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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박영근 시집 『솔아 푸른 솔아』

by 언덕에서 2016. 10. 21.

 

 

 

 

박영근 시집 『솔아 푸른 솔아』

 

 

"이른 나이에 시인의 길로 들어서 이른 나이에 시인의 길을 접었지만 박영근1은 역사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게 맞서기 위한 치열한 싸움을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누군가는 평가했다.

 이 시집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시인의 ‘눈물’과 ‘어머니’의 세계는 ‘민중’이라는 범주로 대상화, 특권화할 세계는 아니요, 1970년대 이후 이 땅의 보통 사람들이 살아온 삶의 실상에 대한 애착이자 일종의 자기애의 표현으로 읽혀진다. 이 시집을 읽으면 자본주의의 삭막한 독주와 일그러진 가난한 일상들, 착잡한 분단 현실을 시인이 마땅히 회피하지 말아야 할 주제로 끌어안고 ‘사투’를 벌이는 시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결코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은 그의 내성(內省)의 진정성, 세기의 전환기에 우리 삶이 지불했던 역경과 도정의 쓸쓸함은 읽는 이로 하여금 시적 성숙과 감동을 느끼게 만든다. 세월이 흘러 이념의 다툼이 빛바래지면 그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불리어질 것이다.

 

 

 

 

 

 

 

 

 

편지 - 어머니에게

 

새떼들이 날아가고 있어요, 어머니

들판의 가득한 벼포기들도 오늘은

내 앞에서 자꾸만 흔들리고 있어요. 보고 싶은 어머니

만나야 할 얼굴들도 웬일인가요

고개 숙이고 내가 없는 곳으로

더 먼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가위질에 부르튼 손마디는 더 시리고

자꾸만 어디선지

눈물이 나네요, 어머니

외롭습니다.

 


 

 

 

 

 

 

 

솔아 푸른 솔아 - 백제6

 

부르네 물억새마다 엉키던

아우의 피들 무심히 씻겨간

빈 나루터, 물이 풀려도

찢어진 무명베 곁에서 봄은 멀고

기다림은 철없이 꽃으로나 피는지

주저앉아 우는 누이들

옷고름 풀고 이름을 부르네.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어널널 상사뒤

어여뒤여 상사뒤

 

부르네. 장맛비 울다 가는

삼년 묵정밭 드리는 호밋날마다

아우의 얼굴 끌려 나오고

늦바람이나 머물다 갔는지

수수가 익어도 서럽던 가을, 에미야

시월 비 어두운 산허리 따라

넘치는 그리움으로 강물 저어 가네.

 

만나겠네. 엉겅퀴 몹쓸 땅에

살아서 가다가 가다가

허기 들면 솔잎 씹다가

쌓이는 들잠 죽창으로 찌르다가

네가 묶인 곳, 아우야

창살 아래 또 한 세상이 묶여도

가겠네, 다시

만나겠네

 


 

 

 

 

 

 


서시

 

 

 

가다가 가다가
울다가 일어서다가
만나는 작은 빛들을
시라고 부르고 싶다

두려워 떨며 웅크리다
아주 어두운 곳으로 떨어져서
피를 흘리다 절망하는 모습과
불쌍하도록 두려워 떠는 모습과
외로워서 목이 메이도록
그리운 사람을 부르며
울먹이는 모습을,
밤마다 식은땀 흘리며
지나간 시절이 원죄처럼 목을 짓누르는
긴 악몽에 시달리는 모습을,
맺히도록 분명하게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고 부딪치고
부딪쳐서 굳어진 것들을 흔들고
흔들어 마침내
다른 모든 생명들과 함께
흐르는 힘을
시라고 부르고 싶다

일하고 먹고 살아가는 시간들 속에서
일하고 먹고 살아가는 일을
뉘우치는 시간들 속에서
때때로 스스로의 맨살을 물어뜯는
외로움 속에서 그러나
아주 겸손하게 작은 목소리로
부끄럽게 부르는 이름을
시라고 쓰고 싶다

 


 

 

 

 

 

 

 

 

이사

 

1

 

내가 떠난 뒤에도 그 집엔 저녁이면 형광등 불빛이 켜지고

사내는 묵은 시집을 읽거나 저녁거리를 치운 책상에서

더듬더듬 원고를 쓸 것이다 몇 잔의 커피와,

담배와, 새벽녘의 그 몹쓸 파지들 위로 떨어지는 마른 기침소리

누가 왔다갔는지 때로 한 편의 시를 쓸 때마다

그 환한 자리에 더운 숨결이 일고,

계절이 골목집 건너 백목련의 꽃망울과 은행나무 가지 위에서 바뀔 무렵이면

그 집엔 밀린 빨래들이 그 작은 마당과

녹슨 창틀과 흐린 처마와 담벽에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햇살에 취해 바람에 흔들거릴 것이다

눈을 들면 사내의 가난한 이마에 하늘의 푸른빛들이 뚝 뚝 떨어지고

아무도 모르지, 그런 날 저녁에 부엌에서 들려오는

정갈한 도마질 소리와 고등어 굽는 냄새

바람이 먼 데서 불러온 아잇적 서툰 노래

내가 떠난 뒤에도 그 낡은 집엔 마당귀를 돌아가며

어린 고추가 자라고 방울토마토가 열리고

원추리는 그 주홍빛을 터뜨릴 것이다

그리고 낮도 밤도 없이 빗줄기에 하늘이 온통 잠기는 장마가

또 오고, 사내는 그때에도

혼자 방문턱에 앉아 술잔을 뒤집으며

빗물에 떠내려가는 원추리꽃들을 바라보고 있을까 부러져나간

고춧대와 허리가 꺾여버린 토마토 줄기들과 전기가 끊긴

한밤중의 빗소리······ 그렇게

가을이 수척해진 얼굴로 대문간을 기웃거릴 때

별일도 다 있지, 그는 마당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누군가 부쳐온 시집을 읽고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물결을 끌어당기고 내밀면서

내뱉고 부르면서

강물은 숨쉬는가

 

2

그 낡은 집을 나와 나는 밤거리를 걷는다

저기 봐라, 흘러넘치는 광고 불빛과

여자들과

경쾌한 노래

막 옷을 갈아입은 성장(盛裝)한 마네킹들

이 도시는 시간도 기억도 없다

생(生)이 잡문이 될 때까지 나는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때로 그 길을 걸어 그가 올지 모른다 밤새 얼어붙은 수도꼭지를

팔팔 끓는 물로 녹이고 혼자서 웃음을 터뜨리는,

그런 모습으로 찾아와 짠지에 라면을 끓이고

소주잔을 흔들면서 몇 편의 시를 읽을지도 모른다

도시의 가난한 겨울밤은 눈벌판도 없는데

그 사내는 홀로 눈을 맞으며

천천히 벌판을 질러갈 것이다

 


 

 

 

 

 

 

 

 

가을비

 

길가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서

자장면 그릇 몇 개

서로 얼굴을 파묻고

비에 젖고 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빈 그릇 속으로 고이는 빗방울들

지나가던 행려의 사내 하나 그 모양을 보고 있다

어디 먼데

먼데로

흩어진 식구들 생각을 하나 보다

 

플라타너스가 젖고

빗속으로 가지들이 흔들리고

허공에 걸리는 새 울음소리

 

나뭇잎들이 길바닥에 낮게 엎드린다

온통 젖은 얼굴 한 장

흙탕물 튀어오르는 그릇 위로 떨어지고 있다

날이 더 저물면 한 번쯤 우레 소리가 건너올 것이다

 


 

 

 

 

 

 

 

 

김수영 시비를 보며

 

가을 잎들이 허공에 부딪치며 날아간다

바람 속에 온통 몸을 내맡기고

 

내 괴로울 때마다 그대에게 돌아가던 길들이

오늘은

바위 골짜기

낮은 물소리도 불타는 나무도 돌아보지 않고

산숲에 든다

 

어디쯤에서 길은 다시 물음이 되는가

바라보면 도봉(道峯),

산머리엔

새하얀 바위벼랑

 

겨울이 와서 남김없이 헐벗은 뒤

골짜기에 눈이 쌓이면

그대 빗돌에도 얼음이 얼겠다

 

  1.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민중문화운동연합,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 등에서 활동했으며, [예감] [내일을 여는 작가] [시평(詩評)] 등 잡지의 편집위원과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지회 부회장, 인천민예총 부회장,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 [취업 공고판 앞에서](청사),[대열](풀빛), [김미순전](실천문학사) ,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창작과비평사),[저 꽃이 불편하다](창작과비평사),산문집 [공장 옥상에 올라](풀빛) ,시평집 [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실천문학사) 등이 있고 주요 이력으로는 제12회 신동엽창작기금을, 제5회 백석문학상을 받았다. 오랫동안 인천 부평에서 살았으며, 인천광역시는 2015년에 시인이 자주 거닐던 부평구청 옆 신트리공원에 민중가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안치환 작곡?노래)의 원작시 ?솔아 푸른 솔아-백제 6?를 시인의 육필로 새겨 시비를 세웠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