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소설 『절화기담(折花奇談)』
조선시대 1809년(순조 9) 석천주인(石泉主人)이라는 호를 가진 사람이 지은 한문 소설로 필사본이 남아 있다. 일본 [동양문고] 소장 재산루(在山樓: 前間恭) 장본(藏本)으로 장회(章回)소설이다.
‘가경십사년기사단양후일일(嘉慶十四年己巳端陽後一日) 석천주인추서우운도방정사(石泉主人追書于薰陶坊精舍)’라는 간기(刊記)로 보아 1809년(순조 9년) 5월 6일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절화기담서, 곧 남화산인지(南華散人識: 石泉主人의 자기 기록을 윤색한 것으로 되어 있는 원작자의 벗)ㆍ석천주인자서(石泉主人自序)ㆍ본문(삼회)ㆍ남화산인추서(南華散人追序)로 구성되어 있다.
『절화기담』은 나말여초에 창작된 「최치원전」 이래 면면히 이어져 온 애정 전기의 전통을 계승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우리 국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내용 측면에서 재자(才子) 이생과 이웃의 여종인 가인(佳人) 순매 사이의 어긋난 만남이 되풀이되고, 형식 측면에서는 삽입시가 있는 부분이 이러한 평가에 주요한 기준이 되었다. 특히, 두 주인공의 만남이 어긋나고 사랑이 완성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생규장전」, 「운영전」, 「주생전」, 「심생전」 등 비극적 애정 전기가 가진 전통을 잇고 있다는 측면으로 이해된다.
더불어 19세기 초에 변화된 시대상과 세계관 그리고 소설관까지 일정하게 반영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남녀 주인공이 재자, 가인이기는 하나 기혼 남녀라는 점에서 이전의 애정 전기의 주인공과는 다르다. 만남도 전기적 만남과 형식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간난의 부름, 남편의 술주정, 동생 순덕의 방문, 와병, 화재 등으로 이생과 순매의 만남은 번번이 어그러진다. 겨우 한 번의 만남이 이뤄지는데, 그들이 벌이는 애정 행각을 묘사하는 방식이 이전의 전기와는 다르게 매우 구체적이다. 이런 점에서 그간 보여 왔던 세태 소설이나 통속 소설의 면모를 보인다. 이외에도 작품의 배경인 한양과 그곳에서 이뤄지는 여러 풍속도 매우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문체 면에서도 백화식 한문이 쓰이고 있다. 즉, 『절화기담』은 애정 전기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일상과 인간 현실에 주목하면서 인간 내면의 욕정의 문제를 응시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당시의 시각을 담아낸 작품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준수하고 고상하며 풍채도 빼어난 재주 있는 선비가 우물 앞에서 이제 17세가 된 순매라는 여자에게 반한다. 안타깝게도 순매는 이미 시집을 간 지 몇 해나 되었다. 하지만 이생에게 그녀의 혼인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늘 순매 생각뿐이다. 어느 날, 사내종 하나가 순매가 전당 잡힌 은노리개를 가지고 와 이생에게 보관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생은 이 기회를 틈타 은노리개로 순매와 만남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고, 우물가에 가는 그녀에게 슬쩍 노리개를 꺼내 보이며 말을 건넨다.
“뜻밖에 노리개 하나로 아름다운 인연을 맺게 됐구나. 청춘은 다시 오기 어렵고 즐거운 일도 늘 있는 것은 아니지. 하룻밤의 기약을 아끼지 말고 삼생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 어떠하냐?”
그러나 순매는 대답도 하지 않고 물만 긷고는 가버린다. 이때부터 이생의 ‘순매 만나기 대작전’이 펼쳐진다. 이생은 참견을 좋아하고 사람을 잘 소개해 주는 데 능숙한 노파를 통해 순매를 만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녀는 절개가 굳어 노파가 억지소리로 꼬여낼 수는 없었다. 비록 신분이 천하나 성품이 고귀해서 이생이 바라는 대로 쉽게 뜻을 이루기 어렵고, 이생에게 마음을 두었어도 순매를 지켜보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였다. 사실 순매는 이생보다 신분도 낮았고, 이미 남편이 있기에 이생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제가 비록 천한 몸이지만 저 역시 사람의 성품을 지녔으니 낭군께서 사랑해 주시는 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몸은 형편상 자유롭지 못하답니다.”
술주정뱅이에 용렬한 남편보다는 이생이 자신을 더 사랑해 주는 것을 알았기에 순매도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이생과 순매가 만나는 과정에서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를 한 1792년 봄부터 1794년 4월까지 실질적인 만남은 불과 9번이었다. 여러 이유로 순매와 이생이 간절히 바라던 만남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에 순매와 이생의 사랑을 이룰 수 있는 짧은 하룻밤이 주어진다. 이생은 이 하룻밤으로 순매에게 더욱 빠져들었고 기나긴 만남이 되기를 바랐다. 그녀가 이생의 마음을 받아준 것일까? 그러나 순매는 이 만남을 마지막으로 이생을 거절한다. 주변의 감시가 날로 심해져 더 틈을 낼 수 없으니 부디 몸조심하라는 말을 한다.
재자가 가인을 찾아 사랑을 속삭이지만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둘 다 유부남 유부녀이기 때문이다. 『금병매』와 흡사한 염정 묘사, 구조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단순한 아류작으로 남지 않는다. 봉건주의와 권선징악의 이념이 무너지는 19세기 초 조선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는 빼어난 세태 소설이다.
남주인공은 일대의 재자 이생이며 여주인공은 이미 머리를 얹은 방씨네 계집종으로 열일곱 살 난 절세의 미인 순매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애정의 갈등을 노파ㆍ순덕ㆍ간난을 끼워 넣어 재치 있게 엮어 나감으로써 작자의 체험을 독자가 재체험하게 하는 소설의 기교를 일으켜 나갔다. 단 한 번 육체관계를 이룬 후 순매는 다섯 발짝에 한번, 세 발짝에 두 번 뒤돌아보면서도, 끝내는 정은 잊을 수 없으나 의는 저버릴 수 없으니, 저승에서나 여운을 이루기가 소원이라고 하면서, 이생의 갖은 꼬임에 넘어가지 않았다.
인간의 네 가지 욕망이 소설의 주제가 되어 인간 생활을 그려낸다. 여기에서 저자는 아무리 생활체험이 남다르다 해도, 그것을 기록하지 않으면 전해질 리 없고, 독자를 끌 만한 짜임새 있는 차례·사건·문장력이 없이는 독자에게 감흥을 줄 수 없다고 역설한다.
♣
『절화기담』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이 작품의 에로틱한 분위기다. <변강쇠전>처럼 윤리나 도덕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점이야말로 『절화기담』이 갖는 특징적인 부분이자 미덕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고소설 작품들은 일단 뭔가 교훈될 만한 내용을 주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유부녀가 외도를 하고 남편에게 돌아가려 해도 아무런 응징을 가하지 않는 소설은 당시의 관점에서는 가볍기 짝이 없다.
원저자 석천주인은, 여주인공과 만나기 전에 정이 싹트는 것을 애당초 잘라 버렸어야 해야 했는데, 그래도 방황 끝에나마 윤리적 규범에서 어긋나지 않아 마침내 파경을 불러오지 않음이 다행이라고 말한다. 기미가 보이려 할 때 끊어 버려야지, 그렇지 못하면 마침내 자신을 망치고, 집안을 망치는 결과가 된다고 하면서 계세의 뜻으로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남화산인추서에서 저자는 『절화기담』은 사건이 절실하고 지극하기가 <서상기> 못지않고, 순매를 꾸민다면 서시, 양귀비도 부끄러울 게 없다고 역설한다. 중국 어느 패설보다도 조선 것을, 옛것보다는 자기가 사는 현실에, 꾸밈이 많은 글보다는 세속적이며 촌스러울망정 자세하고 곡진함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런 점을 통해 우리 근세문학사조의 하나인, 민족적인 자긍과 자아에 대한 각성을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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