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호 시집 『모르는 척』
길상호(1973~) 시인은 기존의 자연친화적인 서정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에 펼쳐져 있는 불안과 고통을 가감 없이 털어놓는 듯하다. 그의 시에서 보이는 사물어의 형태에 주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수족관의 겨울’에서 눈길을 끄는 사물어 ‘물고기’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일그러진 형태를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은 모두 화상을 입었거나, 광어狂漁가 되어가고 있거나 지독한 언어의 비린내를 풍기고 있다.
이는 시인과 동일시되는 시적 주체가 외적 억압의 현실 속에서 수인囚人의 시간을 가까스로 끌어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그 상한 몸의 물고기들을 가슴에 담아놓고 운문을 만드는 시인의 모습을 통해 그가 지니고 있는 세상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차 한 잔
묵언默言의 방
수종사 차방에 앉아서
소리 없이 남한강 북한강의 결합을 바라보는 일,
차통茶桶에서 마른 찻잎 덜어낼 때
귓밥처럼 쌓여 있던 잡음도 지워가는 일,
너무 뜨겁지도 않게 너무 차갑지도 않게
숙우熟盂에 마음 식혀내는 일,
빗소리와 그 사이 떠돌던 풍경 소리도
다관茶罐 안에서 은은하게 우려내는 일,
차를 따르며 졸졸 물소리
마음의 먼지도 씻어내는 일,
깨끗하게 씻길 때까지 몇 번이고
찻물 어두운 내장 속에 흘려보내는 일,
퇴수기退水器에 찻잔을 헹구듯
입술의 헛된 말도 남은 찻물에 소독하고
다시 한 번 먼 강 바라보는 일,
나는 오늘 수종사에 앉아
침묵을 배운다
모르는 척, 아프다
술 취해 전봇대에 대고
오줌 내갈기다가 씨팔씨팔 욕이
팔랑이며 입에 달라붙을 때에도
전깃줄은 모르는 척, 아프다
꼬리 잘린 뱀처럼 참을 수 없어
수많은 길 방향 없이 떠돌 때에도
아프다 아프다 모르는 척,
너와 나의 집 사이 언제나 팽팽하게
긴장을 풀지 못하는 인연이란 게 있어서
때로는 축 늘어지고 싶어도
때로는 끊어버리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감전된 사랑이란 게 있어서
네가 없어도 나는 전깃줄 끝의
저린 고통을 받아
오늘도 모르는 척,
밥을 끓이고 불을 밝힌다
가끔 새벽녘 바람이 불면 우우웅……
작은 울음소리 들리는 것도 같지만
그래도 인연은 모르는 척
구부러진 상처에게 듣다
삼성시장 골목 끝 지하도
너는 웅크리고 누워 있었지
장도리로 빼낸 못처럼
구부러진 등에
녹이 슬어도 가시지 않는
통증,을 소주와 섞어 마시며
중얼거리던 누더기 사내,
네가 박혀 있던 벽은
꽃무늬가 퍽 아름다웠다고 했지
뽑히면서 흠집을 냈지만
시들지 않던 꽃,
거기 향기를 심어주는 게
너의 평생 꿈이었다고
깨진 시멘트 벽처럼 웃을 때
머리카락 사이로 선명하게
찍혀 있던 망치 자국,
지하도는 네가 뽑힌 구멍처럼
시큼한 녹 냄새가 났지
거주자우선주차구역
직각의 선 안에 그는 쭈그리고 누워 있다 아직 시동을 끄지 못한 몸이 주차구역 선을 넘어 팔을 뻗는다 구멍 난 타이어처럼 헐거운 발은 힘겹게 바닥을 밀어내고 있다 부릉, 부르릉 공회전이 계속될 때마다 입에서는 연신 허튼 술 냄새, 단추 구멍이 목을 조여오면 아직 연소가 덜 된 쓰린 말들이 철판의 얼굴까지 일그러뜨린다 그러면 때를 맞춰 비추고 있던 가로등 불이 꺼지고 길들은 꼬리를 마는 것이다 이제 그는 내장까지 긁어 길을 쏟아놓는다 입으로 들어가 똥구멍으로 이어졌던 길들은 가끔 목구멍에 걸린다 숨이 막힌다 막 집으로 들어가려던 그녀가 그에게 한 마디를 내뱉는다, 남의 집 앞에서 뭐 하는 거예요! 더러워 죽겠네! …아, 여기 거주자우선주차구역이군요, 미안합니다, 당신은 그래도 저 사각의 방에 주차할 공간이 마련되어 있잖아요… 겨우 잠잠해졌던 사내는 길도 없이 다시 시동을 켠다
집 아닌 집 있다
집을 잘못 골라 든 게가 변을 당했다
파도횟집 접시에 올려진
소라를 빼먹으려고 보니
온몸에 화상을 입은 게 한 마리,
구멍 밖으로 내민 집게발에
찢긴 파도 한 자락 몰려있었다
단단한 믿음이었던 집이
소용돌이로 한 생을 삼킬 때 있다
억센 근육의 가장家長들 몇이 모여
빚더미 안주 삼아 술을 마시며
집 빠져나갈 계획을 짜고 있었다
수족관의 겨울
수족관에 엎드린 광어廣漁들,
얼마나 낯설었을까 유리 밖으로
눈 내리는 거리 미끄러지는 사람들
실눈으로 훔쳐보다가
눈송이 몇 개 수면에 닿으면
촉수 끝에서 부르르 떠는
생의 갈망도 얼마나 새로웠을까
허기를 잊은 뱃가죽 밑으로
뜰채가 가만히 손바닥 벌리면
마지막까지 내어주기 싫었던
바다의 기억으로 펄떡이는 고기들,
가시로 만든 서까래 흔들리면서
비늘의 기와지붕 무너지는 소리
완공도 되기 전 주저앉은 몸이
미친 듯 부르짖으면
광어廣漁는 광어狂漁가 되고 말겠지
눈송이 내려앉을 때마다
죽음은 싱싱하게 살이 오르고
그 무게에 납작하게 깔려
고기들 가쁜 숨 몰아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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