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소설 『남원고사(南原古詞)』
조선 후기의 작자 미상의 <춘향전> 이본(異本)으로 5권 5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문 필사본인데, 필사 시기는 1권이 ‘세갑자(歲甲子) 하뉵월’, 2권이 ‘셰갑자 뉴월 념오’, 3권이 ‘셰갑자 칠월 샹’, 4권이 ‘기사(己巳) 구월 념오’, 5권이 ‘기사 구월 념팔’로 되어 있어, 1864년(고종 1)에서 1869년(고종 6)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분량이 약 10만 자 정도가 되므로, 20세기 이전의 <춘향전>으로는 가장 장편이다. 그래서 완판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보다 약 30년이 앞서며, 작품의 양도 두 배 이상이 되는 이 작품을 <춘향전>을 대표하는 대본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19세기에 국문으로 필사되어 서울 누동, 즉 오늘날 종로구 와룡동과 묘동에 걸친 지역의 세책점1(貰冊店)에서 빌려 주던 소설 『남원고사』는 당대에 유행한 시조나 잡가, 민요, 한시, 가사, 소설 등의 일부나 전문과 함께 차림새, 실내 장식, 놀이, 유행어 같은 문화 정보를 풍성하게 담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남원 부사의 아들인 도령은 방자와 광한루 나들이를 하다가 그네 타는 춘향을 발견한다. 방자는 멀리서 그네 뛰는 춘향을 보고 양반 집 규수가 추천2하러 왔나 보다고 하자, 춘정3을 느낀 도령은 바로 이르라고 하며 자신의 급한 마음을 노출시킨다.
참다못한 도령이 방자에게, 서울에 돌아가면 500냥 어치의 선물을 주겠다고 한 연후에야 비로소 방자는 본 읍 기생 월매의 딸 춘향이라고 일러준다. 이에 도령은 허튼말로 방자와 형제를 맺자고 하며 ‘방자 동생’이라고 하지만, 방자가 응하지 않자 마침내 ‘방자 형님’이라고 애걸하기에 이른다.
도령의 구혼을 받은 춘향은 도령과 인연을 맺을 때에 뒷날 약속을 어기면 증거물로 삼기 위해 불망기4를 받고 몸을 허락한다. 도령과 춘향은 몸을 섞고 결혼을 약속하는 단계까지 가지만, 도령은 아버지의 이임에 따라 서울로 떠나게 된다. 춘향은 도령에게 자신을 데려가지 못한다면 차라리 자기를 죽이고 떠나라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령이 자기를 버리지 않기로 약속한 사실을 문서로 써 준 불망기를 가지고 신임 남원 원님에게 알리겠다고 한다. 그래도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전라감영에 가서 원정5(原情)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재판에서 낙송6(落訟)을 하면 한양으로 올라가 서울의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알리며 돈을 한 푼씩 얻어 구걸한 돈으로 종이를 사서 그 사연을 적고, 그 종이를 임금이 능행(陵行)을 할 때 하소연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 임금도 남성이라 도령의 편을 들면 자살을 한 뒤 원조(怨鳥)가 되어 도령의 신방 앞에서 한스러운 울음을 울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을 터이니 한양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 급제한 뒤에 자신을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이렇게 춘향과 도령은 헤어진다. 춘향이 도령과 이별하고 빈방을 지키는 공방(空房) 사설 장면에서는 “약수 삼천리 못 건넌다 일렀으나 님 계신 데 약수로다. 애고애고 설운지고. 이 몸이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겼으니 삼생의 연분이며 하늘 마출 일이로다. 나하나 소년이오 님하나 날 괴실 제 이 마음 이 사랑 견줄 데 전혀 없네 …” 하며 자탄한다.
남원 고을에 새로운 부사가 도착한다. 신임 부사는 춘향에게 수청을 요구하나 춘향은 여종을 대신 보내어 괘씸죄로 하옥된다. 어사가 된 도령은 변장하여 남원으로 돌아온다. 어사가 변부사를 봉고파출(封庫罷黜)해 감영에 보고하며, 춘향과 월매, 향단을 먼저 서울로 올려 보낸다. 그 뒤 어사는 서울에 올라와 왕을 뵈옵고 춘향의 사실을 고한다. 이에 왕이 춘향에게 정렬부인(貞烈夫人)이라는 직첩을 내리니, 어사는 양친에게 뜻을 물은 다음 춘향과 육례(六禮)를 갖춘 혼사를 치른다.
이후 어사는 육경(六卿)의 벼슬을 하고 다섯 자녀를 두며 춘향과 화목한 평생을 보낸다.
이 소설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전통적 <춘향전>인 <별춘향전> 계통을 따르고 있지만, 구체적 행문을 비롯한 부분 장면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판소리사설의 구성 원리를 이용하여 장편소설화한 작품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서두의 본문은 “천하 명산 오악지중에 형산이 높고 높다. 당시절의 젊은 중이 경문이 능통하므로 용궁의 봉명하고 석교상 늦은 봄바람에 팔선녀 희롱한 죄로 환생인간하여 …”로 시작한다. 이 서두는 <구운몽>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작가는 인간의 부귀와 공명이 결국 헛된 것이라는 도가적 분위기를 밑바탕으로 깔면서도 춘향의 기이한 사랑과 의미 있는 삶이 이러한 무상감을 극복할 수 있다는 쪽으로 전체 이야기를 유도한다.
춘향이 도령과 이별하고 빈방을 지키는 공방(空房) 사설 부분은 정철(鄭澈)의 가사인 <사미인곡(思美人曲)>의 전편을 완전히 수용하고 있다. 이처럼 확장된 내용을 보여 주는 이 작품은, 삽입 가요의 수용을 장황할 정도로 확대하고 있다.
전반적인 서술 구조를 본다면, 이 작품은 창작 의식이 뚜렷한 작가에 의해 판소리 사설의 구성 원리를 이용한 장편 소설화가 이루어진 <춘향전>의 이본이다. 『남원고사』의 작가는 고급 문예인 한문학과 대중 문예인 국문 문학과 구비 문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가진 이로 판단된다. 그는 그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민족 문학의 다양한 소재를 최대한 삽입시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로 인해, 광대들에 의해 불리는 전통 판소리 <춘향가> 보다 더 많은 재담과 가요와 고사성어를 수용하면서도 사건의 전체적 흐름도 일관성이 있고 합리적인 이야기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전반부에서는 기생 춘향의 행동이 강조되고, 후반부에서는 열녀 춘향의 행동이 강조되지만, 이는 도령을 만날 때는 춘향이 기생이고, 변부사를 만날 때는 대비정속7(代婢定屬)한 것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춘향의 신분은 방자의 표현대로 기생 월매의 딸이다. 춘향은 스스로 자신이 기생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도령과 인연을 맺을 때에 뒷날 약속을 어기면 증거물로 삼기 위해 불망기를 받고 몸을 허락한다.
♣
전반부의 기생으로서의 춘향의 행동은 뜨거운 육체적 사랑을 표현함에 중심이 있다면, 후반부의 규수로서의 춘향의 행동은 강인한 정신적 사랑을 표현함에 중심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 서사 구조로 보면 사랑의 두 가지 속성이 있기에 뚜렷하게 주제를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춘향의 성이 김(金)으로 되어 있어 다른 <춘향전>이 성(成)․서(徐)로 된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또 인물들 중에는 방자․향단․군노(軍奴)․패두(牌頭)와 같은 하천 인물 및 지방 관아의 하급관리들의 심리와 행동이 개성 있게 표현되어 있다.
이 작품의 개성은 그 이후에 경판 35장본 <춘향전>을 비롯한 목판본과 최남선의 <고본춘향전> 등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본의 이 책은 파리의 동양어학교에 있으며, 이 계통에 속하는 이본이 일본 동경대학 도서관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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