그는 이제 미국 시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한순간에 20년을 자버렸다. 20년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분명한 것은 20년이 금방 지나갔다는 사실이다.
그가 마을로 내려왔을 때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아내는 이미 오래전에 사망했고 많은 친구는 전쟁에 나가 죽었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다. 그는 미국 독립전쟁이 이미 끝난 줄 몰랐다. 그래서 영국 국왕 조지 3세의 충성스러운 신하로 처신하다가 곤욕을 치렀다. 마을 회관에 걸려있던 영국 국왕의 초상화는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어떤 자가 자기 이름인 립 반 윙클로 사칭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했으나 곧 그 남자는 이미 성장한 자기의 친아들임을 알게 되었다.
예전부터 이 마을에 살고 있던 사람들 몇이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이미 20년 전에 마을에서 사라진 것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그동안 성인이 된 딸이 그를 돌보아 주었기 때문에 ‘립’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게으른 생활을 즐기며 여생을 다하게 되었다.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미국이 영국 식민지였을 때, 지금의 뉴욕 근처 산골에 사는 사람 좋은, 촌사람 립 밴 윙클은 지독한 공처가였다. 어느 날 아침부터 퍼붓는 마누라의 딱따구리 소리와 같은 잔소리에 견디다 못해 나팔 총을 둘러메고 애완견과 함께 뒷산에 몸을 피했다가, 거기서 이상한 옛 복장을 한 네덜란드인들을 만난다. 윙클은 그들의 볼링놀이를 구경하다가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20년이란 시간이 흘러 있었다. 마을에 내려갔더니 미국은 독립국이 되어 있었고 마누라도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후 그는 천국 같은 고향에서 원로 대접을 받으며 그야말로 게으르게 태평을 누리면서 여생을 보냈다는 이야기다.
평자들은 악독한 마누라는 착취를 일삼던 대영제국을 의미하며 해방된 주인공은 독립을 이룬 미국을 상징한다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한다. 그러나 ‘무서운 마누라’ vs ‘사람 좋은 공처가 남편’ 같은 캐릭터나 한잠 자는 사이에 몇십 년이 흘렀다는 인생무상 구성은 중국의 <태평광기>나 한국의 <골계전> 같은 책에 그리고 동서고금 관계 없이 아주 아주 흔하게 등장하는 소재다. 그만큼 마누라는 무서운 존재이며 그 압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남자들의 애처로운 열망 또한 세계적으로 공통된 듯하다.
아무튼 잔소리꾼 아내와 공처가 립 반 윙클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미국독립 당시의 사회상과 정치 상황에 잘 비유해낸 작품이다. 왕정의 몰락과 시민사회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변환점이 유머와 기묘한 사건을 통해 풀어낸 수작이라고 평하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한다.
♣
(전략) 『립 밴 윙클』은 동양적 상상력을 서구적으로 형상화한 특이한 작품이다. 립이 다른 시간궤를 경험하고 자신의 시간궤로 되돌아오게 되는 과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설화에 매우 닮아있다. 그러나 그것을 형상화하는 방식이나 주인공에게 남겨진 충격의 흔적은 아주 다르다.
그 차이는 먼저 서술과 묘사에서 드러난다. 동양의 설화는 애매한 시대와 추상적인 인물들에 의해 진행되는데 비해 이 작품의 주인공과 시대배경은 구체성을 띠고 드러나며 묘사도 아주 사실적이다. 그것은 어쩌면 세련된 현대의 단편과 정제되지 못한 민담의 차이일 수도 있다.
두번 째 차이는 다른 시간궤에 속한 사람들의 초월성에 대한 해명에 있다. 동양의 설화에서는 그들이 신선이거나 자연의 특혜를 받은 이들, 혹은 시간의 파괴력도 어찌해볼 수 없는 한이나 비원을 품은 이들 등으로 그 해명이 시도되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왜 초기 네덜란드계 이민들이나 헨드릭 허드슨 선장과 그 배 반월호의 선원들이 시간을 초월해 나타나게 되었고, 또 왜 그들의 공간에서는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진행되는지에 대해 설명이 없다. 서구의 근대문명이 초월성의 논리에 약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독자의 상상력에 부과하는 작가의 숙제일까.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아무래도 그 경험의 충격이 주인공에게 남긴 흔적일 것이다. 동양의 주인공들은 그 충격으로 자신들도 초월을 지향하게 되거나 최소한 그 초월적 공간을 다시 찾아가려고 애를 쓰고 그 과정에서 흔히 현실과의 갈등을 빚는다. 그러나 립에게는 그런 노력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거니와 오래잖아 되찾은 현실과 조화를 이루며 살게 된다.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4권 185~6쪽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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