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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한수산 단편소설 『침묵』

by 언덕에서 2016. 11. 15.

 

 

한수산 단편소설 『침묵』

 

 

한수산(韓水山.1946~)의 단편소설로 1977년에 발표되었다. 그해 [이상문학상] 후보작이다. 또래의 초등학생들의 놀이 찾기를 통해 가장 순수하다고 하는 어린 아이들에게도 잠재된 폭력성을 보여주는 작품소설이다.

 1970년대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에 이주해 온 한 무리의 아이들이 그 이전의 자연적인 환경과 이별하면서 새롭게 맞이하게 된 아스팔트 위에서의 생활을 그린 이 작품은 아파트의 아이들이 어떻게 동심을 잃고 파괴되어 가는가를 잘 그려낸 작품이다.

 부모가 집을 비운 틈을 이용해 부모들의 장식장에서 꺼내 본 포르노 잡지에의 탐닉과 이에 싫증을 느낀 나머지 도심의 신세계 백화점으로 택시를 타고 나간다. 그곳에서 사온 병아리를 옥상에서 날려 죽이는 놀이에 이르는 아이들의 폭력성은 당대 어른들의 놀이에 다름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미 어린아이라는 의미 자체가 변질됨을 그려내고 있다. 

 아이들이 옥상에서 날려 죽이는 병아리는 곧 도회의 주변부 인물들이며, 그 아이들의 아버지 어머니가 탐닉하는 포르노 잡지는 곧 육체의 상품화다. 결국 이 작품은 현대도시의 아파트 문화가 얼마나 비인간적이며 파괴적인 동시에 폭력적인 것인가를 잘 드러내고 있다. 편리성에의 위무를 좇는 현대도시인들의 폭력성이 얼마나 가공한 것인가를 그대로 그러내고 있기도 하다. 특히 소설 속의 아이들을 한데 묶어 ‘우리’로 표현한 작가의 의도 속에서 도회인 모두가 곧 이런 부류의 폭력적 인간군상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병아리 죽이기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여자 아이의 뒤를 쫓아 그 아이의 병아리를 빼앗아 서로 발길질을 계속하는 소설의 마무리 장면은 개발의 폭력성이 인간의 폭력성으로 그대로 전이되는 상징으로 다가온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배추심고 논과 밭이 있는 시골마을에 아파트가 세워지고 그곳에 처음으로 이사 온 4명의 아이들은 배추밭에서 뛰놀고 벌레 잡으면서 놀던 아이들이다. 그러나 도시 개발로 배추밭은 없어지고 모든 땅은 아파트와 콘크리트가 깔린다. 아이들은 벌레를 잡고 밖에서 뛰어 노는 놀이 대신 다른 놀이를 찾는다. 어른들이 없는 집에 들어가서 침대에서 뛰놀기도 하고 또래 아이들 집을 헤집고 다니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아파트단지에 병아리 장사가 들어오고 아이들은 병아리를 새로운 장난감으로 여긴다. 사흘이 지나고 아이들의 병아리는 대부분 죽고 단 두 마리만 살아남는다.

 아이들은 병아리를 아파트 아래로 던지면 날수 있을지 호기심에 5층에서 떨어트린다.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진 두 마리의 병아리는 모두 죽는다. 그러자 아이들은 시내로 버스를 타고 나가 병아리를 한 마리씩 사들고 온다. 아이들은 사온 병아리를 더 높은 옥상에서 던져 모두 죽게 만든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싱겁게 죽어 버린 병아리를 보며 실망한다. 너무 높은 곳에서 떨어트렸나보다고, 더 오래 가지고 놀게 2층에서 떨어트릴걸 그랬다고 후회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3호에 사는 여자 아이가 던지지 않은 병아리를 주머니에서 꺼내며 말한다.

 "나는 이 병아리를 던지지 않고 키울 거야."

 자신의 병아리는 죽고 없는데 여자 아이의 병아리만 살아 있는 게 못마땅한 아이들은 병아리를 빼앗아 발로 밟고 또 밟는다. 이미 내장이 다 나왔는데도 아이들은 계속해서 밟고 또 밟으면서 소설은 끝난다.

 

 

 단편소설『침묵』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적인 생명의 힘과 ‘집단과 그 집단에 응집되는 힘’이라는 비인간적인 힘의 갈등을 뛰어난 상징과 탄력성 있고 섬세한 언어를 사용해서 성공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원래 서로 도우며 살아가기 위해서 구성된 사회가 인구 팽창과 산업화 과정으로 말미암아 생활공간을 지극히 좁히는 밀집 현상을 가져왔다. 그 결과 사회란 집단은 인간의 개성과 자유의사를 짓밟아 버리는 모습을 가져왔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집단 현상이 인간에게 미치는 그 힘이 얼마나 가공스러운가 하는 것을 아파트 단지에서 갇힌 듯이 사는 어린이들의 놀이를 통해서 리얼하게 파헤친다. 목가적인 자연 환경이 시멘트벽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그린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강변 도시에 아파트 단지가 생겨난 후 사람들이 사는 형태는 다양성을 잃고 판에 박은 듯 기계화되어 버렸다. 그래서 개인의 주관적인 가치는 집단의 응집력에 흡수되어 그 개성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불행은 아파트 콘크리트 문화가 계절의 변화에도 눈을 닫아 버린 채, 감옥에 갇힌 듯이 살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전해진 현실이다. 마음대로 뛰어 놀고 싶어하는 어린이들은 자연의 공간을 잃어버렸는가 하며, 모래 먼지로 인해 푸른 하늘의 아름다움마저 볼 수 없게 되었다. 

 

 

 아파트 단지를 쏘다니며 놀거리를 찾던 여섯 아이가 행상에게서 병아리를 산다. 아이들은 5층 베란다에서 병아리가 얼마나 멀리 날아가는지 보려고 날린다. 병아리는 추락해 바동대다 죽고 아이들은 다시 병아리를 사 온다. 이번엔 9층 옥상에 올라가 누구 병아리 숨이 오래가는지 내기한다. 저마다 병아리 다리며 날개에 사인펜으로 표시하고 허공으로 던진다. 아이들이 달려 내려간 바닥에서 병아리들은 숨이 끊겼거나 이내 끊긴다.

 아파트는 많은 집이 모여 살면서도 거꾸로 칸칸이 단절됐다. 아이들은 자연과 멀어졌고 놀이를 잃었다. 언젠가 공익 광고에서 아이가 장난감 자동차로 병아리를 치어 쓰러뜨리곤 이렇게 말했다. "엄마, 병아리 고장 났어." 아이들에게 생명과 연민을 가르쳐주는 것은 온전히 어른들 몫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집단과 그 집단에 응집되는 힘, 그리고 집단이 가지는 폭력에 대한 관심을 표출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모든 훌륭한 예술품이 다 그러하듯이 여러 개의 얼굴을 가졌다. 아파트에 갇혀서 죽어 가는 병아리들의 이미지를 어린아이들의 이미지와 일치시켜 볼 때, 이 작품은 우리에게 또 다른 차원을 보여 준다.

 

 

 

 

 

 

<한국단편소설 100선>이라고 명명하여 2009년부터 조금씩 연재하던 것을 이제야 종지부를 찍습니다. 7년이 걸렸네요. 2000년도 이후의 소설을 많이 소개하고 싶었으나 제 역량 부족 및 시대별 안배를 하다 보니 뜻대로 되지 못했음은 아쉽습니다. 이념적인 측면에서 제 포스팅을 관찰한 어느 분은 특정 작가가 쓴 소설을 소개하는 것이 당치 않은 일이라고 힐난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저는 어떤 정치적인 노선에도 경도되어 있지 않고 관심도 없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시대상과 소설적인 재미라는 측면에만 100편의 소설을 선정했음을 밝힙니다. 그간 읽어주신 문학도 및 네티즌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