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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새벽 빗자루들의 춤

by 언덕에서 2017. 7. 12.

 

 

 

새벽 빗자루들의 춤

 

 

 

 

 

 

 

 

 

고은의 시 <순간의 꽃>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1. 어떤 장례식

 

한 사람의 인생은 화장 후 한 줌 재가 되어서 정리되고 있었다. 국군묘지. 경남 산청에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은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 앞집 아저씨인 친구 부친이 전쟁 유공자였다는 사실도 그렇다. 나의 죽마고우인 상주(喪主)는 동일인인 전처와 두 번의 이혼을 당한 상태에서 천붕(天崩)을 맞이했다.

 고인은 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분이셨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의 내가 대기업 입사가 확정되었을 때 두 말 않고 회사에다 보증을 서주셨다. 그 이전에 돌아가신 내 아버님과의 우정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배신과 사기가 판을 치던 그 시절에 친척도 아닌, 세상을 떠난, 이웃의 아들에게 보증을 서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구십 두살까지 사셨으니 호상(好喪)이라고 할 수 있을 듯했으나 세 명의 딸은 통곡을 거듭했다. 어떤 이유든 아버지의 죽음에 '호(好)'자를 붙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독자(獨子)인 내 친구는 눈물 비슷한 것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고인은 10년 이상 치매를 앓으셨고, 아내와 자식들과 헤어진 아들은 혼자서 힘겹게 노부모를 봉양해야만 했다. 부친의 치매에 이어 작년부터는 모친의 치매가 시작되었는데, 힘든 직장 일에다 퇴근 후 집안일까지 시달린 친구는 치매를 앓는 부모님을 요양원으로 옮겼다. 문제는, 요양원으로 부모님을 모신 그날 아버님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여보! 내게 왜 말도 안하고 이렇게 가는 거요…….”

 핸드볼 공 크기의 항아리에 봉인된 뼛가루는 납골당에 봉안되었는데 치매 상태에서 갑자기 정신이 돌아 온 노모의 울음이 지리산 기슭에 번지고 있었다. 

 

 

2. 말 한마디  

 

반창회에 참석하라는 문자를 받고 해당 장소에 갔다. 식당 문을 여니 법무사를 하는 친구와 낮선 얼굴의 인물 한 명 그렇게 두 명이 식탁에 마주 앉아서 모임을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 낮선 이는 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다가와서 포옹을 청했다.

 남자들이 남을 만날 때 사용하는 인사의 오랜 관행인 악수(幄手)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빈손을 보임으로서 ‘나는 무기를 가지지 않았으니 너와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는 악수 그 이상의 표현인 포옹을 내게 청했고 나는 그제야 그를 알아보고 힘차게 안았다.

 “그래, 반갑구나!”

 계산해보니 그와 나는 무려 이십 오년 만에 만난 것이었다. 그동안 그를 생각하면 늘 뭔가 찝찝한 느낌이 남아있었다. 나의 불성실함이나 부족함 때문에 관계가 끊어졌을 것이라는 내 나름대로의 자책 때문이다. 그래서 그날 그에게 그런 기억과 미안함을 털어놓았다. 그는 자신의 삶이 바빴던 결과이니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고 오히려 자신이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는 와중에 다른 친구 A의 주사(酒邪)가 진행되고 있었다. 학창시절 수재였던 그는 취중이면 필요 이상의 표현으로 친구들을 희롱해서 놀리며 비하하는 경우가 많다. 그날도 그랬다.

 ‘이 반피들아!’

 이야기를 듣다가 스마트 폰에서 사전을 찾아 ‘반피’의 의미를 살펴보니 ‘하는 일이 온전하지 못하고 깔끔하지 못 한 사람을 일컫는 경상도 말로서 반풍수’ 라고 정의되어 있었다. A로부터 바보로 지목된 B는 얼굴을 붉히며 분을 삭히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모임의 시간이 흐르고 하나둘씩 자리를 뜨고 있었다. 말 한마디가 상대를 원수로 만들기도 하고, 반대의 경우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불필요한 언행이 필요 이상의 화(禍)를 만든다는 것이다. 과다한 음주는 인간의 정신을 황폐화시킨다.

 나이가 듦에 따라 친구라는 존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수명을 다하여 죽음을 앞둔 시간에서는 얼마나 많은 친구가 있어야 할까?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친구 H는 현재 존재하는 친구의 숫자가 행여 줄어들까 노심초사하는 부류다. 가령 그의 친구가 그에게 피해를 준다든가, 또는 배신하더라도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입장이다. 원리원칙을 따지고 살아가기에는 우리가 살아가야할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 순수하고 고운 마음씨에 대해서 박수를 치고 싶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소중하게 써야한다는 것이다. 쓸데없는 이들과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

 가령, 어떤 모임에서건 주사(酒邪)를 멈추지 않는 이를 만나는 경우가 그렇다. 술값계산과 뒤치다꺼리는 물론이고 이후 감정의 앙금도 남은 것을 확인할 때 과연 이런 만남의 지속이 가치가 있을까 자문하게 된다. 그리고 반대의 질문도 하게 된다. 그 시절 유행했던 노래가사를 떠올리면서다.

 ‘즐거운 학창시절, 돌이켜 생각하니 내 마음 옛날처럼 변함없었나.…….’

 

 

3. 학교가 보이는 창가

 

 

 

지금의 사무실로 자리를 옮긴지 석 달 가까이 된다. 서향 건물인데 아침에 창을 열면 대학교 캠퍼스와 담을 나란히 한 초등학교 운동장 두 곳이 한눈에 들어온다. 상쾌한 아침을 열게 되어 항상 감사한 마음이다. 특히 아침이 그런데, 8시 반 즈음 사무실에 도착하여 창문을 열면 초등학교 담벽 스피커에서 울러 퍼지는 동요가 나를 즐겁게 한다. 그 노래들을 혼자서 열심히 듣는 편인데 ‘아기염소’나 ‘숲속을 걸어요. ‘아빠 힘내세요, ‘새나라의 어린이’등 내가 아는 동요가 들리기도 한다.

 과거 도청과 법원 건물이었던 고건물을 모 사립대학교에서 구입하여 그 대학교 단과대학의 캠퍼스로 조성했는데 해당 건물 중 일부를 대학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 건물 뒤에다 초현실주의파 건축가가 디자인한 듯한 현대식 건축물이 조화를 이룬 사립대학교 캠퍼스는 아름다움의 묘한 조화를 느끼게 만든다. 나는 점심을 그 학교 구내식당에서 해결하는 편인데 푸릇푸릇한 대학생들 모습을 보노라면 나 자신 또한 몸과 마음이 젊어지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대학 근처 대로변에는 커피점이 즐비하다. 피로가 누적되는 오후에는 그곳에 가서 테이크 아웃(take out)이라는 것을 사들고 와서 사무실에서 마시기도 한다. 대학생을 상대하는 곳이라 가격이 저렴해서 지난주에 한잔에 천 원 하던 것이 이번 주에는 팔백 원으로 인하되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음을 띄운 그것을 한잔 마시면 피로가 싹 가시는 듯하다. 그러나 그곳 길을 걸으며 무심히 바라본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 후줄근한 중늙은이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라곤 한다. 그럴 때마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이에게 한마디 툭 던져본다.

 “청춘을 돌리도!”

 

 

4. 견비통

 

4년째 견비통을 앓고 있다. 유명한 의원, 병원, 대학병원, 용하다는 한의원 등 안 가본 곳이 없으나 그 모든 곳에서의 치료가 허사였다. 펜을 들고 종이에다 글을 적는 것은 물론, PC 키보드를 두드리는 일조차 쉽지 않아서 하루하루가 힘들기 짝이 없다. 특히 글을 마음대로 쓸 수 없다는 점은 가끔씩 나를 절망으로 빠뜨리곤 한다. 이후 나의 언행에서 근심이 묻어나왔는지 지인들로부터 ‘염세주의자’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연초에는 독감에 걸려 고생했는데, 병원에 가서 주사 맞고 약 먹으면 대개 일주일이면 낮던 감기를 무려 한달이나 앓게 되었다. 이후 목욕탕에 가서 체중을 달아보니 몸무게가 5kg나 빠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길에서 만나는 이웃마다 ‘너무 말랐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걱정을 해서 나 자신도 놀라곤 했는데 그것 때문에 건강염려증에 걸린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허리를 삐끗하게 되었다. 일어선 상태에서는 물론이고, 앉은 자세에서도 구두끈을 매기조차 어려웠다. 그러자 근심은 더욱 깊어져서 이러다가 산송장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근심과 걱정이 쌓여가고 생활의 의욕이 사라져 갔다.

 극심한 허리통증부터 치료해야겠다고 그러던 어느 날,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결심을 하고 이사한 집근처의 정형외과를 처음으로 찾아갔다. 허리 엑스레이 사진을 자세히 보던 의사 선생은 내게 말했다.

 “이 병은 치료만 잘 하면 낫는 병이고, 빠른 경우는 일주일 만에 완치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치료하겠습니다.”

 의사의 말에 반신반의했으나 신기하게도 일주일 후에 허리통증이 조금씩 가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니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4년째 앓고 있는 견비통도 나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그것이다. 그래서 매주 고주파치료와 도수치료라는 것을 그곳에서 받고 있는데, 의사로부터 팔을 기역자 자세로 해서 앞뒤로 흔드는 운동을 매일 1,000회 이상 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매일 팔을 상하로 천 번씩 흔들어야 한다니 그게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집 옆 공원을 걸으면서 팔을 위에서 아래로 흔들면서 걷기 시작했다. 견비통이 나을지 아닐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희망을 갖고 산다는 것이 중요하다. 누군가 이렇게 응원할지도 모르겠다.

 “브라보, 젊은 오빠!”

 

 

5. 초여름

 

 

 

 

사무실 인근에 위치한 대학교 근처 거리를 걷다보면 몸에 꽉 끼는 청바지를 입은 채 한손에는 아메리카노라고 부르는 커피를 들고 엉덩이를 흔들며 지나가는 여대생이나 반바지를 입은 채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히죽거리며 걸어가는 남학생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들을 볼 때마다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나 하는 생각과 20대 초.중반의 내 모습은 지금의 저들과 비교해서 어떤 형태에 해당될까를 생각하게 된다. 가령 열 명의 남학생들이 내 앞을 지나간다고 가정할 때 저 열 명 중에서 나는 어떤 이에 가까울까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몇 달 전 이사한 집 바로 옆에는 14만평이 넘는 크기의 대규모 공원이 있다. 틈만 나면 그곳을 걷는데 나무가 우거진 그늘마다 자리를 펴고 삼삼오오 누워서 신록을 즐기는 젊은이들을 만날 수 있다. 원색의 옷차림으로 푸른 잔디와 불어오는 바람을 즐기는 그들을 볼 때마다 걱정과 부러움을 동시에 느끼곤 한다. 불경기로 인해 일자리가 부족해서 '실업 대란'을 넘어 이제는 ‘청년 절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 집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두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도 취업 공부 뒷바라지 하느라 대입수험생 부모 이상으로 노심초사하며 두 아이를 상전 모시듯 대했다. 그런데 공원에서 매트를 깔고 여유와 낭만을 즐기는 이 젊은이들은 그런 근심에서 벗어난 이들인가 하는 궁금증과 그 시절 우리가 누리지 못했던 풍요를 누리고 있는 그들은 축복받은 세대가 아닌가 하는 상반된 생각이 그것이다.

 

 

6. 어떤 기억

 

그 공원에서는 젊은 부부가 벤츠 모양의 유아전동차에다 어린애를 태우고 리모컨으로 운전하며 산책하는 장면도 흔히 볼 수 있다. 유모차에 아기를 태워 공원을 산책한다든가 유아전동차에 아이를 싣고 휴일을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아파트가 보편화 되지 않았던 그 시절, 개인주택에 사는 이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휴일에도 근무하기를 강요하는 회사는 도무지 여유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요행히 시간이 나는 휴일이 있어 쉬는 기회가 생기면 방바닥에 몸을 누이고 지친 몸에다 잠을 청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30대 중반의 어느 날, 회사의 지시로 대도시의 변두리에 위치한 사회복지관에 매월 ‘봉사활동’을 가게 되었다. 빈곤한 환경의 조손가정, 결손가정 아이들과 유원지에 가서 식사를 함께 하거나 놀이기구를 함께 타며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 주는 일이 그것이었다. 이런 봉사활동에는 반드시 유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다들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점이지만 일회성 이벤트는 오히려 그 대상에게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즉, 키다리 아저씨가 몇 번 오다가 보이지 않으면 피구호자(client) 입장에서는 큰 상처를 입기 쉬운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러나 지엄한 회사의 명이라 어쩔 수 없지 않는가.

 피로에 지친 그 일요일에도 낯선 아이들을 향한 봉사활동이 진행되었다. 그날의 할일(?)도 점심식사와 음료 및 다과 등을 준비하여 아이들과 함께 놀이기구를 타며 놀아주는 일이었다. 후배 한 명이 슬픈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이런 것,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잖아요…….”

 

 

 

 

 

7.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이사하다 책장 정리를 다시 하면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라는 오래된 책을 발견하였다. 1976년 문예출판사. 차경아 역……. 표제의 수필은 고2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었다. 잊을 수 없는 구절이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책을 펼치니 역시 만년필로 줄을 그은 아래의 부분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 ...아무도 살지 않는 고궁, 그 고궁의 벽에서는 흙덩이가 이 떨어지고, 창문의 삭은 나무 위에서는 "아이쎄여, 내 너를 사랑하노라……."라는 거의 알아보기 어려운 글귀가 쓰여 있음을 볼 때.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편지에는 이런 사연이 쓰여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소행(所行)들로 인해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지새웠는지 모른다. ……."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하나의 치기(稚氣)어린 장난, 아니면 거짓말, 아니면 연애 사건이었을까. 이제는 그 숱한 허물들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아버지는 그로 인해 가슴을 태우셨던 것이다.'

 

 

 

 김진섭의 번역문이 실렸던 국어 교과서에는 '안톤 시냐크'로, 차경아의 번역서에는 '안톤 슈낙'으로 번역되었던 그 남자 'Anton Schnack'은 어떤 사람일까?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가까운 '칼'이란 소읍(小邑)에서 만년을 보낸 안톤 슈낙은 독일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지방 작가라고 한다. 이 무명작가는 교과서에 실린 명문 하나 때문에 어느 위대한 문호 못지않게 우리 가슴 속에 영원히 자리하고 있는데, 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교과서에서 없어진지 오래라고 하는 것은 나를 슬프게 한다. 어떤 시인은 ‘이 글을 대하지 못하게 된 요즘의 학생들은 참으로 불쌍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디든지 칼의 양날은 존재한다. 1892년생인 이 작가는 1, 2차대전에 참전했는데 2차대전이 끝나는 1945년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다시 작품 활동을 했다고 전해진다. 2차대전이 1939년에 시작되었으니 그는 오십에 가까운 나이에 또 참전한 셈인데 아마도 고위직의 직업군인이거나 나치에 동조한 확신범 형의 문사(文士)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독일 문단의 주류가 그를 외면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는지? 세상은 아이러니와 또 다른 아이러니가 모여 뭉쳐진 교묘한 집합체에 불과하다.

 

 

 

8. 가족, 운명적인 너무나 운명적인...

 

 

딸아이는 사춘기를 혹독하게 보내어서 오랜 시간 가족을 힘들게 만들었다. 아버지로서 어린 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때문에 많은 고통을 안고 살았다고 고백해야겠다. 그러나 열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는 자신만의 개성으로 세상을 열고 있는 아이를 이해할 수 있는 단계에 나 자신이 도달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이 생각난다.

 당신들이 낳은 자식들이 무식하다는 이유로 두 분을 예시하며 당신들을 실망시킬 때마다 얼마나 좌절하셨을까. 자식들은 배웠다는 객기와 우월감에서 부모님의 낡은 생각을 조롱하는 일이 예사였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우리의 어리석은 행동을 그럴 수 있는 행동으로 이해하려 하셨다.

 아아, 나이가 드는 증거인지 모르겠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님과 나의 마지막 대화가 가끔씩 생각난다.

 당신의 몸이 너무 아픈 관계로 앞으로 얼마 살지 못할 것 같다는 말씀과 너희들 내가 없어도 괜찮겠느냐는 질문, 너희 형제들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당부, 당신에게 시집와 고생 많이 한 네 엄마를 이제는 너희에게 부탁한다는 말씀…….

 아버님께서 남기신 언어, 그 어느 한 가지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 이런 기억은 40년 전의 장면임에도 어제 일처럼 생생해서 생각이 계속되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난다.

 

 

9. 그간 모르고 살았던 것

 

 

 

 이른 아침 새벽길을 걸어본 적이 있는가? 밝아오는 여명 속에 그간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새벽의 빈 거리에서 폐지를 수레에 담는 노파는 승용차가 골목으로 들어오면 바짝 벽에 붙어서고, 무거운 가방을 든 채 버스를 기다리는 나이든 공시생, 거리를 쓸고 있는 미화원, 전동수레를 운전하는 야쿠르트 아줌마, 신문 배달하는 중년 여성, 술이 깨지 않아 담벼락에 기대어 앉아 있는 청년, 무슨 이유인지 눈물을 흘리며 버스를 타는 아가씨…….

 지하철 계단 옆의 엘리베이터나 성당이나 교회당마다 자리 잡은 엘리베이터의 설치 이유를 그간 실감하지 못했다. 단지 막연하게 노인이나 장애인을 배려하기 위해서 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요즘은 그 정확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 자신, 몸이 불편해지자 그것들의 존재 이유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부끄럽게도 그간 모르고 살았던 것이 어찌 이리도 많은지 모르겠다.

 대낮에 전철, 즉 도시철도를 탈 때면 마치 ‘죽음의 열차’를 탄 듯한 느낌을 갖곤 한다. 열차 안에는 대부분 60대를 넘은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자연적으로 받게 되는 어두운 느낌이 그것이다. 나는 시내 중심부에서 전철을 타는데 먼저 앉기 위해 야생의 짐승처럼 빠른 동작으로 자리로 돌진하는 또래의 중년 때문에 민망해지기 일쑤다.

 그래서 이제는 몇 가지 기준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기를 스스로 다짐하면서 전철을 타기로 했다. 설령 빈자리가 있더라도 절대 자리에 앉지 않겠다는 다짐이 그것이다. 그날도 나는 서있었다. 내 옆에는 칠십이 넘어 보이는 신사 한 분과 책을 읽는 삼십대의 젊은이가 나란히 서있었다. 자리가 비자 노인은 책 읽고 있는 젊은이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 장면을 보면서 그간 나이 든다는 것을 비관적으로 생각해왔던 점이 부끄러워졌다.

 

 

 

 

 

10. 새벽 빗자루들의 춤

 

 

 

최근에 읽은 빅터 플랭클☜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는 지옥과도 같은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와 그 경험을 책으로 옮겼다. 그는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반복되는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는 것, 즉 고결한 사람이 되느냐, 인간의 존엄을 잃고 짐승 같이 되느냐는 것은 그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 그 어떤 시련이 오더라도 인간에게는 단 한 가지 자유, 즉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삶의 길을 선택할 정신의 자유만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그 자유를 잃게 되면 물리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홀로코스트 경험 같은 끔찍한 시련도 자신의 도덕적 가치를 실현할 중요한 가치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여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간 모르고 살았던 것을 되새겨 보며 하루를 살자. 새벽 빗자루들이 춤추듯 새로움을 만들어 보자.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은 어제 죽었던 이가 애타게 갈망했던 그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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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플랭클 : 190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빈 대학에서 의학박사와 철학박사를 받았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이은 정신요법 제 3학파라 불리는 로고테라피 학파를 창시했다. 유태인이었던 그는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죽음 속에서 자아를 성찰하고, 인간 존엄성의 위대함을 몸소 체험하였다. 저서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서>, <의미를 향한 소리 없는 절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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