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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최인훈 단편소설 『웃음소리』

by 언덕에서 2016. 11. 8.

 

 

최인훈 단편소설 웃음소리

 

 

 

 

최인훈(崔仁勳.1936∼2018)의 단편소설로 1966년 [신동아]에 발표되었고 그해 [동인문학상] 수상작이다. 최인훈은 나름대로의 실험 정신이 강한 작가로 외면적인 사건보다는 외면적 사건의 동기로서 내면세계에 더 큰 관심을 가진 작가로 평가된다. 그의 소설 속 사건은 내면적 심리의 결과이면서 한 인간의 내면적 변모 과정을 보여주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얼핏 보기에도 ‘의식의 흐름’ 수법을 닮은 데가 있는 소설 기법을 통하여 인간성 해체와 새로운 탄생을 형상화해 내고 있다.

 소설 속 현실은 거의 언제나 개인에게 있어 문제적 현실(개립과 극복이라는 과제가 주어지는 현실)이다. 문제적 현실은 개인에게 갈등의 소지를 제공하는데, 그 갈등은 어려운 선택 문제와 직결된다. 선택과 버림은 모든 소설 속에 나타나는 일반화된 갈등 문제이지만, 최인훈 소설에서는 고뇌와 방황으로 탈바꿈하여 나타난다. 허무와 불안, 고뇌와 번민 등 현대인의 심리적 고통을 주로 다루는 그의 소설은 실존주의 색조를 띠기도 한다. 1978년 김수용에 의하여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소설가 최인훈( 崔仁勳.1936-2018)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그녀는 바(bar) '하바나'의 종업원으로, 자기가 근무했던 술집의 주인 마담에게서 밀린 월급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가 순정을 바쳤던 '검은 안경을 쓴 해사한 눈자위의 그'와 헤어진다. 이튿날, 그녀는 자살을 감행하기 위해서 기차를 타고 P온천을 찾는다. 그곳은 '그'와 추억이 서린 장소이다. 기차 안에서 신사가 말을 건넨다. 그러자 같이 데리고 가서 죽어 버리고 싶은 생각을 한다. P온천의 여관에서 묵은 다음날, 그녀는 죽기로 작정한 장소가 있는 산 속으로 간다. 그곳엔 한 쌍의 남녀가 잔디에 누워 있었다. 여자의 짧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이튿날, 같은 시간에 다시 그 장소에 갔더니 오늘도 그 남녀는 벌써 와 있었다. 그녀는 여자가 베고 있는 남자의 팔이 햇빛 속에 환한 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본다. 그 여자의 짤막한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그녀는 그 남녀 때문에 이틀이나 허비하고 꿈과 환각에 사로잡혀 괴로움을 당한다. 그녀는 빈터의 남녀가 자기 자신과 '그'처럼 언젠가 갈라지는 날을 그려본다.

 다정스럽게 팔을 베고 있던 숲 속 빈터의 그 여자가 자기처럼 혼자 그 빈터를 찾게 될 어느 날인가를 생각해 본다. 그러자 그녀는 거짓말처럼 마음이 가라앉는다.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 아침까지 한번도 깨지 않았다. 사흘째 되던 날, 그녀는 점심때가 되어 다시 산으로 올라간다. 이번엔 그 자리를 차지한 남녀를 보더라도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빈터에는 십여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거기에는 그 남녀의 주검이 거적때기에 덮여 있었다. 이미 1주일 전에 죽은 시체라는 것이었다.

 그 후 P온천에서 1주일을 더 묵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그녀는 '여자의 짤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옴을 느낀다. 아주 귀에 익고 사무치는 목소리, 그것은 바로 그녀 자신의 웃음소리였다.

 

 

영화 [웃음소리], 1978년

 

 

 이 소설은 실연을 당한 여인이 죽음을 결심하고 서울을 떠나 P온천으로 가지만, 자신이 진정 원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임을 깨닫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웃음소리'라는 소재를 통해 현실과 꿈, 사실과 환상을 혼재시켜 주인공의 내적 갈등과 그 극복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이 소설의 골격만 제시하면 이러하다.

 ― 사랑에 실패한 한 여자가 자살을 결심하고 P온천의 숲 속에 간다. 거기서 한 쌍의 연인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목격하고 발길을 돌린다. 그리고 며칠 후 그 다정스러워 보였던 연인은 이미 일주일 전에 죽은 시체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일상이 있는 서울로 되돌아온다.

 실연은 그녀에게 커다란 고통을 주었을 것이다. 그 감정은 자살의 결행에 이르게 된다. 문제는 자살 장소로 '그'와의 추억이 어려 있는 숲 속을 택했다는 점이다. 비록 '그'가 미움의 대상이지만 옛 사랑의 잔상을 맛보고자 함일까. 또 하나, 멀리 누워 있는 숲 속 연인 가운데 남자 모습이 옛날의 '그'의 모습처럼 아름다운 금빛으로 다가온다. 떠나간 '그'에 대한 동일시 현상, 보상 심리임이 분명하다. 그녀는 다음날 숲 속의 그 연인을 만나러, 아니 사실은 '아름다운 금빛'으로 빛났던 '그'를 만나러 그곳에 다시 간다. 여인의 웃음소리가 자신 실연의 비애를 비웃듯 들려온다. 그러나 세 번째 되는 날, 그 아름다웠던 연인은 놀랍게도 1주일 전에 죽은 시체였음이 밝혀진다. 그때 또 들려오는 여인의 웃음소리.

 그녀는 1주일을 더 머문 후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다시 차창밖에 신기루처럼 펼쳐진 사막 한가운데, 사보텐 뒤에, 또 다른 연인이 보이고, 또 어떤 여자가 웃음을 터뜨린다. 그제야 그녀는 깨닫는다. 그렇다, 내가 진정 원한 것은 '죽음(자살)'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랑이었음을. 그녀는 출발지부터 그 숲 속에 이르기까지, 또는 서울로 다시 올 때까지 사랑만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는 생활 속으로 복귀한다.

 

 

 최인훈의 소설은 살 것이냐, 말 것이냐라는 숙제를 안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번뇌하는 인간성의 보편적 문제를 추구하고 있다.

 이 작품 <웃음소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한 인간이 겪게 되는 내면적 체험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구조적 뼈대는 실연(배신)을 당한 주인공이 죽음을 결심하고 서울을 떠나 P 온천으로 가지만, 거기서 두 남녀의 죽음을 보고 생각을 바꿔 다시 서울의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외면적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실의에 빠진 주인공이 삶의 현장을 떠났다가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 다시 삶의 현장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떠남→ 경험→ 돌아옴’이라는 구조적 패턴을 이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떠남의 동기는 삶에서 느끼는 실의와 환멸이고 돌아옴의 동기는 새로운 의미의 발견이다. 그 사이에 새로운 의미를 제공하는 체험 세계가 놓여 있다. 이 체험 세계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실의와 환멸에서 벗어나게 하는 동기가 되는데, 이것은 주인공이 내면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이기도 하다.

 두 남녀의 정사를 목격한 주인공은 사랑과 죽음 사이의 필연성을 의심하게 되고 또 다른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진실은 실의와 좌절을 딛고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이 작품은 실의에서 재생으로 이어지는 한 인간의 심리적 성장과 변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재 자체는 흔한 것이지만, 그것을 특이한 기법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소재의 평이성을 극복하고 인생의 진실을 성공적으로 구현해 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