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시집 『울고 들어온 너에게』
김용택(金龍澤, 1948~)은 모더니즘이나 민중문학 등의 문학적 흐름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시로 독자를 감동시킨다. 대상일 뿐인 자연을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여 절제된 언어로 형상화한 그는 김소월과 백석을 잇는 시인으로 부르고 싶다.
오늘날 우리가 잊고 사는 농촌, 풀 한포기, 어머니의 머리 기름 냄새 등에서 시인의 작품은 시작된다. 그에게 있어 애정의 대상은 주변 사람들, 또는 그냥 지나치기 쉬운 주위의 흔한 사물들에 대한 것이다. 때문에 도시의 독자 또한 시인의 그같이 섬세하고 여린 마음에 의해 우리의 근원인 농촌에 거부감 없이 다가설 수가 있다.
그의 시는 농촌에 대한 친근감 넘치는 묘사와 현상 파악에만 머무르지 않고 매서운 비판의 눈을 동반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의 시에서 여리고도 투명한 정서 속에 숨어있는 당당함과 옹골찬 목소리의 주인공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시인은 먼 옛날부터 전해오는 공동체에 대한 소박한 소망을 갖고 있다. 이러한 소박함은 요즘의 각박한 세태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일 것인데, 역으로 온갖 화려한 논리가 난무하는 현실에서 바로 이 순박함이야말로 끝까지 남을 진정성이다. 이는 시인의 세계관을 키워낸 농촌의 따쓰한 세계에서 발생한 민중적 여유이기도 하다.
울고 들어온 너에게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엉덩이 밑으로 두 손 넣고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되작거리다 보면
손도 마음도 따뜻해진다.
그러면 나는
꽝꽝 언 들을 헤매다 들어온
네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다.
조금은 아픈
가을은 부산하다.
모든 것이 바스락거린다.
소식이 뜸할지 모른다.
내가 보고 싶고 궁금하거든
바람이는 풀잎을 보라.
노을 붉은 서쪽으로
날아가는 새떼들 중에서
제일 끝에 나는 새가 나다.
소식은
그렇게 살아 있는 문자로 전한다.
새들이 물가에 내려 서성이다가
날아올라 네 눈썹 끝으로
걸어가며 울 것이다.
애타는 것들은 그렇게
가을 이슬처럼 끝으로 몰리고
무게를 버리고
온몸을 물들인다.
보아라!
새들이 바삐 걸어간 모래톱,
조금은 아픈
깊게 파인 발톱자국
모래들이 허물어진다.
그게 네 맨살에 박힌
나의 문자다.
하루
강이 있다.
건너면 산이다.
산이 시작되는 곳,
밤나무들이 서 있다.
감나무가 있고, 올라가면 묵은 밭이다.
칡들이 어린 팽나무를 타고 오른다.
묵은 밭 위에는 오래된 오동나무 위에 참나무 옆에
참나무 위에 산벚나무 위에 바위 옆에 도리깨나무
옆과 위에 또 아래 참나무 위에 소나무
그리고 소나무들이 다시 모여 있다.
바람이 불고
새들이 바람 속을 날아다녔다
그 동안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선생이 되어 살았다.
글을 썼다.
쓴 글 모아보았다.
꼬막 껍데기 반의반도 차지 않았다.
회한이 어찌 없었겠는가.
힘들 때는 혼자 울면서 말했다.
울기 싫다고. 그렇다고
궂은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덜 것도
더할 것도 없다.
살았다.
어느날
나는
어느날이라는 말이 좋다.
어느날 나는 태어났고
어느날 당신도 만났으니까.
그리고 오늘도 어느날이니까.
나의 시는
어느날의 일이고
어느날에 썼다
도착
도착했다.
몇 해를 걸었어도
도로 여기다.
아버지는 지게 밑에 앉아
담뱃진 밴 손가락 끝까지
담뱃불을 빨아들이며
내가 죽으면 여기 묻어라, 하셨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여기다.
일어나 문을 열면 물이고
누우면 산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해가 떴다가 졌다.
아버지와 아버지 그 아버지들, 실은
오래된 것이 없다.
하루에도 몇번씩 물을 건넜다.
모든 것이 어제였고
오늘이었으며
어느 순간이 되었다. 비로소
나는 아버지의 빈손을 보았다.
흘러가는 물에서는
달빛 말고 건져올 것이 없구나.
아버지가 창살에 비친 새벽빛을 맞으러
물가에 이르렀듯
또다른 생인 것처럼 나는
오늘 아버지의 물가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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