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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장석주 시집 『몽해항로』

by 언덕에서 2016. 10. 28.






장석주 시집 『몽해항로』







이 시집 『몽해항로』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만큼 빠르게 변하는 세상살이 속에서 시를 쓰는 또는 시를 읽는 일의 의미, 즉 느리게 사는 것의 가치를 보여준다. 시인이 서울을 벗어난 10년 동안 고요의 삶 속에서 느림과 비움의 삶을 통해 얻은 마음의 기쁨과 평화, 인생의 참의미와 행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몽해항로는 흑해, 그 죽음을 향해 가는 험난한 길을 뜻한다. 꿈속 바닷길을 항해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고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깨 버리면 그만인 덧없는 꿈이지만, 그 꿈을 통해 인간의 상상력은 확대되고, 기존 현실과는 다른 현실을 탐색함으로써 삶의 지평은 확장된다. 그의 신선한 감각과 시어로 인해 새로운 세계와 삶의 영역을 경험하게 된다.

 이 시집에는 58편의 시가 게재되어 있으나, 몽해항로를 제목으로 한 시는 6편뿐이다. 나머지 시들은 짧고 간결해서 처연한 느낌마저 안겨준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대로  표현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죽음을 향해 가는 험난한 과정들을 쓸쓸하게 또는 따뜻하게 표현하고 있다.








 






몽해항로 1


-악공(樂工)




누가 지금

내 인생의 전부를 탄주하는가.

황혼은 빈 밭에 새의 깃털처럼 떨어져 있고

해는 어둠 속으로 하강하네.

봄빛을 따라 간 소년들은

어느덧 장년이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네.


하지 지난 뒤에

황국(黃菊)과 뱀들의 전성시대가 짧게 지나가고

유순한 그림자들이 여기저기 꽃봉오리를 여네.

곧 추분의 밤들이 얼음과 서리를 몰아오겠지.


일국(一局)은 끝났네. 승패는 덧없네.

중국술이 없었다면 일국을 축하할 수도 없었겠지.

어젯밤 두부 두 모가 없었다면 기쁨도 줄었겠지.

그대는 바다에서 기다린다고 했네.

그대의 어깨에 이끼가 돋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려네.

갈비뼈 아래에 숨은 소년아,

내가 깊이 취했으므로

너는 새의 소멸을 더듬던 손으로 악기를 연주하라.

네가 산양의 젖을 빨고 악기의 목을 비틀 때

중국술은 빠르게 주는 대신에

밤의 변경(邊境)들은 부푸네.











몽해항로 2


-흑해행


잡풀들이 무너져 키를 낮추고

들에 숨은 웅덩이들이 마른다.

가을 가뭄은 길고 꿈은 부쩍 많아지는데

사는 일에 신명은 준다.

탕약이 끓는데, 이렇게 살아도

되나, 옛날은 가고 도라지꽃은 지고

간고등어나 한 마리씩 먹으며 살아도 되나.

요즘 웬만한 길흉이나 굴욕은 잘 견디지만

사소한 일에 대한 인내심은 사라졌다.

어제 낮에는 핏물이 있는 고기를 씹다가

구역질이 나서 더 먹지를 못했다.

비루해, 비루해. 남의 살을 씹는 거,

내 구강(口腔)에서 날고기 비린내가 난다.

이슬람이라면 라마단 기간에 금식을 할 텐데,

금식은 얼마나 순결한가.

안성 시내에서 탄 죽산행 버스 안에서

취한 필리핀 남자 두 명을 만났다.

안성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겠지.

황국이 피는 이 낯선 땅에서 술을 마시며

헤매는 저 이방의 노동자들!


기온이 빙점으로 내려가는 밤

서재에서 국립지리학회보를 들여다보는데

뼛속의 칼슘들이 조용히 빠져나간다.

지난해 이맘때 자주 출몰하던 너구리가

올해는 보이지 않는다.

하천 양쪽으로 콘크리트 옹벽을 친 탓일까.

배나무에서 배꽃 필 무렵

잉잉대던 벌들도 올해는 드문드문 보인다.

주변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많다.

가창오리들이 꾸륵꾸륵 우는 소리 들으니

집 아래 호수의 물이 어는 모양이다.

꿈속에서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버스를 탄다.

누군가 흑해행 버스라고 했다.

검은 염소들이 시끄럽게 울어 댄다.

한 주일쯤 달리면 흑해에 닿는다고 했다.

나는 참 멀리도 가는구나, 쓸쓸한 내 간을 위하여

누가 마두금이라도 울려 다오,

마두금이 없다면 뺨이라도

철썩철썩 때려 다오, 마두금이 울지 않는다면

나라도 울어야 하리!











몽해항로 3


-당신의 그늘


구월 들어 흙비가 내리쳤다.

대가리와 깃털만 남은 멧비둘기는

포식자가 지나간 흔적이다.

공중에 뜬 새들을 세고

또 셌다, 자꾸 새들을 세는 동안 구월이 갔다.

식초에 절인 정어리가 먹고 싶었다.

며칠 입을 닫고 말을 삼간 것은

뇌수막염에 걸린 듯 말이 어눌해진 탓이다.

여뀌와 유순한 그늘과 나날이 어여뻐지는

노모와 함께 나는 만월의 슬하에 든다.

당신의 그늘을 알아,

당신에게 그늘이 없었다면

몇 그램의 키스를 탐하지 않았을 터다.

만월에는 오히려 성운(星雲)의 흐름이 흐릿하다.

금식 사흘째다. 모자를 쓰고

안성 시내를 나갔다가 원산지 표시가 없는

쇠고기를 먹었다. 중국에서는 부화 직전의

알을 깨서 통째로 씹어 먹는다고 했다.

사람의 식욕은 처절하다.

초승달이 뜨고 모란꽃 지던 밤은

멀리 있었다, 밤엔 잠이 오지 않아

따뜻한 물에 꿀을 타서 마셨다.

흑해가 보고 싶었다.

물이 무겁고 차고 검다고 했다.

날이 차진 뒤 장롱에 넣었던 담요를 꺼냈다.

안성종고 이영신 선생이 올해 텃밭 수확물이라고

고구마 한 박스를 가져왔다.

조개마다 진주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삽살개의 눈에 자꾸

눈곱이 낀다. 속병을 가진 모양이다.

집개는 아파도 아프다는 소리를 못하는데,

나는 치통 때문에 신경 치료를 받으러

두 달간이나 치과병원을 드나든다.

작년보다 흰 눈썹이 몇 올 더 늘고

바둑은 수읽기가 무뎌진 탓에 승률이 낮아졌다.

흑해에 갈 날이 더 가까워진 셈이다.












몽해항로 4


-낮에 보일러수리공이 다녀갔다


겨울이 들이닥치면

북풍 아래서 집들은 웅크리고

문들은 죄다 굳게 닫힌다.

그게 옳은 일이다.

낮은 밤보다 짧아지고

세상의 저울들이 한쪽으로 기운다.

밤공기는 식초보다 따갑다.

마당에 놀러왔던 유혈목들은

동면에 들었을 게다.

개똥지바퀴들은 떠나고

하천을 넘어와 부엌을 들여다보던 너구리들도

며칠째 보이지 않는다.


나는 누굴까, 네게 외롭다고 말하고

서리 위에 발자국을 남긴 어린 인류를 생각하는

나는 누굴까.

나는 누굴까.

낮에 보일러수리공이 다녀갔다.

산림욕장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속옷의 솔기들 마냥 잠시 먼 곳을 생각했다.

어디에도 뿌리 내려 잎 피우지 마라!

씨앗으로 견뎌라!

폭풍에 숲은 한쪽으로 쏠리고

흑해는 거칠게 일렁인다.


구릉들 위로 구름이 지나가고

불들은 꺼지고 차디찬 재를 남긴다.

빙점의 밤들이 몰려오고

물이 언다고

물이 언다고

저 아래 가창오리들이 구륵구국 구륵구국 운다.

금광호수의 물이 응결하는 밤,

기름보일러가 식은 방바닥을 덥힐 때

나는 누굴까.

나는 누굴까.












몽해항로 5


-설산 너머


작약꽃 피었다 지고 네가 떠난 뒤

물 만 밥을 오이지에 한술 뜨고

종일 흰 빨래가 펄럭이는 길 바라본다.

바람은 창가에 매단 편종을 흔들고

제 몸을 쇠로 쳐서 노래하는 추들,

나도 몸을 쳐서 노래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덜 불행했으리라.

노래가 아니라면 구업을 짓는

입은 닫는 게 낫다.

어제는 문상을 다녀오고,

오늘은 돌잔치에 다녀왔다.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작약꽃과 눈(雪) 사이에 다림질 잘하는 여자가

잠시 살다 갔음을 기억할 일이다.

떠도는 몇 마디 적막한 말과

여래와 같이 빛나는 네 허리를 생각하며

오체투지하는 일만 남았다.

땀 밴 옷이 마르면

마른 소금이 우수수 떨어진다.

해저보다 깊고 어두운 밤이 오면

매리설산(梅利雪山)을 넘는 야크 무리들과

양쯔강 너머 금닭이 우는 마을들을 떠올린다.

누런 해가 뜨고 흰 달이 뜨지만

왜 한번 흘러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가.

바람 불면 바람과 함께 엎드리고

비가 오면 비와 함께 젖으며

곡밥 먹은 지가 쉰 해를 넘었으니,

동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는 일만

남았다. 저 설산 너머 고원에

금빛 절이 있다 하니

곧 바람이 와서 나를 데려가리라.











몽해항로 6


-탁란


가장 좋은 일은 아직 오지 않았을 거야.

아마 그럴 거야.

아마 그럴 거야.

감자의 실뿌리마다

젖꼭지만 한 알들이 매달려 옹알이를 할 뿐

흙에는 물 마른자리뿐이니까.

생후 두 달 새끼 고래는 어미 고래와 함께

찬 바다를 가르며 나가고 있으니까.

아마 그럴 거야.

물 뜨러 나간 아버지 돌아오시지 않고

나귀 타고 나간 아버지 돌아오시지 않고

집은 텅 비어 있으니까.

아마 그럴 거야.


지금은 탁란의 계절,

알들은 뒤섞여 있고

어느 알에 뻐꾸기가 있는 줄 몰라.

구름이 동지나해 상공을 지나고

양쯔강 물들이 황해로 흘러든다.

저 복사꽃은 내일이나 모레 필 꽃보다

꽃 자태가 곱지 않다.

가장 좋은 일은 아직 오지 않았어.

좋은 것들은

늦게 오겠지. 가장 늦게 오니까

좋은 것들이겠지.

아마 그럴 거야.

아마 그럴 거야.




<한국시집 100선 감상>이라고 명명하여 연재를 시작했던 것이 드디어 마무리를 짓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이 읽은 시집 100권이군!’한다면 할 말이 없는 것이지만 100권의 두세 배 이상은 읽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좋은 책을 세상에 소개하고 제가 받은 것 이상을 세상에 기여하자는 소망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마지막 시집은 장석주 시인의 『몽해항로』입니다. 이 책을 읽노라니 요즘의 제 심사와 같은 내용이 많아서 오래전부터 이 시집으로 마무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연재를 시작한 것은 2013년 연초였으니 4년이라는 많은 시간을 소요한 셈입니다. 곧이어 <한국단편소설 100선>도 마칠 때가 다가옵니다. 제가 블로그를 시작한 것이 2007년이었습니다. 10년 가까운 시간을 블로그와 함께 해왔으니 이제 제 블로그도 종착역으로 서서히 다가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