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화 장편소설 『금삼(錦衫)의 피』
박종화(朴鍾和.1901∼1981) 최초의 장편 역사소설로 1936년 3월 20일부터 12월 13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되었고 1938년 [박문서관]에서 단행본 상ㆍ하권으로 간행되었다. 연산군이 생모 윤씨를 복위시키고자 일으킨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계기로 월탄 박종화는 본격적인 역사소설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사실(史實)에 충실하면서도 풍부한 상상력이 가미된 역사소설이다. 작자는 이 작품 이후, 본격적인 역사소설가로 전환하게 된다. 당시 1930년대 문학의 일반적 조류는 계급성이 강한 신경향 문학이 퇴조하고, 민족주의 문학이 민족의 역사와 전통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당대 문단적 변화의 모습이 이 작품에도 담겨 있다. 『금삼의 피』는 왕실 내부의 정치적 음모와 애정 갈등 및 이와 연루된 사화 등, 궁중 생활의 숨은 이면을 역사적 소재로 담고 있다.
그가 이 작품을 쓴 것은 일제의 억압이 점차 가혹해져 가던 때였기 때문에 민중 생활은 물론 지배층의 경우에도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묘사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작중 인물 설정에도 역사적·사회적 의미가 배제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들은 일제의 탄압 아래 신음하고 있는 민족적 현실을 투영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적 사실에 치중함으로써 역사의 재현적 측면이 부각될 뿐 작가의 소설적 상상력은 현저히 둔화되어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1930년대 중반부터 가중된 일제의 억압에 대응, 민족적 소재를 선택하여 민족의 얼과 정신, 그리고 민족 언어를 유지 보존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판봉상시사 윤기무의 딸인 윤비는 전에는 후궁이었으나, 원자(元子)를 낳은 뒤에 중전이 되었다. 윤비가 원자를 낳아서 기르는 동안에 성종은 또 다른 후궁을 총애하기 시작한다. 이 후궁은 정귀인으로, 중전 윤비보다 더욱 아름다웠기 때문에 윤비와 갈등이 생기게 된다.
어느 날, 윤비는 자신의 친잠(親蠶) 행사에 나오지 않는 정귀인을 잡아다 엄나무 가시를 등에 얹히는 등 하룻밤 동안 석고대죄를 시켰다. 이에 앙심을 품은 정귀인은 점쟁이와 의논하여 바늘을 꽂은 동자상을 동궁의 처소 부근에다 파묻어 동궁 '융‘을 병들게 했다. 이 사실을 안 윤비는 정씨를 당장 없애려고 했으나 성종의 총애가 워낙 두터워 죽이지는 못한다.
윤비는 오랜만에 왕이 침소에 들었으나 용안에 손톱자국을 남겼다는 오점으로 모함을 받아 사약을 받게 되었다. 사약을 받으면서 윤비는 자신이 토한 피가 묻은 한삼 소매 조각을 친정어머니 신씨에게 주면서 그것을 동궁에게 전해 줄 것을 간청한다. 윤씨의 피눈물이 묻은 금삼은 신씨 손에 옮겨져 비밀히 간직되었다. 그 후 동궁은 자신의 생모가 한때 왕비로 있다가 폐위된 후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어린 연산의 가슴 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죄인의 아들, 폐비의 아들, 어머니 없는 외로운 자식이라는 생각은 그의 성격에 큰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은 왕위에 등극했다. 왕위에 오른 연산은 먼저 폐위된 생모 윤씨를 복위시켜 종묘에 안치하려 했다.
그러나 대왕대비와 조정 신하들의 반론에 부딪쳐 겨우 회모1(懷慕)를 세우는 데 그쳤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연산은 자신의 명을 거역한 조정의 신하들에게 강한 혐오감을 갖게 된다.
어느 날, 연산은 궁중의 뜰에서 성종이 극진히 귀여워하던 사슴을 활로 쏘아 죽였다. 이 사건은 앞으로 연산의 폭정을 미리 내다보게 하는 전조였다. 그는 무오 사회에 이어 연산의 외조모 신씨와 임사홍이 폐위된 윤씨 사건을 들추어내자 생모 윤씨를 윤비로 복귀시켰다. 동시에 외할머니인 신씨로부터 자기 생모 윤씨의 폐비 사건의 전말을 듣고, 정귀인 일파와 사약을 내리는 데 방조했거나 이에 연루된 신하들에 대해 참혹한 징벌을 가하는 갑자 사회를 일으킨다. 이 양대 사화로 인해 연산의 주위에는 충신이 제거되고 간신배들의 횡포가 극심해졌다. 연산은 연일 황음방탕과 주색잡기에 빠져 백성의 고혈을 짜며 정사를 게을리 했다. 백성의 원성은 높아가고 뜻있는 선비들의 비판의 소리가 팔도에서 오고갔다.
마침내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박원종 일파가 연산 13년 9월 1일에 휘하 군대를 이끌고 연산의 궁궐에 쳐들어가 연산을 왕위에서 끌어내리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새로 왕위에 오른 연산의 이복동생 중종은 조칙을 내려 전왕을 연산군으로 강봉하여 교동에 안치시켜 그를 죽이고 만다.
박종화는 그의 문필생활의 반 이상을 역사소설을 쓰는 데 바쳤다. 여기서 역사소설이란 것이 근대문학의 차원에서 양식의 의미를 띨 수 있는가를 따져야 한다. 그러나 역사소설의 양식이 의미를 띠려면 역사를 전진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사회적 등가물로서 자아 각성의 의미를 포착하는 근대소설이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한국 신문학은 단 한 편의 역사소설도 가졌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일단 여가소설을 해양소설이나 농촌소설이라는 정도의 구분으로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이광수, 김동인, 박종화 등의 ‘역사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작품이 쓰여지게 된 시대적 이유이다. 그 동기에 대해 월탄 박종화 스스로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역사소설의 형태를 빌어서 문학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소설의 주인공을 통해서 나는 현대 인간들과 대화를 하면서, 이 땅, 이 조국을 아름답게 건축해 보자는 것이다.”
박종화의 낭만성적인 기질은 [백조]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역사소설에서도 변질되지 않음은 ‘조국을 아름답게 건축해 보자.」라는 그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따라서, 그의 역사소설은 대개 실록에 근거한 정사적 소설일지라도 작가 자신의 낭만적 정신의 기초에서 착상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의 묘사에 있어서 객관성이 결여된 점이 결함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의 역사소설의 또 하나의 결함은 민족적 영웅이나 위인을 주제로 한 것이 많은 것에 반하여 한 시대의 역사를 직조해 나가는 근원적인 주체인 평민을 의식하고 있지 않다.
♣
그의 최초의 장편 역사소설 『금삼의 피』는 1936년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는데, 이 작품은 연산군을 소재로 한 것이다. 작가는 역사의 실제적 인물인 연산군을 포악무도한 왕으로만 처리하고 있지 않다. 연산군의 광적인 정사(情事) 상태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고 후천적인 동기, 즉 비명에 죽은 친모의 비참한 최후를 알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학계 일부에서는 연산군이 폭군인 부분은 쿠데타에 성공한 반정 세력들의 승자에 의한 역사 기록일 뿐이라는 주장이 만만치 않다(https://yoont3.tistory.com/11302174).
연산군의 반항적이며 복수적인 성격의 성장 과정에 대한 묘사나 연산군의 폭정에 항거하는 반정 거사에 대한 서술 등은 작가가 지닌 낭만 정신의 표상이다. 그는 폭군을 조형함에 있어서 그 난폭한 행동의 이면에 인간적인 오뇌와 고독을 그리려고 애썼다. 실록에도 단죄되어 있는 연산군의 생모를, 그리고 연산군을 신성화하려 한 이러한 노력은 민족의식의 보루인 역사를 생활화해야 하는 사명감 또는 당위에 의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상상해 본다.
- 마음속 깊이 그리워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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