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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을 읽다

고대소설『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

by 언덕에서 2016. 4. 7.

 

 

 

 

고대소설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

 

  

 

 

 

 

조선 후기 작자 미상의 전기체 소설로, 궁중문학류의 일종으로, 숙종 당시의 궁중을 배경으로 왕가 일문에서 인현왕후가 겪어야 했던 생애를 소설체로 엮은 작품이다. 작자는 인현왕후를 모시고 있던 궁인이라는 설이 있으나, 최근의 연구로는 왕후 폐출에 반대하였던 박태보1의 후예나 왕후의 친정 가문에서 지은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필사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본ㆍ가람문고본 등 10여종이 있다. '인현왕후민씨덕행록(仁顯王后閔氏德行錄)'ㆍ'민중전덕행록(閔中殿德行錄)'ㆍ'민중전전(閔中殿記)' 등의 이칭으로도 불린다.

 내용은 민유중의 딸인 주인공 민비가 출생하는 데서부터 숙종의 계비로 입궐하게 되어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겪은 파란만장한 사건들을 작품화한 것이다.  『인현왕후전』은 <계축일기>, <한중록> 등과 함께 궁중문학으로 분류된다. 이 작품은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과 궁중이라는 특정한 공간에서 쓰여졌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인현왕후전』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갈등이 중심이다.

 단순히 임금을 사이에 둔 두 여인의 다툼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당시 일어난 서인과 남인의 세력 싸움이 숨어 있다. 역사적 사건인 기사환국’과 ‘갑술환국’은 역사책보다 이 작품 안에서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또한 당시 궁중의 풍속과 생활의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인현왕후의 덕행을 작품화한 이 소설이 널리 읽히는 이유 역시 작품 속 파란만장한 사건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가치 때문일 것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인현왕후는 한없이 어진 분이었으나 자녀를 얻지 못하게 되자 스스로 궁녀 장씨를 천거하여 숙종으로 하여금 후사를 보게 하였다. 그런데 아들을 낳게 된 장씨는 자신의 소생으로 세자를 책봉하고자 하여 갖은 모략으로 민비를 폐출시키고, 드디어는 세자책봉의 뜻을 이룬다. 연이어 자신도 정비(正妃)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게 되자 장씨의 모진 인간성이 점점 드러나게 되고, 드디어 숙종은 어진 민비를 폐출시킨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이에 다시 민비를 복위시켜 정비의 자리에 앉힌다. 그리하여 다시 뒷전으로 물러앉게 된 장희빈은 갖은 모략과 무술(巫術)로 민비를 해치고자 하여 밤낮없이 계책을 꾸몄다.

 한편, 6년 동안이나 아무도 원망하지 않음은 물론 죄인을 자처하며 폐서인 생활을 하였던 민비는 복위 후에도 건강을 되찾지 못한 채 7년 후 숙종이 매우 슬퍼하는 가운데 생애를 마감한다. 반면 장씨가 민비를 모해했던 일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장씨는 사약을 받게 된다.

 

 

 이 작품은 조선시대에 쓴 작자ㆍ연대 미상의 고대소설로 원제는 <인현성후덕행록(仁顯聖后德行綠)>이다. 숙종의 민비폐비 사건을 다룬 궁정문학 작품으로서, 작자에 대해서는 당시 인현왕후를 모신 궁인(宮人)일 것이라는 것이 통설이었으나, 궁중 인물이 아닌 남성 작가가 썼으리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저작 연대 또한 영ㆍ정조 연간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 내용은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간악한 장희빈을 왕후로 세웠다가 다시 폐위시킨 뒤 인현왕후를 복위시킬 때까지의 궁중 비극을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다룬 것으로, 당시 궁중의 음모가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그러나 얽히고 설킨 당쟁에 관련된 사건이어서 내용 자체의 사료적 신빙성은 희박한 편이다. 조선시대의 우아한 궁중어를 사용하여 과장이나 생략이 없이 이야기를 전개시킨 수작(秀作)으로, <서궁록><한중록>과 아울러 궁정문학의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서양에 신데렐라가 있다고 하면 우리 역사에도 수많은 신데렐라가 존재한다. 그 대표적 인물이 장희빈일 것이다. 역사는 항상 승자의 기록이니만큼 우리는 장희빈을 악녀의 대표적 인물로 알고 있다.

 삼국지 전문가로도 유명한 김운회 교수는 ‘삼국지 바로 읽기’라는 책에서 신데렐라의 삶은 필연적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로 건강한 아름다움에 관한 지적이다.

 신데렐라가 왕자의 사랑을 얻은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건강한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신데렐라의 미모(美貌)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는 것보다는 궁중에 출입하는 고귀한 가문의 여인들이나 궁녀들이 가지지 못한 어떤 매력, 예를 들면 일로 다져진 건강한 아름다움이 매력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궁중에 들어오면 이 같은 매력은 급속히 떨어지게 되고 오히려 세련되지 못한 행동들이 부각되기 쉽다.  이것은 여러 사람들의 입방에 오르게 되고 신데렐라는 정치적으로 고립되기가 쉬운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신데렐라는 결코 순탄치 않은 결혼생활을 할 것이고 어쩌면 그로 인한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높다. 

 

 

 

 

 숙종은 기사환국과 갑술환국을 통해서 정권의 기반을 확고히 하려했고 실제로 성공했다. 숙종 치세는 소론ㆍ노론의 분쟁과 대결 등 역사상에 저명한 정치 쟁점으로 인해 당파간의 정쟁은 전대(前代)에 비할 수 없으리만큼 격심하였다. 숙종은 민비와 희빈 장씨의 예에서 보듯이 애증의 편향이 심한 성격으로 판단된다. 그것이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쳐 당쟁을 격화시켰다고 말해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신료 간의 붕당정치 하에 견제 받고 손상되었던 왕권의 회복과 강화에는 비상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정쟁 격화는 붕당정치의 말폐가 폭발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앞서 현종 때의 예송 논쟁으로 손상된 왕실의 권위와 상대적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 한 왕의 정국운영 방식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왕은 군주의 고유 권한인 용사출척권2(用捨黜陟權)을 행사, 환국3(換局)의 방법에 따라 정권을 교체했다. 숙종은 붕당내의 대립을 촉발시키고 군주에 대한 충성을 유도했다. 그 관계에서 아내(인현왕후)를 희생시키고 또 다른 아내를 희생(장희빈)시키는 방법으로 정권을 공고히 하는데 성공한다. 이 소설은 그러한 과정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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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태보(朴泰輔.1654.효종5∼1689.숙종15)조선 숙종 때 문신. 자 사원(士元). 호 정재(定齋)ㆍ정재산인(定齋散人). 시호 문열(文烈). 본관 나주(羅州). 박세당(朴世堂)의 아들. 1677년(숙종 3) 문과에 급제,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있을 때 시관(試官)으로, 출제를 잘못하였다는 남인(南人)의 탄핵을 받아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가, 1680년 수찬으로 복직되니, 그때의 나이 27세였다. 성품이 결백하여 아부를 하지 않았으므로 시기하는 자가 많았으나, 항상 왕의 총애를 받았다.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암행어사가 되어 호남지방을 순회, 숙폐(宿弊)를 적발, 시정하니, 그곳 백성들은 참어사라고 칭송하였다.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시킬 때 그 부당함을 주장하여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끝내 굽히지 않고 항변하여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귀양 도중 노량진(鷺梁津)에서 젊은 나이로 죽었다. 숙종은 심히 후회하고 이조판서를 추증하였다. 시조 2수가 전한다. [본문으로]
  2. 왕이 정계를 대개편하는 권한 [본문으로]
  3. 조선 숙종 때의 정치적 상황으로, 급작스럽게 정권이 교체되는 국면이라는 뜻이다. 당시 서인과 남인은 치열한 붕당 정치를 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권의 강화를 도모한 숙종이 일방적으로 지배 세력을 교체해 버리곤 했는데, 이를 환국이라 한다. 환국은 총 3번 발생했는데, 다음과 같다.① 경신환국 : 1680년(숙종 6년) 서인 집권.② 기사환국 : 1689년(숙종 15년) 남인 집권.③ 갑술환국 : 1694년(숙종 20년) 서인 집권.환국을 통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어, 결국 붕당 정치는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격심한 싸움으로 변질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환국 [換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