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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심보선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

by 언덕에서 2016. 6. 17.

 

 

 

 

 

심보선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1970~ )1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는 현실을 면밀히 관찰하는 투시력, 그 현실 가운데를 스스로 지나가는 짙은 체험, 그러면서도 거기에 이른바 시적 거리를 만들어 놓는 필력을 느끼게 한다. 시 속에 녹아있는 번뜩이지 않으면서도 눅눅히 녹아 있는 달관의 표현력, 때로는 미소를 흐르게 하는 유머 등은 서로 적당한 거리와 긴장감으로 조응하여 감탄을 자아낸다. 어떤 시는 살바도르 달리의 회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지만 난해하다는 느낌을 주진 않는다. 그리하여 이 시인은 이제껏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없었던 시적 공간을 선사한다. 근대 자본주의의 도래기에 한없는 도시의 우울과 그늘을 산책자로 관찰자로 부유했던 시인 보들레르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사유는 전범 없이 독창적이었다. 이 시인 역시 대도시의 현대적 삶의 리듬과 생활 조건을 파악한 대단한 시인이라 부르고 싶다. 이 시대는 더 이상의 극단을 예단하기도 두려운 후기 자본주의의 사회이다. 이 시인의 철학적 사유와 삶의 노래 또한 그렇게 보인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우리가 소년 소년였을 때

 

우리에게 그 어떤 명예가 남았는가

그림자 속의 검은 매듭들 몇 개나 남았는가

기억하는가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주말의 동물원은 문전성시

야광처럼 빛나던 코끼리와

낙타의 더딘 행진과

시간의 빠른 진행

팔 끝에 주먹이라는 결실이 맺히던

뇌성벽력처럼 터지던 잔기침의 시절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곁눈질로 서로의 반쪽을 탐하던

꽃그늘에 연모지정을 절이던

바보,라 부르면

바보,라 화답하던 때

기억하는가

기억한다면

소리 내어 웃어 보시게

입천장에 박힌 황금빛 뿔을 쑥 뽑아 보시게

그것은 오랜 침묵이 만든 두 번째 혀

그러니 잘 아시겠지

그 웃음, 소리는 크지만

냄새는 무척 나쁘다는 걸

우리는 썩은 시간의 아들 딸들

우리에겐 그 어떤 명예도 남아 있지 않다

그림자 속의 검은 매듭들 죄다 풀리고야 말았다

 

 


 

 

 

 

 

 

 

불어라 바람아

 

불어라 바람아, 너는 시대를 초월한 베이비 붐. 먼지의 절망으로부터, 태풍의 혁명까지, 가릴 것 없이 낳는, 너의 오만한 다산성 육체, 그 앞에서 숨 막히는 내 정신의 급체, 비등점까지 처참히 달아오르는 열등감, 사람은 바람의 지경을 꿈꾸고, 바람은 사람의 치욕을 가꾼다, 오거라 바람아, 아주 먼 데서 머리에 검은 띠를 묶고, 장거리주자처럼 달려오거라, 너 없이도 휘날리는 머리칼로, 너 없이도 펄럭이는 깃발로, 너를 맞이하는 날, 생의 오랜 냉가슴은 뜨거운 평안을 안으리, 놀라워라, 광풍이 불어도 한 치의 오류 없이, 제 그림자를 정확히 찾아 앉는 낙엽, 낙엽, 낙엽, 저 야윈 나무들의 하찮은 기적, 기적, 기적, 불어라 바람아, 바람이 불어도 사람은, 바람 속에서, 불멸을 숭배하는 하루살이의 날갯짓처럼, 사는 것이다,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버지, 옛집을 생각하며

 

이 방의 천장은 낮다, 점프

하지 않아도 천장에 닿을 수있다는 건 얼마나 속되냐

섀시 창문 밖으로 천장의 유혹을 간직하고

구름을 지나간다

 

아버지는 퇴근하면 가방을 열어

가방 모양의 공기를 마루 위에 쏟아내곤 했다

이야, 놀라워라 어린 자식들의 조건 없는 탄성이여

가끔씩 옛집을 생각하면

피융, 하고 양쪽 뺨을 스치며 앞뒤로 지나가는

기억과 망각의 총탄이여

 

이 집 안방에는 그러고 보니 깊은 절벽이 숨어 있다.

저 밑에는 도달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바닥

돌아보면 누이는 저만치 뒤에 있고 어머니는 더 뒤에 있고

더 뒤에는 무한의 더 뒤가 있고

더더더 뒤에는 그냥 장롱벽

거기 기대어 아버지

좌탈입망, 돌아가셨다

아버지 왼손에 쥐어진

위성TV리모컨

 

감자조림 미끼로 낚시질 가시던

빈 링거병 꽂고 누워 계시던

소싯적에 거 참 잘생기셨던

아버지, 망부 청송심씨후인

위패를 쓰다 난 으이씨, 하고 울었다

아버지, 어찌

죽음 갖고 아트를 하십니까

 

내가 좋아하는 곳은 옛집의 지하실

도망갈 수 있는 곳, 다시는 돌아가려 하지 않아도

이미 돌아와 있는 곳

평화가 린나이 보일러처럼 자알 작동하는 곳

 

나는 낮은 천장 아래 홀로

소파 뒤에 바짝 등을 붙이고

낮은 포복으로 몰려오는 미래를 빠끔히 내다보고 있다

 

가족들을 이 집 어딘가에서 소식도 없이

각자 잘 살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도주로

 

집을 나서는데, 아이 하나가 담벼락에 낙서를 하고 있다. 나는 옆에 선 채 가만히 지켜보기로 한다. "영철이랑 미영이는 사랑한대요. 씨발놈아, 미영인 내꺼다." 아이는 나를 보더니 주삣거리다가 후다닥 달아 난다. 너무 곧장 달음작질쳐서. 바로 앞에서 점점 작아지는 것 같다.

 

유심히 보면 담벼락 아래에는 잘게 부서진 백목 가루가 수북하다. 아이는 정말 온 힘을 다 주어서 꾹꾹 눌러 쓴 것이다. 허리를 굽혀 손가락에 묻혀본다. 씨발놈아, 미영인 내꺼다....... 참 부드러운 증오다.

 

가방 속엔 빈 도시락 통이라도 들었는지 소리가 요란하다. 아이는 벌써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지만 아직도 들려온다. 수치심이란 저렇게 오래도록 덜그럭거리는 것일까. 발걸음을 옮기다 나는 문득 본다. 수 많은 빗살들이 같은 쪽으로 도망치다가 컴컴한 그림자들로 길바닥에 와르르 넘어지고 있는 것을.

 

 


 

 

 

 

 

 

 

그녀와의 마지막 테니스

 

부처님 전에 절 올리고 나오는데 산등성이에 천 년 묵은 소나무가 실패한 개그처럼 애처롭네. 옆에 섰던 비구 스님 왈 우는 소리는 까마귀인데 우러러보니 득음한 신선이더라 하던 시대는 오래 전에 지났어. 그저 막막한 하늘이라 치고 어여 잠이나 자거라 나는 아직도 슬픔에 남몰래 집착하여 자목련 고양이 명멸 등의 낱말들이 내 유아독존의 길을 늙은 창녀처럼 막아서네. 그것 말고는 위풍당당 숭그리당당 유쾌하게 길을 걷지만 가끔 눈물이 기적적으로 흐르는 건 어쩔 수 없네. 어머니는 서른을 훌쩍 넘어 면허 딴 나보고 운전 잘하네 칭찬하다 우시네.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난 게지. 슬픔이 서류첩 사이사이 켜켜이 쌓여가는데 회사 인간들은 야근을 마치고 룰루랄라 노래방으로 향하네. 당신의 십팔번이 나의 십팔번일 때 한없이 흐려지는 존재감. 내가 제출한 사직서에 숨은 뜻은 없어. 단지 그 의지를 곱씹어 부드러운 섬유질의 슬픔을 맛보시라고 실직을 며칠 앞두고 나는 사랑하는 그녀와 테니스를 치다 나와 결혼해줘 외치네. 그녀는 멋진 백핸드 발리를 날리고 네트를 훌쩍 뛰어넘어 내게 다가와 속삭이네. 조만간 모든 것이 끝이 날 거야 모르겠니 매치 포인트라고...

 

 

 

 

 

 

 

 

 

  1.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과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사회학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대학시절에는 「대학신문」 사진기자로도 활동했으며,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경」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현재 경희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인문예술잡지 F』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슬픔이 없는 십오 초』 외에 『지금 여기의 진보』(공저) 등의 저서가 있으며, 현재 ‘행복의 사회학’을 화두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 「문화사회학적 견지에서 바라본 문화예술 경영의 시론적 고찰: 시민성, 지역성, 예술성 개념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