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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을 읽다

작자 미상의 우리나라 최초 한문설화집 『수이전(殊異傳)』

by 언덕에서 2017. 4. 5.

 

작자 미상의 우리나라 최초 한문설화집 『수이전(殊異傳)』

 

 

작자 미상의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설화집으로 현재 전하지 않으며,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郡玉)><삼국유사><태평통재(太平通載)> 등에 『수이전』에서 뽑은 몇 개의 작품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통일신라 후기 때 지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지은이로는 박인량ㆍ최치원ㆍ김척명 등이 거론되고 있다. 각훈이 지은 <해동고승전><아도전(阿道傳)>에서는 몇 개의 자료를 인용하면서 박인량이 『수이전』을 지었다고 했다.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에는 최치원이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삼국유사><원광서학>에서는 김척명이라는 사람이 항간에 떠도는 말로 원광법사의 전을 잘못 보관해 놓았는데, 그 폐단이 <해동고승전>으로 이어졌다면서 『수이전』의 작자를 김척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정설은 없지만 작품 중에 <최치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작자가 최치원일 리는 없으며, 박인량이 문장에 능했고 <고금록>이라는 은밀한 역사서를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수이전』은 박인량이 지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이와는 반대로 신라 때 최치원이 『수이전』을 지었는데, 그 당시에는 <신라수이전>이나 <고본 수이전>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 때 박인량이 이를 개작하면서 『수이전』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때 최치원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 들어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있다.

 『수이전』에는 귀신과 만나 사랑을 나누거나, 도술을 부리는 등의 기이한 이야기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속에도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서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지향과 백성들이 유명한 인물보다도 높게 평가되고 있는 것, 그리고 신분간의 차이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삶의 모습 등 당시 사회의 모습들이 부분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수이전』은 비록 단편이긴 하지만, 이를 통해서 신라의 설화를 이해할 수 있으며 후대 전기소설의 원초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있게 하므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현재 여러 책에 전하는 설화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원광법사전> : <삼국유사><해동고승전>

 ② <아도전> : <삼국유사><해동고승전>

 ③ <수삽석남> : <대동운부군옥>

 ④ <죽통미녀> : <대동운부군옥>

 ⑤ <노옹화구> : <대동운부군옥>

 ⑥ <선녀홍대> : <대동운부군옥><태평통재>

 ⑦ <호원> : <삼국유사><대동운부군옥>

 ⑧ <심화요탑> : <대동운부군옥>

 ⑨ <연오랑세오녀> : <삼국유사><필원잡기>

 ⑩ <보개> : <태평통재>  

 

 『수이전』에는 제왕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격을 지닌 인물들이 경험하는 삶의 애환이 그려져 있다. 합리적인 사고의 범주를 넘어서는 상상력의 세계를 통해 옛 선인들의 세계관, 인생관, 애정관 등을 살 필 수 있다.

 이처럼 원본은 전하지 않으나 14편의 자료가 <해동고승전>, <대동운부군옥> 등에 실려 전한다. 예를 들자면 ⑧번의 심화요탑설화(心火繞塔說話)는 신라 때의 설화로 처음에 고려초의 설화집인 『수이전』에 수록되었으나, 『수이전』이 소실됨에 따라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 권20에만 전하고 있다. 몇 개 이야기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③ <수삽석남(首揷石枏)> : <대동운부군옥>

 신라 사람 최항(崔伉)은 자를 석남(石南)이라 하였는데, 사랑하는 첩이 있었으나 부모가 금하여 몇 달을 만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갑자기 죽게 되었는데, 죽은 지 8일째 되는 날 밤 다시 살아나 첩의 집에 가니 첩은 그의 죽음을 모르고 있다가 매우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는 자기의 머리에 꽂고 있던 매화꽃가지石枏를 첩에게 주며, 부모가 너와 동거함을 허락하였기에 왔다고 말하고 첩을 데리고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담을 넘어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새벽이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 집 사람들이 첩에게 이 집에 온 까닭을 묻자 첩은 그 동안의 일을 사실대로 말하였다. 그러자 그 집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가 죽은 지 이미 8일이 지나 오늘 장례를 지내려는데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고 하였다.

 이에 첩이 그가 준 매화꽃 가지로 시험해 봄이 좋겠다 하여 그의 관을 열고 보니 시체의 머리에 꽃이 꽂혀 있고, 옷은 이슬에 젖었으며, 신고 있는 신은 모두 닳아 있었다. 이에 첩이 통곡하고 졸도하자 그가 다시 살아나 20년을 함께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④ <죽통미녀(竹筒美女)> : <대동운부군옥>

 김유신(金庾信)이 서주(西州)에서 서울로 돌아올 때 앞서가는 사람의 머리에 이상한 기운이 서려 있는 것이 보였다. 때마침 나무그늘에서 쉬게 되어 유신이 짐짓 자는 체하고 살피니 그는 품안에서 죽통(竹筒)을 꺼내어 흔드는데 거기서 두 미녀가 튀어 나왔다.

 이들은 즐겁게 이야기하다가 두 미녀는 다시 죽통 안으로 들어가고 이 사람은 죽통을 품에 되넣고 가므로, 유신은 뒤를 쫓아 함께 서울로 들어와 남산(南山) 소나무 아래 자리를 베풀어 잔치를 벌이니 두 미녀는 또다시 나타나 자리를 함께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서해에 있으며 동해에서 아내를 얻어 부모에게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풍운이 일어나고 사방이 어두워지면서 그들은 간 곳이 없어지고 말았다.

 

⑤ <노옹화구(老翁化狗)> : <대동운부군옥>

 신라 때 한 노인이 김유신의 집에 오자 김유신이 안으로 데리고 와서 자리를 펴놓고,

  "옛날같이 변신할 수 있느냐?"

고 물었다. 그랬더니 노인은 범이 되었다가 다시 닭이 되고 매로 변하더니, 나중에는 개가 되어 밖으로 나가버렸다.

 

⑥ <선녀홍대(仙女紅袋)> : <대동운부군옥><태평통재>

 최치원이 중국으로 유학갔을 때 초현관(招賢館)에서 놀았는데, 그 앞 언덕에 쌍녀분이라는 오래 된 무덤이 있어, 그 석문에다 시를 써 놓고 돌아왔다. 그 뒤 갑자기 손에 홍대를 쥔 여자가 최치원에게 와서,

팔낭자와 구낭자가 화답하여 삼가 바칩니다.”

라고 하였다. 최공이 깜짝 놀라 그 낭자가 누구인지 물었더니, 여자는 말하기를,

공께서 아침에 시를 지으셨던 곳이 바로 두 낭자가 사는 곳입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홍대를 받아 보니 두 낭자가 화답한 시가 들어 있었고, 뒷폭에는 한 번 만나기를 청하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공이 여자의 이름을 물으니 취금이라 했다. 그래 공이 또 시를 짓고, 끝에다 역시 만나자는 내용을 써 취금에게 주어 돌아가게 했다.

한참 후 한 쌍의 구슬이나 두 송이 연꽃과 같은 두 여자가 나타났다. 공이 두 여자를 맞아 근본을 물으니, 두 여자가 들려주는 내력은 이러했다.

  그들은 원래 부호인 장씨집의 딸들로서, 언니가 18, 아우가 16세 때에 각각 소금장사와 차장사에게 시집가기를 부모가 권유하였으나, 자매의 마음에 차지 않아 울적한 마음이 병이 되어 마침내는 요절하였더니, 다행히 최공과 같은 수재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매는 오늘 같은 좋은 밤에 시나 지으며 즐기기를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먼저 시를 짓자 이어 두 낭자가 차례로 시를 지어 읊었다. 마침내 그들의 간 곳은 알지 못했다.

 

⑧ <심화요탑(心火繞塔)> : <대동운부군옥>

 신라 선덕여왕 때 여왕을 짝사랑하다 미쳐 버린 지귀(志鬼)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어느 날 절에 가는 여왕의 길을 가로막았다. 여왕은 자기를 사모한다는 지귀를 뒤따르게 하고 절에 닿아서 불공을 올렸다. 한편 절 밖의 석탑 아래서 불공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지귀는 깜빡 잠이 들었다.

 이윽고 불공을 마친 여왕이 잠든 지귀를 보고 측은히 여겨 금팔찌를 뽑아서 지귀 가슴에 얹어 주었다. 잠에서 깨어난 지귀는 금팔찌를 가슴에 껴안은 채 타오르는 연정의 불길에 타 죽고, 마침내 불귀신이 되어 탑을 싸고 돌기 때문에, 여왕이 명하여 주사(呪詞)를 지으니 불길은 멎었다. 사람들은 그 주사를 써 붙여 화재를 막았다 한다.

 

⑨ <연오랑세오녀(延烏郞細烏女)> : <삼국유사><필원잡기>

 연오랑과 세오녀는 신라의 동해 바닷가에 살고 있던 부부인데, 157(신라 아달라왕 4) 미역을 따러 나간 연오랑이 올라섰던 바위(물고기라고도 한다)가 움직여 일본의 한 섬에 닿아 임금이 되었다. 남편을 찾아 나선 세오녀도 또한 바위에 실려 일본에 닿아 연오랑을 만나고 왕비가 되었다. 그 때 신라에서는 돌연 해와 달이 빛을 잃게 되었다.

 변괴에 놀란 왕이 일관(日官)에게 물으니, 이는 해와 달의 정이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탓이라고 아뢰었다. 왕이 급히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랑은 하늘의 뜻이라 돌아갈 수는 없으나 세오녀가 짠 세초(: 생사로 가늘게 짠 비단)를 가지고 돌아가 하늘에 제사지내라 하였다. 그대로 하였더니 다시 해와 달이 밝아졌다. 이로부터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지금의 영일만)이라 하였다.

 

⑩ <보개(寶開)> : <태평통재> 

 보개라는 가난한 여자에게 장춘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아들은 바다에 장사하러 나갔으나 몇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이 된 보개가 민장사 관세음보살께 아들이 돌아오게 해달라고 여러 날 동안 빌었더니, 장춘이 돌아왔다.

 사람들이 그간의 사연을 물었더니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배가 난파되어 함께 탔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으나 자기만 널빤지를 잡고 오나라에 가게 되었다고 했다. 오나라에서 노비가 되어 밭을 갈던 그에게 한 스님이 나타나 고향생각이 나느냐고 묻기에 노모가 있는데 보고 싶다고 말했다.

 스님은 장춘을 데리고 길을 나섰는데, 깊은 도랑이 나오자 장춘은 스님의 손을 잡고 건너다가 눈앞이 어지러워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고향의 말소리가 들려 꿈이 아닌가 했으나 사실이었다고 했다.

 장춘이 오나라를 떠난 것은 천보 448일 신시(申時: 오후 35)였는데 민장사에 돌아온 것은 술시(戌時오후 79))였다. 이 말을 듣고 나라에서도 그 영험함을 가상히 여겨 재물과 밭을 민장사에 바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