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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을 읽다

송강 정철의 가사, 시조집 『송강가사(松江歌辭)』

by 언덕에서 2017. 5. 3.

 

 

 

송강 정철의 가사, 시조집 『송강가사(松江歌辭)』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ㆍ문인인 송강 정철(鄭澈.1536.중종 31∼1593.선조 26)의 가사와 시조를 수록한 시가집이다.  『송강가사』는 필사본으로 전하는 것도 있으나 온전하지 못한데, 목판본으로 황주본ㆍ의성본ㆍ관북본ㆍ성주본ㆍ관서본의 5종류가 알려져 있다. 이 중 의성본과 관북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황주본은 1690년(숙종 16)부터 1696년 사이에 이계상(李季祥)이 황주에서 간행한 책이다. 모두 26장의 완책으로,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장진주사>의 순서로 실린 가사 5편이 전한다.

 그 이하에 ‘단가’라는 제목을 두지 않은 51수의 단가와, 이선의 발문 등을 싣고 있다. 이선의 발문이 있어 ‘이선본(李選本)’이라고도 하며, 소장자인 방종현(方鍾鉉)의 호를 빌려 ‘일사본(一蓑本)’이라고도 한다.

 현전하지 않는 의성본과 관북본은 모두 그의 현손인 호(澔)가 간행한 책들이다. 의성본은 성주본의 발문에 의하면 호가 의성현감으로 있었던 1696년 5월부터 1698년 1월 사이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관북본은 호가 관북관찰사로 있었던 1704년 4월부터 이듬해 1월 사이에 간행한 것임을 관서본의 발문에서 알 수 있을 뿐이다.

 관서본은 의성본과 관북본을 간행한 호의 손자인 실(實)이 1768년에 관서지방에서 간행한 책이다. 총 23장에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장진주사> 및 단가 5수와 이선의 발문, 정실의 후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관서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관동별곡(關東別曲)

 1580년(선조 13)에 지은 가사로 그의 나이 45세 되는 정월에 강원도 관찰사로 제수되었을 때 원주에 부임하여 3월에 이르러 내 · 외 · 해금강과 관동팔경을 두루 유람하고 그 절경을 노래한 가사다.

 제1단에서 강원도에 부임하여 원주행의 모습을 보여주고, 제2단에서 내금강의 풍치, 즉 만폭동 · 금강대 · 진헐대 · 개심대 · 화룡연 · 십이폭포를 노래하고, 제3단에서는 외 · 해금강과 동해안에서의 유람을, 즉 총석정 · 삼일포 · 의상대에서의 일출, 경포대 · 죽서루 · 망양정에서의 동해를 바라본 경치를 읊었고, 제4단에서는 작자의 풍류를 꿈속에서 신선이 되어 노니는 것에 비겨 노래하고 있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치질 못할 고질병(泉石膏: 천석고황)이 되어, 창평에서 한가로이 지내고 있었는데, 8백 리나 되는 강원도 관찰사의 직분을 맡겨 주시니, 아아, 임금님의 은혜야말로 갈수록 그지없다. 경북궁 서문인 연추문으로 달려들어가 경회루 남쪽 문을 바라보며 임금님께 하직을 하고 물러나니, 이미 임금님의 신표인 옥절이 앞에 서 있다.

 평구역(양주)에서 말을 갈아 타고 흑수(여주)로 돌아드니, 섬강(원주)는 어디인가? 치악산(원주)이 여기로구나.

소양강의 흘러내리는 물이 어디로 흘러든다는 말인가. 임금 계신 한강으로 흘러들겠지? 임금 곁을 떠나는 외로운 신하가 서울을 떠나매 우국지정으로 백발이 많기도 많구나.

 동주(철원)의 하룻밤을 겨우 새우고(날이 새자마자) 북관정에 오르니, 임금 계신 서울의 삼각산 제일 높은 봉우리가 웬만하면 보일 것도 같구나. 옛날 태봉국 궁예왕의 대궐 터였던 곳에 까막까치가 지저귀니, 한 나라의 흥하고 망하던 역사를 아느냐? 모르느냐?

이 곳이 옛날 한()나라에 있던 '회양'이라는 이름과 공교롭게도 같구나. 중국의 회양 태수(太守)로 선정을 베풀었다는 급장유의 풍채를 이 곳 회양에서 다시 볼 것이 아닌가?

(이하 생략)

 

 

● 사미인곡(思美人曲)

 1585년(선조 18)에 지은 가사(歌辭)로 <속미인곡>(續美人曲)과 동곡이교(同曲異巧)의 작품으로, 송강 자신도 「전후미인곡(前後美人曲)」이라고 칭하였다. 작자가 50세 되던 해에 동인이 합세하여 서인을 공격하는 바람에 서인에 앞장을 섰던 그는 부득이 조정을 물러나 4년 동안 고양 · 창평 등지에서 불우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이 작품은 창평에서 칩거하던 당시의 쓴 작품이다. 정확한 저작 연대는 알 수 없고 1587(선조 20)~1589(선조 22)년 사이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작품은 초야에 묻혀 임금을 연모하는 외로운 신하의 정한을, 한 여인이 그 남편을 생이별하고 연모하는 마음에 비유하여 쓴 것으로 자신의 충정을 우의적으로 고백한 작품이다.

「고신원녀기지동야(孤臣怨女其志同也)」라고 한 바와 같이 원녀(怨女)의 정한으로써 외로운 신하의 연군 · 충정을 비유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이 몸이 태어날 때에 임을 좇아서 태어나니, 이것은 한평생을 함께 살 인연이며, 그러니 어찌 하늘이 모를 일이던가? 나 오직 임만을 위하여 젊어있고, 임은 오로지 나를 사랑하시니, 이 마음과 이 사랑을 견줄 곳이 다시 없다. 평생에 원하되 임과 함께 살아가려 하였더니, 늙어서 무슨 일로 외따로 두고 보고 싶어하는가.

 엊그제 임을 모시고 달나라의 궁궐에 올라 있었더니, 그 동안에 어찌하여 속세(昌平을 말함)에 내려왔는가. 내려올 때에 빗은 머리가 헝클어진 지 삼년일세. 연지와 분이 있네마는 누구를 위하여 곱게 단장할까. 마음에 맺힌 근심이 겹겹으로 쌓여 있어 짓는 것이 한숨이요, 흐르는 것은 눈물이라.

 인생은 한정이 있는데, 근심은 한이 없다. 무정한 세월은 물 흐르듯 흘러가는구나. 더워졌다 서늘해졌다 하는 계절의 순환이 때를 알아 지나갔다가는 이내 다시 돌아오니, 듣고 보고 하는 가운데 느낄 일도 많기도 많구나.

(이하 생략)

 

 

● 성산별곡(星山別曲)

 1560년(명종 15)에 지은 가사로 이 작품은 송강이 16세 때부터 27세에 등과할 때까지 10년간 낙향해 있던 곳인 성산(星山)이란 지명을 제목으로 하여 쓴 작품이다.

 성산은 당시의 창평 지곡리 성산(별뫼)이며 현재로는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해당한다. 성산에 내려간 송강은 사촌(沙村) 김윤제에게 수학하였다. 이래 송강과 함께 공부한, 송강보다 1년 연장인 사촌(沙村)의 종질되는 김성원이 은퇴하여 식영정과 서하당 등 정자를 지었다. <성산별곡>은 이 서하당과 식영정을 중심으로 성산의 임천(林泉) 사이를 소요하던 생활과 특히 김성원을 경모하여 쓴 작품이다. 저작연대에 대해서 종래에는 <사미인곡> <속미인곡>의 연대와 같은 것으로 추정했으나, 김사엽이 발견한 <서하당유고>에 의해 그 저작연대가 바로잡아졌다.

어떤 지나가는 나그네가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의 주인아 내 말을 들어 보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이 많거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어가고 아니 나오시는가 

솔뿌리를 다시 쓸고 대나무 침대에 자리를 보아 

잠시 올라앉아 어떤가 하고 다시 보니 

하늘가에 떠 있는 구름이 서석을 집을 삼아 

나가는 듯하다가 들어가는 모습이 주인과 어떠한가 

시내의 흰 물결이 정자 앞에 둘러 있으니 

하늘의 은하수를 누가 베어 내어 

잇는 듯 펼쳐 놓은 듯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이하 생략)

 

 

● 속미인곡(續美人曲)

 작자가 관직에서 물러나 고양에 퇴거하였다가 창평으로 내려가 그의 처외척인 집성원(集成遠)의 산정에서 세월을 보내면서 나라일과 임금의 은혜를 생각하며 지은 것으로 <사미인곡>의 속편이다. <사미인곡>과 마찬가지로 「고신연주지사(孤臣戀主之詞)」이나, 남편과 이별하고 지상으로 내려와서, 그리워하는 애절한 마음을 노래했다. 내용에 따라 가사 전체를 5단으로 나눌 수 있는데, 두 선녀를 갑녀 · 을녀라 가칭하면, ① 갑녀가 을녀를 만나 사정을 묻는다 → ② 을녀가 사정을 이야기 한다 → ③ 갑녀가 위로의 말을 한다 → ④ 을녀의 임에 대한 연모와 애달픈 사정 → ⑤ 갑녀의 맺음말로 구분된다.

〈사미인곡〉과 마찬가지로 연군(戀君)의 충정을 읊었다. 서포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송강의 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했고, 홍만종도 <순오지(旬五志)〉에서 뛰어난 글이라 격찬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甲女] 저기 가는 저 젊은 여인, 본 듯도 하구나. 임금 계시는 서울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해가 다 져서 저물었는데, 누구를 만나 보러 가시는가?

[乙女] 아, 너로구나, 내 사정 이야기를 들어보오, 내 생김새와 내 거동이 임께서 사랑함직할까마는 어쩐지 나를 보시고 너로구나 하고 특별히 여기시기에, 나도 임을 믿어 딴 생각이 전혀 없어 응석과 아양을 부리며 귀찮게 굴었던지 반가워하시는 낯빛이 옛날과 어찌 다르신고? 누워 생각하고 일어나 앉아 헤아려 보니, 내 몸이 지은 죄 산같이 쌓였으니, 하늘을 원망하며 사람을 탓하겠는가? 서러워서 여러 가지 일을 풀어내어 낱낱이 헤아려 보니, 운명이로다.

[甲女] 그렇게는 생각하지 마오.

[乙女] 마음속에 맺힌 일이 있습니다. 예전에 임을 모시어서 임의 일을 내가 잘 아는데, 물과 같이 연약한 체질이 편하실 적이 몇 날일꼬? 이른 봄날의 추위와 여름철의 무더위는 어떻게 지내시며, 가을날, 겨울날은 누가 모셨는고? 자릿조반과 아침저녁 진지는 예전과 같이 잘 잡수시는가? 기나긴 밤에 잠은 어떻게 주무시는고?

 임 계신 곳의 소식을 어떻게 해서라도 알려고 하니, 오늘도 거의 저물었구나. 내일이나 임의 소식 전해줄 사람이 올까? 내 마음 둘 곳이 없다. 어디로 가자는 말인고? 나무, 바위 등을 잡기도 하고 밀기도 하면서 높은 산에 올라긴, 구름은 물론이거니와 안개는 또 무슨 일로 저렇게 끼어 있는고? 산천이 어두운데 일월을 어떻게 바라보며, 눈앞의 가까운 곳도 모르는데 천 리나 되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으랴? 차라리 물가에 가서 뱃길이나 보려고 하니, 바람과 물결로 어수선하게 되었구나. 뱃사공은 어디가고. 빈 배만 걸렸는고? 강가에 혼자 서서 지는 해를 굽어보니, 임 계신 곳 소식이 더욱 아득하구나.

 초가집 찬 잠자리에 한밤중이 되었으니, 벽 가운데 걸려있는 등불은 누구를 위하여 밝은고? 산을 오르내리고 강가를 헤매며 시름없이 오락가락하니, 힘에 지쳐 풋잠이 잠깐 들어, 정성이 지극하여 꿈에 임을 보니, 옥과 같이 곱던 얼굴이 반 넘어 늙었구나. 마음 속에 품은 생각을 실컷 사뢰려고 하였더니 눈물이 쏟아져 밀인들 어찌 하며, 정회(情懷)도 못 다 풀어 목마저 메니, 방정맞은 닭소리에 잠은 어찌 깨었던고?

 아, 헛된 일이로다. 내 임이 어디 갔는고? 꿈결에 일어나 앉아 창문을 열고 바라보니, 가엾은 그림자만이 나를 따라 있을 뿐이로다. 차라리 죽어서 지는 달이나 되어 임 계신 창안에 환하게 비치리라.

[甲女] 각시님, 달은 그만 두고 궂은비나 되십시오.

 

● 장진주사(將進酒辭)

 권주가사(歌酒歌辭)인데 사설시조(辭說時調)형으로 보는 이도 있다. <순오지(旬五志)〉에 이백(李白) · 이하(李賀) · 두보(杜甫)의 명시(名時)인 〈장진주(將進酒)〉와 시상에 있어서는 동궤라고 했다. 작품 속에는 술꾼으로 이름 높고 또 향락주의로 호방한 송강의 성격이 나타나 있고 허무와 적막 · 애수의 정조가 서려 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술 한 잔 먹세그려.

 꽃을 꺾어 셈하며 다함없이 먹세그려. 이 몸이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을 덮어 졸라 메어 가나, 좋은 상여에 만 사람이 울며 따라 가나, 억새와 속새와 떡갈나무와 백양 숲 속에 가기만 하면 누런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에 회오리바람이 불 때 누가 한 잔 먹자고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들이 휘파람을 불며 놀 때 가서야 뉘우친들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은가?

 

 

● 훈민가(訓民歌)

 연시조 16수로 작가가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시 백성들을 교유 · 계몽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효종 9년에 간행된 김정국 편저의 〈경민편(警民編)〉 부록에 의하면, 이작품은 송나라 신종 때의 진고령이 지은 〈선거권유문(仙居勸諭文)〉 13조목을 추가하여 시조의 형식으로 해설한 것이다. 유교 윤리를 주제로 했으며 세련된 기교를 엿볼 수 있다. 국문학상 중요한 작품으로 전문은 다음과 같다. 

  (1수)

 아버님께서 나를 낳으시고, 어머님께서 나를 기르시니

 부모님이 아니시었다면 이 몸이 태어나 살 수 있었을까

 하늘같이 끝이 없는 은덕을 어떻게 다 갚으리오까

 

 (2수)

 임금과 백성의 사이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큰데

 나의 서러운 일까지 다 알려고 마음을 쓰시고, 헤아리니

 우리들 살진 미나리를 어찌 혼자 먹을 수 있으리오

 

 (3수)

 형아, 아우야, 네 살을 만져 보아라

 누구에게서 태어났기에 모습까지 같은 것인가

 같은 젖을 먹고 태어났으니 딴 마음 먹지 마라.

 

 (4수)

 부모님께서 살아가실 때 섬기는 일을 다하여라

 돌아가신 뒤에 아무리 애닯다고 한들 어찌하겠는가

 평생에 다시 할 수 없는 일이 부모님을 섬기는 일이 이것뿐인가 하노라

 

 (5수)

 (하늘이) 한 몸을 둘로 나누어 부부를 만드셨는데

 살아있을 때는 함께 살면서 늙고 죽으면 같은 곳으로 가니

 어디에서 망령된 것이 눈을 흘기려고 하는가

 

-- 이하 (6수) ~ (16수) 생략

 


 

 정리하자면, <송강가사>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 중 <관동별곡>은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1580년(선조 13) 원주에 부임하여 내외해금강과 관동팔경을 두루 유람하고, 그 절경을 노래한 것이다. <사미인곡><속미인곡>은 임금을 사모하는 정성을 남편과 이별한 여인의 심정에 의탁하여 쓴 가사이다. 그리고 정철이 생존하였던 당시의 문인인 김성원이 세운 서하당ㆍ식영정을 중심으로 계절마다 변하는 경치를 읊은 작품이 <성산별곡>이다.

 이들은 조선시대의 가사문학을 대표할 만한 작품들이다. 이들 가사를 수록하고 있는 <송강가사>는 일찍이 국문학 자료집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이미 기본적인 고전의 하나가 되어 있다.

 일찍이 송강의 작품에 대하여 홍만종은 <순오지>에서,

 “형용의 묘나 말의 기이함은 참으로 악보의 절조임에 틀림없다.”

고 극찬하였고, 이수광도 <지봉유설>에서,

 “여러 노래가 세상에 성행하나, 오늘에서는 송순과 정철의 작품이 가장 뛰어나다.”고 호평하였듯이, 역대의 여러 문인ㆍ학자들은 한결같이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송강은 가사와 단가에 두루 능하였으나, 특히 가사 작품은 그의 독특한 문체와 수사 및 수식으로 가히 독보적인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정철(鄭澈.1536.12.6.중종 31∼1593. 선조 26)  : 조선 선조 때 문신. 서울 생. 자 계함(季涵), 호 송강(松江). 시호(諡號) 문청(文淸). 10세에 을사사화로 유배당한 부모를 따라 관북 정평으로 갔었고, 16세에 풀리어 그 선영(先塋)이 있는 전남 담양군 창평면 성산(星山)으로 옮아가 명종17년까지 11년간 다감한 청소년 시절을 성산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자라면서 감안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송순(宋純) 등에게 수학했다.

 25세에 <성산별곡>을 짓고 27세에 문과에 급제, 45세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해 가사 <관동별곡>과 단가 <훈민가> 16수를 지었다. 48세에 예조판서, 50세에 퇴임하고 창평으로 돌아온 후 4년간 은거생활을 하면서 시작에 전념,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지었다. 54세에 다시 우의정, 55세에 좌의정이 되었으나, 서인의 거두로서, 당쟁에 휘말려 동인들의 세력에 밀려 명천, 진주, 강계 등지로 귀양가면서 오랜 유배생활을 겪었다. 57세에 다시 벼슬을 하다 58세에 강화에서 작고하였다. 가사문학의 제1인자. <훈민가> 16수 등 93 수의 시조가 전한다.

 

가사 : <문학> 조선 초기에 나타난, 시가와 산문 중간 형태의 문학, 형식은 주로 4음보의 율문(律文)으로, 3ㆍ4조 또는 4ㆍ4조를 기조로 하며, 행수(行數)에는 제한이 없다. 마지막 행이 시조의 종장과 같은 형식인 것을 정격(正格), 그렇지 않은 것을 변격(變格)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