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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을 읽다

고대소설『은애전(銀愛傳)』

by 언덕에서 2019. 2. 5.

 

고대소설 『은애전(銀愛傳)』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李德懋.1741.영조 17∼1793.정조 17)가 지은 한문 소설로 작자의 문집 <아정유고(雅亭遺稿)>에 실려 있다. 작품을 만든 동기는 1790(정조 14) 정조가 모든 옥안(獄案)1을 심리하다가 김은애와 신여척을 살리게 하고, 이덕무로 하여금 전을 짓게 하여 내각(內閣)2<일력(日曆)3>에 싣게 하였다. 이 전은 남을 모함하고 형제간에 우애 없는 것을 경계하는 뜻이 담겨 있으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입전된 것으로 당시의 세태와 윤리관념, 그리고 정조의 밝은 덕화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이야기는 이덕무의 문집 '아정유고'에 실려 있는 『은애전』의 내용이다. 정조가 김은애를 살린 일을 이덕무로 하여금 전을 짓게 했는데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종의 판례로 남기려 한 것으로 보인다. 요즘 신문을 보면 여성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행실을 문제 삼는 이야기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이야기들로 인해 피해자가 오히려 죄인 취급을 받고, 상처가 평생 가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본다면 『은애전』은 현대에도 다시 생각해 볼 이야기이다.

 

 

정조조의 검서관이었던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시문집 <아정유고>.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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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정조 14 전라도 강진에서는 아주 끔찍한 살인 사건이 있었다. 사건의 범인은 김은애라는 18세의 양갓집 여인이었고, 피해자는 이웃에 살던 안 노파였다. 현감 박재순은 마을로 와서 현장을 살피고 노파의 시체도 검사했는데, 연약한 여인 한 사람의 범행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했다. 이 사건을 보고 받은 관찰사 윤행원도 공모자를 찾아내려고 했지만 김은애와 주변 사람들의 진술이 일관되었기에 사건에 대한 결론을 짓고 살인죄로 처벌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현감과 관찰사는 모두 김은애의 사정을 딱하게 생각하여 쉽게 처리를 하지 못했다.

 사건의 진상은 이랬다. 죽은 안 노파는 창기 출신으로 행실이 바르지 못하고, 남 험담하기를 좋아했는데, 피부병이 심할 때에는 더욱 말을 삼가지 못했다. 노파는 가난하여 은애네 집에서 자주 곡식을 꾸었는데, 하루는 곡식을 꾸러 갔다가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은애를 모함할 계획을 세웠다. 노파는 시누이의 손자인 미소년 최정련을 꾀어 한 가지 계략을 전한다. 최정련이 은애와 사통했다는 소문을 내고 다니면 결국 김은애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최정련은 소문을 냈고, 노파는 그 소문을 확대했다. 소문으로 은애가 고통스러운 삶을 살던 중에 김양준이라는 사람은 그녀의 결백을 믿고 아내로 삼았다. 그런데 시집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노파는 2년도 넘게 말을 만들고 다녔고, 거짓 소문에 시달리던 은애는 결국 자신의 결백을 지키려 노파의 집을 찾아가 그녀를 여러 차례 찔러 살해했다.

 마침 그해 여름 나라에 큰 경사가 있어 죽을 죄수를 기록하여 올리는데, 이 사건을 중하게 여기어 정조와 대신들이 함께 의논했다. 대신 채제공이 동기는 이해가 되나 살인죄를 저질렀으니 용서하기는 어렵다고 하자 정조는 해서에서 있었던 비슷한 사건의 예를 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때 감사는 놓아주기를 청하였고, 선왕께서는 그 말을 받아들였다. 이제 은애를 풀어주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풍속과 인심에 대한 교화를 풀 것인가. 그러므로 그녀를 용서하고자 하노라."  

 정조의 사면으로 인해 은애는 살인자 신여척과 함께 풀려났다. 

 

 

 

 김은애는 강진현에 살고 있는 양반집의 딸인데 한동네에 사는 퇴물기생 노파가 턱없이 은애를 모함하여 차마 견딜 수 없는 경지에 이르자 원통함이 뼈에 사무쳐 그 노파를 살해하게 된다은애는 관가에 끌려가서 문초를 받는데, 두려운 빛도 없이 규중처녀로서 모함을 받은 자기의 원통함을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사람을 죽인 죄는 달게 받겠다고 아뢴다. 현관은 마음으로 동정은 하나 어쩔 수가 없어 위로 보고를 한다. 김은애의 옥사는 임금인 정조에게 보고가 됐다.

 좌의정 채제공은 “사정이야 이해가 되지만 살인죄는 용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조는 은애를 용서하고 풀어줬다. 정숙한 여인이 음란하다고 모함을 당한 것은 원통한 일이다. 그래서 칼을 쥐고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아니라 안 노파가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임금은 정조를 지닌 여자가 음란하다는 모함을 입음은 천하에 원통한 일이라고 하면서 은애를 놓아주라고 한다당시에 밀 두 되 때문에 동생을 죽인 사람을 꾸짖다가 발로 채자노하여 배를 찼다가 사람을 죽인 신여척이 나중에 은애와 같이 방면되었다. 

 


 

 김은애의 목숨을 놓고 정조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듯하다. 국법과 생명 사이에서 얼마나 고심했는지, 직접 쓴 판결문을 채제공에게 보이며 다시 묻는데, 왕의 고뇌에 공감한 채제공은 비로소 감탄한다. 하지만 ‘살인자는 목숨으로 갚는다.’는 국법을 무시하고 은애의 생명을 살려 준 대가로 범죄자 최정련을 용서하자는 판결은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다.
 정조는 김은애를 높이 평가했다. 피해자이면서 스스로를 자책하는 나약한 여자들과는 달리 용기와 기백으로 자신의 무죄를 입증했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왕은 사마천이 다시 태어난다면「유협전」말미에 은애를 포함시킬 것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당대 문장가로 이름난 이덕무에게 『은애전』을 쓰게 했다.
 『은애전』은 한 인격을 수치와 분노로 치닫게 한 자는 응분의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법적으로 죄가 있든 없던 한 여인에게 한을 심어준다면 그가 누구이든 간에 그 과보를 결코 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조는 “은애 같은 여인을 살려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풍속과 교화를 펼 수 있겠느냐?”며 용서의 이유를 설명했다. 은애는 살인자에서 정절을 지키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재평가됐다. 정절에 대해 매우 엄격했던 조선 여성의 일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풍속과 교화라는 틀에서 이처럼 잔인하고도 초법적인 살인이 미화되는 게 과연 정당한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1. 예전에, 재판 때에 쓰던 조서. 옥사를 조사한 서류를 이른다. [본문으로]
  2. 「1」『역사』규장각의 이문원과 봉모당(奉謨堂)을 통틀어 이르는 말. [본문으로]
  3. 그날의 날짜, 요일, 일진(日辰) 따위를 각각 한 장에 적어 매일 한 장씩 떼거나 젖혀 보도록 만든 것.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