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소설『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조선시대 문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지은 한문 소설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통분하여 경주 금오산에 은거할 때 만든 작품이다. 조선 전기목판본이 있고, 작자의 단편 소설집 <금오신화>에 실려 있다. <금오신화>에는 세종 대의 선비 박생의 눈으로 관찰한 지옥 이야기인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가 수록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남염부제 혹은 남염부주는 인간들이 사는 세상을 말한다. 김시습은 여기에 불교의 지옥교의에 등장하는 초열지옥(焦熱地獄) 이미지를 대입하고, 명부의 심판자인 염마를 등장시키고 있다. 즉, 김시습이 말하는 ‘남염부주’는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명부1와 지옥이 중첩되어 있는 세계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꿈속에서 겪은 일을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되는 몽유구조의 소설로서, 작자의 철학사상이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되었다. 불교를 믿지 않던 박생(朴生)이 꿈에 지옥의 염부주에 갔다 와서 크게 깨우쳤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전개는 박생과 염왕의 문답식 토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글쓴이는 왕은 덕망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하며 백성을 나라의 주체로 여겨야 한다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는 백성이 나라의 주체가 되지 않으면 천명이 가 버리고 인심이 떠나게 되어 임금도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정도를 추구하는 가치관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 역사적 사건에 비추어 해석해 보면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풍자한 소설이다. 폭력으로 백성을 위협하거나 덕망이 없이 권력으로 왕위에 오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며 세조를 비판하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염부주는 지옥 명칭이다. 경주 사람 박생(朴生)은 유학에만 뜻을 기울이며, 과거에 응시하여 낙방한 경험이 있다. 그는 유학으로 대성하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열심히 공부하였으나 과거에 실패하여 당혹감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뜻이 높고 강직하고 인품이 훌륭하여 주위에서 칭찬을 받았다. 그는 귀신․무당․불교 등의 이단에 빠지지 않으려고 유교 경전을 읽고, 세상의 이치는 하나뿐이라는 내용의 철학 논문인 <일리론(一理論)>을 쓰면서 자기 뜻을 더욱 확고하게 다졌다. 그런 그가 하루는 주역을 읽다가 조는 사이에 염라국으로 들어간다.
그는 저승사자에게 인도되어 염부주라는 별세계에 이르러 염왕과 사상적인 담론을 벌였다. 박생은 염라대왕과 음양, 귀신의 도, 군자 소인의 구별, 고금의 치란(治亂), 속세 종교가 혹세무민하는 죄악에 대하여 의견을 주고받는다. 염라대왕은 박생이 강직하고 천지 이치에 통달하고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기백을 높이 산다. 박생은 유교․ 불교․ 미신․ 우주․ 정치 등 다방면에 걸친 문답을 통하여 염라대왕과 의견일치에 도달함으로써, 자신의 지식이 타당함을 재확인하였다. 종국에는 염라대왕으로부터 염라국 왕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승낙한다. 염왕은 박생의 참된 지식을 칭찬하고 그 능력을 인정하여 저승의 왕이 되는 임명장을 내려줄 터이니 잠시 인간세계에 다녀오라고 말하였다.
박생은 염왕과 하직하고 대궐 문을 나와 수레를 탔다. 수레가 몹시 흔들리는 바람에 깜짝 놀라 깨니 꿈이었다. 꿈을 깬 박생은 죽을 날이 다가온 것을 알고 가사를 정리하고 지내다가 몇 달 만에 병이 들었다. 그는 의원과 무당을 불러 병을 고치지 않고 조용히 죽었다.
그가 염라대왕이 된 것은 이웃집 사람의 꿈을 통해 확인되었다. 신인이 나타나 그가 염라대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죽어서 그가 간 곳이 바로 남염부주라는 지옥이고, 그는 그곳에서 염라대왕이 되고 말았다.
'남염부주지'라는 장소는 인간 세계에서 부모나 임금을 죽인 대역 죄인이나 간사하고 흉악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곳이다. 이러한 공간을 설정한 이유는 악인에 대한 인과응보, 선인에 대한 사필귀정의 관점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작가가 현실의 불행을 조금이나마 위로받고자 한 갈등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세력에 굴복하지 않는’ 주인공 박생의 모습은 바로 작가 김시습의 투영이기도 하다. 작품에 나타난 염부주(炎浮洲: 염라국)와 염왕은 작자가 자신의 사상이 타당한 것임을 입증해 보이기 위하여 설정한 가상적인 존재이다. <남염부주지>에서 작자는 박생과 염라 왕의 문답을 통해 자신이 지닌 사상을 표출하였다.
작자는 염라 왕의 입을 통해 유교를 정도로 보고, 불교를 사도로 보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교의 필요성으로 유불조화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세속적인 기복 불교에 대해서는 통렬하게 공박하고 있다. 또한 불교의 내세설에 대해서 염라 왕은 유교적인 음양이론을 내세워 불교의 극락과 지옥을 부인하고 있다. 그리고 염라 왕은 귀신을 음양이기의 조화로 보고, 부질없이 귀신을 두려워하는 것을 미신이라 하여 경계하였다. 정치관에 대해서 작가는 왕도와 패도의 다름을 말하며 왕도를 고취하고 패도를 배격하고는, 고금의 여러 왕의 치란의 자취를 들고 있다.
♣
작품에 나타난 이상의 유교관, 불교관, 정치관 등으로 작자는 전등신화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남염부주지>가 현존하는 <금오신화> 다섯 작품 중에서 가장 독창적인 작품이 되는데, 김시습 자신은 <생육신문집>에서 이 작품을 ‘소설지제일야(小說之第一也)'(소설에서 가장 으뜸)이라고 평하고 있다.
이 작품 『남염부주지』는 저자 김시습 자신이 당시에 이루지 못한 유학자로서의 이상을 선비 박생에 투사하고 있다. 김시습은 장차 박생이 명부의 대왕이 된다는 선언을 통해서 조선 시대라는 배경에서 성취할 수 없었던 유교적 교화를 불교적 세계인 지옥에서 이룬다고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남염부주지’의 구도나 염라대왕과의 대화에서 드러나는 교의적 지식은 김시습이 철저히 불교를 공부했음을 의미한다. 결국 '남염부주지’는 불교의 세계관을 빌려서 유교적 이상을 설파할 수밖에 없는 역설과 유학자로서 이상을 꺾은 채 살아가야 했던 인간 김시습의 비애가 짙게 스며있는 작품이다.
소설의 제목으로 일컬어지는 '南炎浮洲志'라는 한자어 제목을 한글로 번역하면 <남쪽에 있는 지옥에 가다> 또는 <남쪽 염부주 이야기>로 풀이되는데, 이 소설에서 제목으로 사용되는 <염부주>라는 말은 염라국, 즉 불교의 우주관에서 볼 때 세계의 중앙에 있는 수미산을 둘러싸고 있는 사방의 바다 중 남쪽 바다를 염부주(炎浮洲)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우주 세계의 남쪽에서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이 항상 공중에 떠 있는 곳.”으로, 염라대왕이 있는 지옥을 의미한다.
- 사람이 죽은 뒤에 심판을 받는 곳.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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