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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을 읽다

고대소설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by 언덕에서 2019. 4. 23.

 

고대소설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조선 초기 학자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지은 한문 소설로 원본은 전하지 않고 일본 동경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작자의 단편 소설집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실려 있다소설 제목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라는 한자어를 한글로 번역하면 '취하여 부벽정에서 노닐은 기억'이라고 풀이된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작품의 서사구조에 긴장감을 조성시키는 요소보다는 섬세하고 감성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운문(한시)을 20여 편 이상 투입시키며 작품 전체를 몽환적인 분위기로 이끌며 작중 현실을 기점으로 수천 년 전의 동서고금 역사 문제까지 거침없이 끌고나와 독자들을 지적 긴장감 속으로 몰아넣는다.
 살펴보자면, 이 작품은
 기자조선의 도읍지로 알려진 평양을 배경으로 하여 한 남자 상인과 죽어서 선녀가 된 기자(箕子)의 딸 사이에 이루어진 정신적인 사랑과 고국의 흥망에 대한 회고의 정을 진하게 담은 일종의 애정 소설이다. 구조 유형상 죽은 여자의 혼령이 산 사람처럼 나타나 주인공과 함께 어울렸다는 점에서 명혼소설(冥婚小說)’이라 할 수 있다. 만남이 꿈속의 일인 것 같다는 설정은 몽유소설과 상통하지만, 꿈의 시작과 끝을 불분명하게 해서 한층 더 미묘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도가적인 취향과 관련된 주체적인 사관을 내면적인 신념으로 승화시켰다.

 

조선 초기 학자 김시습 ( 金時習: 1435~1493 )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송도 부호의 아들 홍생이 유람을 겸한 장사를 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서 친구들과 같이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취흥을 이기지 못해 홀로 작은 배를 타고 부벽정 아래에 이르러, 정자 위로 올라가서 난간을 의지하고 고국의 흥망을 탄식하며 시를 지어 읊다가 삼경이 되어 돌아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발자국소리가 들려온다.
 홍생은 이때 영명사의 스님이 찾아오는가 하고 생각했으나, 뜻밖에도 한 미인이 좌우에 시녀를 거느리고 비단 부채를 들고 나타나는데, 그 모습이 엄숙하고 정숙해 마치 귀족 집안의 처녀 같은 느낌을 받다가, 마침내는 시녀의 안내를 받아 정자 위로 올라가서 그 미인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로 진전된다.
 알고 보니 그 미인의 신분은 은왕의 후예요, 기자왕의 딸로서, 부왕이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로 정절을 지켜 죽기를 기다리는데, 신선이 된 선조가 나타나 불사약을 주어 그 약을 먹고 수정궁의 상아가 되었다는 것이다.
 홍생은 부벽루에서 그 선녀와 하룻밤을 지내며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정신적인 정회를 나누다 날이 새자 그 선녀는 승천하고, 홍생은 집으로 돌아와 그 선녀를 생각하며 사모하던 끝에 병에 걸려 자리에 눕는다. 
 그러던 어느 날 선녀의 시녀가 나타나 “우리 아가씨가 상제께 아뢰어 그대를 견우성 막하의 종사로 삼았으니 올라오라.”고 일러주는 꿈을 꾸고 난 뒤,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분향하고 누웠다가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홍생의 시신은 빈장(嬪葬)1한 지 몇 달이 지나도 얼굴색이 변하지 않았다.

 

 

 이 작품의 기본 바탕은 주인공 홍생이 선녀에 대한 절의를 지키는 이야기다. 그런데 작가는 거세게 세조를 비판하고 있다. 소설 『취유부벽정기』에서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선녀는 고대 기자가 다스리던 고조선의 공주였다. 그런데 위만이 나타나서 고조선의 왕위를 찬탈했다. 여기까지 읽다보면 독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떠오르는 생각 때문에 웃음이 나오고야 만다. 이 소설은 바로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의 이야기를 위만을 빗대어 풍자한, 작가의 우의(寓意)가 드러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금오신화>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 중 한 단편으로 같은 금오신화 내의 작품인 '만복사저포기'가 불교적이요, '이생규장전'이 유교적이라면, 이 작품은 도교적이다. 도교의 중심 사상은 신선사상인데, 이와 같은 신선담을 표현한 것은 작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선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취유부벽정기는 평양을 배경으로 하고 역사적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토속적인 성격 및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남녀 간의 사랑을 제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작자의 작품인 <만복사저포기및 <이생규장전>과 같다정신적인 사랑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그들과 구별된다또한불의와 폭력에 의하여 정당한 삶과 역사가 좌절되는 아픔을 표현한 작품이어서 짙은 우수가 서려 있다귀가한 주인공이 기씨녀를 그리워하다가 죽는 것으로 되어 있어 작품이 비극적 성격을 지니나 죽어서 신선이 되었다고 함으로써 그러한 성격이 다소 약화하여 있다.

 

 

취유부벽정기의 해석과 평가에는 여러 가지가 엇갈려 있다작품에 나타난 사건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역사적 사건의 우의라고 보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선녀와의 연애 및 선계로의 승화를 현실도피로 보고 그것은 작자의 현실주의적 사상과 모순되는 것이기에 작품은 결국 작자의 정신적 갈등을 반영한다고 보는 경우가 있다또한모순에 찬 세계를 개조해서 세계와 화합하려는 자아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세계의 대결을 통하여 소설적 진실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외에 이 작품을 도가적 문화의식의 투영으로 해석하여 작품에 나타난 갈등을 동이족의 문화적 우월감과 함께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 극렬한 반존화적 민족저항의 분한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기자왕이 위만에서 나라를 빼앗긴 것은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것과 유사하다. 즉 홍생이 기자왕의 딸을 사모한 것은 단종에 대한 연모의 정을 표현한 것이다. 이렇듯이 이 작품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역사적 사건을 빗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주류이지만, 주인공이 선계로 승화한 것을 현실도피로 보고 작자의 현실주의적 사상과의 정신적 갈등을 반영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1. 사정상 장사를 속히 치르지 못하고 송장을 방 안에 둘 수 없을 때에, 한데나 의지간에 관을 놓고 이엉 따위로 그 위를 이어 눈비를 가릴 수 있도록 덮어 두는 일. 또는 그렇게 덮어 둔 것.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