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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현대소설

제임스 조이스 단편소설 『애러비(Araby)』

by 언덕에서 2020. 4. 23.

 

 

제임스 조이스 단편소설 『애러비(Araby)』

 

 

 

아일랜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1882∼1941)의 단편소설로 1916년 발간된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에 게재되어 발표되었다. ‘20세기 문학에 변혁을 일으킨 모더니즘의 선구적 작가’라는 타이틀이 늘 따라다니는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은 무조건 어렵다는 선입견을 품기 쉽다. T S 엘리엇은 조이스의 소설이 어렵다는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더블린 사람들>을 읽으라. 그것이 이 위대한 작가를 이해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 바 있다.

 1903년 4월 어머니가 죽자 조이스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교사직을 비롯한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지금은 아일랜드의 조이스 박물관이 된 샌디코브의 마르텔로 타워 등 여러 곳을 옮겨다니며 지냈다. 이때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에 바탕을 둔 긴 자연주의 소설 <스티븐 히어로(Stephen Hero)>를 이미 쓰고 있었는데, 1904년 조지 러셀이 아일랜드가 배경인 단편을 1편당 1파운드씩 주고 농민잡지 [아이리시 홈스테드(The Irish Homestead)]에 실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을 받아들여 [더블린 사람들(Dubliners)](1914)로 출판된 단편을 쓰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자매(The Sisters)> <에블린(Eveline)> <경주가 끝난 뒤(After the Race)>가 스티븐 디덜러스라는 가명으로 발표된 후 편집자는 조이스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한편 조이스는 노라 바너클이라는 소녀를 만났는데 '블룸즈데이'(Bloomsday: 그의 소설 〈율리시스〉의 배경이 되는 날)라고 선택한 6월 16일에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결혼식은 치르지 않았지만 결국 그녀를 설득해 아일랜드를 떠났다.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은 <자매>, <마주침>, 「애러비」, <에블린>, <경주가 끝난 뒤>, <두 건달>, <하숙집>, <작은 구름>, <대응>, <진흙>, <가슴 아픈 사건>, <담쟁이 날의 위원회실>, <어머니>, <은총>, <망자> 등 15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는데 『애러비』는 그 가운데 하나로 비교적 짧은 단편소설이다. 다른 작가들의 일반적인 단편집과 달리 <더블린 사람들>은 일관된 주제를 갖고 있다. 조이스는 “나의 의도는 아일랜드 도덕사의 한 장을 쓰는 것이었고, 더블린이라는 도시가 내게는 마비의 중심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에 더블린을 배경으로 선택했다. 나는 무관심한 대중에게 더블린을 어린 시절, 청년기, 성숙기, 공적 생활의 네 가지 측면을 통해 보여 주고자 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새로운 문학을 실현하기 위해 ‘의식의 흐름’ ‘열린 결말’ 같은 획기적인 기법을 개발한 조이스의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은 세계인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단편집 가운데 하나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소년’은 언제부터인가 이웃에 사는 친구 맹간의 누나를 좋아하게 된다. 친구가 누나를 괴롭힐 때나 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옷이 나풀거렸고 소년의 가슴은 뛰었다. 또한, 부드럽게 땋아 내린 머리채가 좌우로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며 소년의 마음도 따라 흔들렸다. 아침마다 맹간의 집을 훔쳐보다가 그녀가 현관 앞으로 나오면 바로 책가방을 쥐고 달려나가 그녀의 뒤를 쫓았다. 갈림길 지점에 오면 소년은 일부러 걸음을 빨리하여 그녀를 앞질렀다.

 아무 데서나 불쑥불쑥 정신을 사로잡는 누나 생각에 혼란스러운 소년의 몸은 하프와도 같았고, 그녀의 말과 몸짓은 하프 타는 손가락과도 같았다. 드디어 누나가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애러비 장을 구경 갈 계획이 있냐”고 물으면서 “굉장히 멋진 장일 거야”라고 말한다. 자신은 가지 못한다며 소년에게 “넌 한 번 가 보는 게 좋을걸”이라고 말하자 소년은 “혹시 가게 되면 너에게 뭐라도 사다 줄게”라고 약속한다.

 애러비 장에 가기로 한 날, 아저씨가 늦게 들어왔지만, 소년은 돈을 받아 기어이 길을 나선다. 밤 9시 50분에야 바자가 열리는 건물 앞에 도착했고, 들어가 보니 이미 대부분 가게는 문을 닫은 상태였다. 허망한 마음으로 아직 닫지 않은 가게 앞을 거닐다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지”라는 가게 점원들의 대화를 듣는다.

 괜히 물건을 살 것처럼 서성이다 매점 사이의 어두운 길 한가운데로 걸어가던 소년은 그 자리에서 자신을 직시하게 된다. ‘그 어둠 속을 응시하다가 소년은 허영에 몰려 웃음거리가 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고뇌와 분노로 타오르고 있는 자신의 눈도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연모하는 누나의 성의 없는 한 마디 물음에 무심코 해버린 약속을 지키기 위해 광기와 같은 열중으로 시골 바자회에 집착하는 소년에게서 독자는 잠시 순결하고 애틋한 사랑을 읽는 느낌에 젖게 된다.

 (전략) 나는 이윽고 천천히 몸을 돌려 바자 가운데로 걸어 돌아왔다. 1페니짜리 동전 두 개를 주머니 속 6펜스짜리 동전 위에 떨어뜨렸다. 회랑 한끝에서 불이 나갔다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홀의 윗부분은 어느새 칠흑같이 깜깜해졌다. 그 깜깜한 속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허영심에 쫓기다 꼴불견이 되고 만 푼수 같은 내 모습에 두 눈이 참담함과 분노로 이글거렸다.--- 본문 43쪽

 누나 생각에 들끓는 열기, 늦은 시각에 기어이 집을 나서는 안간힘, 컴컴한 곳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허망함을 고스란히 전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괜히 그 앞에서 서성이는 일, 소년의 마음이 『애러비』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SNS가 발달하여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미리 확인하고 바로 만나는 요즘 시각으로 보면 소년은 자신이 답답할지 모르지만 사랑 앞에서 가슴이 뛰는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을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무심코 던진 말에 내내 들떠서 맹목적으로 빠져든 기억을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나의 진심에 누구도 관심 없고 나에겐 목숨과 같이 소중한 일이나 타인에겐 그저 우발사건인, 어이없는 사안이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행로가 바로 인생이다. 한 뼘 성장한 소년이 이제 더 계산 없이 열에 들뜨지 않는 어른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은 자연의 이치이기도 하다.

 (전략)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에 이르러서도 그를 기다리는 것은 가망 없는 허영에 너무 많은 것을 걸었다는 깨달음뿐이다. 아무도 아는 이 없고 눈여겨보지도 않건만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믿는 소년의 고뇌와 분노는 고통스럽지만, 또한 그대로 소중한 눈뜸의 체험이 될 것이다. 덜 여물고 섬세하며 상처받기 쉬운 영혼에 새겨진 고통의 흔적은 섬광 같은 각성의 기억보다 오래 남아 그 의식을 지배할 수도 있다. <(이문열 세계문학산책> 3권 207쪽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