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현 시화잡록집 『역옹패설(櫟翁稗說)』
『역옹패설(櫟翁稗說)』은 고려 말기에 이제현1(李齊賢)이 지은 시화ㆍ잡록집으로 4권 1책의 목판본으로 알려져 있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56세에 벼슬길에서 은퇴하여 자기 집에 거처하면서 저술한 책이다. 고려시대에 이 책이 간행되었을 것이나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현재 온전한 모습으로 열람할 수 있는 것으로는 1814년(순조 14) 경주에 거주하는 후손들에 의하여 간행된 <익재난고(益齋亂藁)>에 붙어 있는 것이 있다.
이 책을 ‘낙옹비설’이라 읽는 것이 저자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으나, ‘역옹패설’로 읽는 것이 현재는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 책의 체재는 전집ㆍ후집으로 나누어 각 집이 다시 1ㆍ2권으로 되어 있어, 모두 합하면 4권이 되는 셈이다.
전집에는 저자 자신의 서문이 있고, 권1에 17조, 권2에 43조의 역사ㆍ인물일화ㆍ골계2(滑稽) 등이 있다. 후집에는 저자 자신의 서문과 권1에 28조, 권2에 25조의 시화와 세태담(世態談)이 있다.
이제현 초상(국보110호)
이 책에 나타난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제현은 고려가 몽고, 즉 원나라로부터 치욕을 당한 것에 대해 반성하는 한 방법으로 부당한 사대주의에 저항하고 있다. 전집 권1에서 그는 조정의 중신이 몽고어를 능숙히 구사할 줄 아는 역관 출신이라 해도 공식석상인 합좌소(合坐所)에서 역관의 통역도 없이 직접 몽고어로 원나라의 사신과 대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민족자존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었던 그의 주체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둘째, 그는 전통성, 즉 민심의 기반이 없는 위조3(僞朝)의 영화로운 생활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삼별초 정권을 부정적 입장으로 보아 위조라고 생각한 듯하다. 즉 삼별초가 고려의 백성들을 협박하고 부녀를 강제로 이끌어 진도에서 비상 정부를 구축하였으므로 민심을 거역한 위조라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문감이라는 인물이 삼별초 정권에서 승선4이 되어 국정을 맡게 되자, 위조에서의 부귀보다 죽음으로써 몸을 깨끗이 지키고자 하였던 행위를 마땅한 일이라 판단했다.
셋째, 이제현은 무신정권의 전횡을 폭로하고 그 폐단을 고발하고 있다. 이제현은 오언절구의 시를 인용하여 주먹바람(拳風), 즉 무신의 완력이 의정부를 장악하는 공포정치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낸다. 이러한 현실인식 태도는 무인정권의 폐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 같다. 학자들이 거의 다 무신의 난이 일어나자 생명 보존을 위하여 깊은 산으로 찾아들어 중이 되는 이가 많았다. 그래서 문풍(文風)이 진작되는 시점이 되어도 학생들이 글을 배울 만한 스승이 없어 도피한 학자였던 중들을 찾아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이 같은 지적은 무신집권기가 초래한 반문화적 폐해를 단적으로 밝혀준 좋은 예일 것이다.
넷째, 이제현은 한유ㆍ이백 등의 당대(唐代) 시인들을 비롯한 유명한 중국 문인들의 시를 거론하기도 하고, 정지상을 비롯한 우리나라 시인들도 거의 망라해서 그들의 시에 대한 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극단적인 배척이나 악평은 삼갔다. 시를 지음에 있어서는 이치에 맞지 않는 단어의 사용은 권장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지명의 사용도 실제정황과 일치하지 못할 경우에는 호된 비판을 가하였다. 이러한 그의 비평 태도는 시어의 현실성을 강조하였다는 측면에서 특기할 만하다.
지정5(至正) 임오년 여름에 비가 줄곧 달포를 내려 들어앉았는데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 답답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벼루를 들고 나가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벼룻물로 삼고, 친구들 사이에 오간 편지 조각들을 이어 붙인 다음 그 뒷면에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그리고 말미에 ‘역옹패설’이라고 썼다.
역 자에 낙(樂) 자가 붙어 있는 것은 본래 소리를 나타낸 것이지만, 재목감이 못 되어 베이는 피해를 멀리하는 것은 나무로서의 즐거움[樂]이 되기 때문에 낙(樂) 자를 붙인 것이다. 나는 벼슬아치로 종사하다가 스스로 물러나 옹졸함을 지키면서 호를 '역옹'이라 했다. 이는 재목감이 되지 못함으로써 수명이나 누릴까 하는 뜻에서다. 패(稗) 자에 비(卑) 자가 붙어 있는 것 역시 소리를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이를 뜻으로 살펴보면 돌피[稗]는 곡식[禾] 중에 하찮은[卑] 것이라는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나는 젊어서는 글 읽을 줄 알았으나 장성하면서 그 배움을 폐지했다. 지금은 늙었는데 도리어 잡문 쓰기를 좋아하니 부실하기가 마치 하찮은 돌피와 같다. 그러므로 그 기록한 것들을 패설(稗說)이라 했다.
--- 본문 중에서
근세에 통해현(通海縣)에 거북같이 생긴 큰 동물이 조수를 타고 포구에 들어왔다가 바닷물이 빠지자 나가지 못했다. 백성들이 그것을 도살하려고 하자, 현령 박세통(朴世通)이 못하게 말리고 굵은 새끼로 배 두 척에 매어 바다에 끌어다가 놓아주었다. 꿈에 늙은이가 나타나 절하며 말하기를, “내 아이가 날을 가리지 않고 나가 놀다가 솥에 삶길 뻔했는데 다행하게도 공께서 살려주었으니 그 은덕이 크오. 공과 공의 아들 손자 삼대가 반드시 재상이 될 것이오” 했다. 그리하여 박세통과 그의 아들 홍무(洪茂)는 재상의 지위에 올랐으나 그의 손자 함은 상장군(上將軍)으로 은퇴하게 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고 시를 짓기를,
거북아 거북아 잠에 빠지지 마라
삼대의 재상이 헛소리일 뿐이구나.
龜乎龜乎莫耽睡
三世宰相虛語耳
했다. 이날 밤에 거북이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그대가 주색에 빠져서 제 스스로 복을 던 것이지, 내가 은덕을 잊은 것은 아니오. 그러나 한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조금 기다리시오” 했다. 며칠이 지나자 과연 은퇴하라는 명이 취소되고 복야6(僕射)가 되었다.
--- 본문 중에서
지추 손변이 경상도 안찰사7가 되었을 때 남매간에 서로 소송하는 자가 있었다. 그 아우가 말하기를, “딸과 아들이 다같이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는데, 어찌하여 누님만 홀로 부모의 유산을 차지하게 하고, 저에게는 나누어주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니, 누이는 “아버지가 임종하실 때에 전 가산을 나에게 주셨다. 네가 얻은 것은 검은 의관 한 벌과 미투리 한 켤레, 종이 한 권뿐이다. 아버지께서 쓰신 증서가 여기 모두 있는데, 어찌 어길 수 있겠느냐?” 하니, 여러 해 동안 판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공이 두 사람을 불러 앞에 놓고 묻기를, “너희들의 아버지가 임종할 때 어머니는 어디에 있었느냐?” 하니, 먼저 돌아가셨다고 대답했다. 공은 또, “너희들은 그때 나이가 몇 살씩이나 되었느냐?” 물으니, 누이는 출가했고, 아우는 아직 어릴 때였다고 대답했다.
공이 그들에게 타이르기를, “부모의 마음은 아들이나 딸이나 똑같은 것이다. 어찌 장성하여 출가한 딸에게만 후하고, 어머니도 없는 아들에게 박했겠느냐? 돌이켜보면 어린아이가 의지할 곳은 누이뿐이라, 만약에 유산을 누이와 똑같이 남겨주면, 그 사랑이 혹시 지극하지 못할까, 양육하는 것이 혹시 완전하지 못할까 염려한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장성하면 이 종이로 소장(訴狀)을 작성하고 검은 의관에 미투리를 신고 관가에 고하면, 이를 판별할 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유독 이 네 가지 물건을 준 것은 대체로 이러한 뜻이라고 생각한다” 했다. 이 말을 듣고 두 사람은 감동하여 서로 마주 보며 울었다. 공은 드디어 재산을 반씩 나누어 주었다.
--- 본문 중에서
♣
위에서 본 것과 같이 익재 이제현은 고려 후기 고뇌에 찬 시대를 살아가면서 겪었던 다양한 삶을 문학작품으로 순화시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다. 당시의 정치적ㆍ사회적 이데올로기 부재상태에서 봉건적 왕권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유학 사상을 그의 중후한 고문에 담아 강조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주권을 상실할 정도로 피폐해진 당대의 시대현실이 안고 있던 문제점을 직시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우리 역사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전ㆍ후집으로 구성된 이 책『역옹패설』의 전집에는 왕조의 정통성과 제도, 사회적 규범과 이데올로기 등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고, 후집에서는 기존의 시화집과 마찬가지로 문학이론이나 시평에 집중하고 있다. 이처럼 『역옹패설』에는 역사와 문명에 대한 이제현의 관심과 생각을 보여주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 가치를 단순히 문학비평서로만 한정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역옹패설』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그 안에 담긴 시문학 비평에 관련된 내용과 함께 이제현이 문명사적 시각에서 역사와 현실의 다양한 문제점을 성찰하고 극복해보려고 한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역옹패설』은 저자가 스스로 '뒤섞여 어수선한 글로 열매 없는 피 같은 잡문'이라 말하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후대인들에게 작자 당대의 현실과 문학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남겨 준 요긴한 책이다. 남매간 재산 소송 사건,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의 일화, 우리나라와 중국 시인의 시에 대한 비평, 사슴이나 거북을 살려 준 대가로 삼대가 재상이 된 이야기 등은 당대 역사적 현실과 시문학 세계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 높이 평가된다.
또한, 이 책은 <파한집>이나 <보한집>의 성격을 계승하였으면서도,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양한 특징들을 포함하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책은 목판본 외에 1911년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활자ㆍ양장본으로 출판된 바 있고, 1913년 일본 동경에서 영인되기도 하였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1287년(충렬왕 13)에 출생하여 1367년(공민왕 16)까지 활동한 인물로 당시 고려사회를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이라는 고려 최고의 관직까지 올랐으며, 그가 남긴 수많은 글과 더불어 해박한 식견은 현재는 물론이고, 당시 사회에서 이미 존경받고 있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100여 년간에 걸친 무인(武人) 지배로 인한 후유증과 함께 원(元)의 정치적 간섭을 받던 시련의 시기였다. 이제현은 이러한 시기에 수차에 걸쳐서 원을 왕래하기도 하고, 표문(表文)을 올려 원의 부당한 내정간섭을 비판하면서 고려의 주권을 보전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 인물이라 평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 익살을 부리는 가운데 어떤 교훈을 주는 일. [본문으로]
- 전통을 이어받지 못한 조정 [본문으로]
- 고려 시대에, 밀직사에 속하여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정삼품 벼슬. 충렬왕 2년(1276)에 승지로 고쳤다가 공민왕 18년(1369)에 대언으로 고쳤다. [본문으로]
- 중국 원나라 순제 때의 연호(1341~1370). [본문으로]
- 고려 시대에, 상서성에 속한 정이품 벼슬. 좌우 두 사람이 있었으며, 조선 시대의 의정부 참찬에 해당한다. [본문으로]
- 고려 시대에, 각 도의 행정을 맡아보던 으뜸 벼슬. 현종 3년(1012)에 절도사를 고친 것이며, 문종 20년(1066)에 도부서(都部署)로 고쳤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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