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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박정만 시집 『혼자 있는 봄날』

by 언덕에서 2016. 10. 14.







박정만 시집 『혼자 있는 봄날』







올림픽이 열리던 그 해, 1988년에 발간된 이 시집을 다시 읽는 일은 지난 시대의 불행한 인권사를 다시 들쳐보는 일과 같다. 박정만☜은 1970∼1980년대에 걸쳐 독특한 서정의 영역을 개척한 이로, 길지 않은 생애 동안 다양한 시의 양상을 보여 주면서 특유의 시 세계를 형성한 시인이다. 이러한 시 세계는 시인이 겪은 이른바 ‘한수산 필화 사건1’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기점으로 보다 선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 사건 이후 고전 정신을 계발하던 시인의 내면은 시대의 폭력성에 대한 울분으로 가득 차기도 하고, 생래적 고독감이 심화되어 허무감에 젖기도 하는 등 점차 비극적 서정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광기에 사로잡혀 때로는 섬뜩한, 때로는 청승맞은 편편의 시를 장식해 나갔다. 광기로 써 내려간 비극적인 서정의 밑변에는 토속적인 가락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서정시의 백미를 보여 준다.

 우리나라 문학사를 돌아보면 박정만만큼 서정과 가락을 섬세하고 감각적으로 벼려, 청신하고 영롱한 시를 쓴 시인은 흔치 않다. 그의 개성적 서정 미학의 세계는 물질의 논리 속에서 서정의 세계를 깊이 있게 개척해 인간의 깊숙한 곳에 묻어 둔 감성을 끄집어 낸다. 그 개인에게 지상에서의 삶은 끝없는 불행이었지만, 그가 이성적 사유 영역을 벗어나 ‘광기’를 통해 정신적 내부 세계를 보여 준 점은 현대 시를 이해하는 지평을 넓혀 주었다. 동시에 현대시의 새로운 연구 영역에 도달했다. 어쨌든 그의 시는 아름답다.







 




꽃구름 한 편


서쪽편으로 흘러가는 꽃구름 한 편.

못을 박은 듯이 눈길을 주고

세필화를 그린 듯이 섬세하게 눈썹에

그 꽃구름 한 편을 달아버렸다.


지구 끝으로 바람도 다 흩어져 가고.









 


씨팔놈의 밤안개


우라질, 왜 이렇게 설움이 쌓여

몽땅 떨이로 사랑하는 그대에게 주고 싶은데

그대는 철부지로 한눈만 파고

저녁상엔 파아란 상치쌈만 기어오르고.


아득한 들녘에 피어나는 씨팔놈의 밤안개.













 눈물의 오후


 눈물이 흔해서 괴로웠다.

 날 기울면 창밖에 어둠이 지고

 어둠이 지고 나면 때없이

 눈물이 소금처럼 밀려왔다, 소금처럼.


 거룩하고 거룩한 세월,

 한 목숨을 견디지 못하고 매양 눈물이 오고

 어느 때쯤이었을까,

 죄와 불면이 무섭게 자라나는 어두운 밤에

 나는 슬픔의 그물로 피륙을 짰다.


 아주 잘 짰다.

 옷에는 물방울 무늬의 사랑이 저질러지고

 때묻은 내의에는 마구 서캐가 슬어

 내 더러운 피의 근원을 앞질러갔다.


 이제 사랑도 알아보게 縮이 났다.

 마음은 건성 마른 풀잎에 눕고

 내 생의 우기를 재촉하는 바람만 불어

 草露 같은 한 목숨을 쓰러뜨렸다.


 돌림병처럼 어지러운 세상,

 세상은 때없이 오후의 햇발 속에 기울어지고

 나는 눈물이 둥그러운 기름처럼

 어지럽게 맨땅을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요즈음은 왜 이렇게 눈물이 흔한지 몰라.











 대청에 누워


 나 이 세상에 있을 때 한간방 없어서 서러웠으나

 이제 저 세상의 구중궁궐 대청에 누워

 청모시 적삼으로 한 낮잠을 뻐드러져서

 산뻐꾸기 울음도 큰댓자로 들을 참이네.


 어차피 한참이면 오시는 세상

 그곳 대청마루 화문석도 찬물로 씻고

 언뜻언뜻 보이는 죽순도 따다 놓을 터이니

 딸기잎 사이로 빨간 노을이 질 때

 그냥 빈손으로 방문하시게.


 우리들 생은 다 정답고 아름다웠지.

 어깨동무 들판 길에 소나기 오고

 꼴망태 지고 가던 저녁나절 그리운 마음,

 어찌 이승의 무지개로 다할 것인가.


 신발 부서져서 낡고 험해도

 한 산 떼밀고 올라가는 겨울 눈도 있었고

 뒤엄 속의 김 하나로 맘을 달랬지.


 이것이 다 내 생의 밑거름 되어

 저 세상의 욱간대청 툇마루까지 이어져 있네.

 우리 나날의 저문 일로 다시 만날 때

 기필코 서러운 손으로는 만나지 말고

 마음 속 꽃그늘로 다시 만나세.


 어차피 저 세상의 봄날은 우리들 세상.











쓸쓸한 봄날


길도 없는 길 위에 주저앉아서

노방(路傍)에 피는 꽃을 바라보노니

내 생의 한나절도 저와 같아라.


한창때는 나도

열병처럼 떠도는 꽃의 화염에 젖어

내 온몸을 다 적셨더니라.

피에 젖은 꽃향기에 코를 박고

내 한몸을 다 주었더니라.


때로 바람소리 밀리는 잔솔밭에서

청옥 같은 하늘도 보았더니라.

또한 잠 없는 한 사람의 머리맡에서

한밤내 좋은 꿈도 꾸었더니라.


햇볕이 아까운 가을 양지녘에서는

풍문처럼 떠도는 그리운 시를 읽고

어쩌다 찾아온 친구에게는

속절없는 내 사랑의 말씀도 전했더니라.


이제 날 저물고

팔이 짧아 내 품에 드는 것도

부피 없고 무게 없고 다 지친 것뿐.

가슴도 애도 제물에 삭고

긴 밤의 괴로움도 제물에 축이 났어라.


이제 모질고 설운 날도 지나갔어라.

빈 집에 홀로 남은 옛날 아이는

따뜻한 오월의 어느 해 하루

툇마루를 적시는 산을 벗삼아

잔주름 풀어가는 강물을 본다.










저 높푸른 하늘


저 높푸른 하늘이 있었는지 나는 몰라.

그것은 나에게 군말만 있었기 때문,

이제 철 지난 눈으로 저 하늘의 푸른 땅을 보나니

버리라 하면 다 버릴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 기다려보자.

왜 생의 한나절은 내게 없으며

걸어가는 길섶에는 좋은 꽃도 없는지.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아, 이제 알겠어.

나는 언제나 되돌아오는 나그네가 되고 싶었지.

바람과 달과 구름은 끝이 없는데

난 그저 오금 박힌 걸음으로 걸어온 거야.


저 높푸른 하늘을 좀 봐,

세상의 물그림자가 수틀처럼 걸려 있어.

미리내는 한 별을 이 땅에 주고

별은 다시 또 하늘로 솟구쳐 날아오르지.


아무렴 저 꼭두서니 빛을 보라니까.

저녁 산의 이마 위에

높푸른 하늘의 맑은 빛이 마냥 걸려서

내 꿈과 저승길로 걸어오는 걸.

걸어와서 슬픔의 한 빛깔로 물드는 것을


그래도 아직은 이것이 아닌 것 같아.







☞박정만 (1946~1988)시인. 1946년 전라북도 정읍군 산외면 상두리에서 2남 4녀 중 차남으로 출생. 1966년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7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196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겨울 속의 봄 이야기>가 당선되었다. 1971년 경희대 국문과를 수료하고, 1972년 문화공보부 문예작품 공모에 시 <등불설화>, 동화 <봄을 심는 아이들>이 당선되었다.

  학원문화사ㆍ중앙문화사 등의 출판사와 [월간문학] [어깨동무] 등의 잡지사에서 근무하다가 1980년에 고려원(주) 편집부장이 되었으며, 1979년에는 첫 시집 <잠자는 돌>을 출간하였다. 1981년 5월 작가 한수산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에서 3일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고 회사마저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는 날까지 시달리면서 집필에만 전념하였다.

  한국의 전통적 서정시를 주로 썼으나, 필화사건에 잘못 연루되어 곤욕을 치르고 난 뒤 결혼생활도 파괴되고 병마에 시달리는 등 개인적 슬픔이 계속되면서 작품 속에도 점점 죽음의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간경화로 사망. 1989년 현대문학상, 1991년 제3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



 


  1. 한수산 필화 사건(韓水山筆禍事件)은 1981년 5월 《중앙일보》에 1년간 연재 중이던 소설가 한수산의 장편소설 〈욕망의 거리〉로 인해 관련자들이 연행되어 고초를 치른 사건이다. 욕망의 거리 필화 사건이라고도 한다. 〈욕망의 거리〉는 1970년대를 배경으로 남녀 간의 만남과 사랑을 통속적으로 묘사한 전형적인 대중 소설이었다. 군데군데 등장하는 군인이나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에 대한 묘사가 대통령 전두환을 비롯한 당시 제5공화국의 최고위층을 모독하는 동시에 군부 정권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작가 한수산과 문화부장 정규웅 등 중앙일보사의 관계자들, 한수산의 문단 동료인 시인 박정만이 국군보안사령부(사령관 노태우)에 연행되어 고문을 받았다. 국내에서의 창작 작업에 회의를 느낀 한수산은 이후 일본으로 떠나 수년간 머물렀고, 박정만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88년 사망했다. 이 사건은 당대에는 언론 통제로 인하여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으며, 연재 중인 소설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지엽적 표현을 독재 정권의 자격지심 때문에 억지로 문제 삼아 비인간적 결과를 낳은 필화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