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이야기

역사왜곡과 영화 <덕혜옹주>

by 언덕에서 2016. 8. 24.

 

 

 

 

 

 

역사왜곡과 영화 <덕혜옹주>

 

 

 

 

 

 

 

 

권비영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덕혜옹주>를 보고 나오면서, 극의 전개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보기 드물게 완성도가 높다는 생각과 사실 관계에서 본다면 역사왜곡이 심하다는, 상반된 생각이 스쳤다.

 전자에 관한 평은 외국인들이 보면 더할 것이다. 인류 역사상 보기 드문 일제의 만행에 대해 한 번 더 치를 떨 테니까 말이다.

 후자에 관한 생각은 수애가 주연으로 나왔던 ‘불꽃처럼 나비처럼’이라는 영화에서부터 기인한다. 영화에서는 명성황후가 고종이 아닌 다른 남자와 혼전연애하였고 '무명'이라는 이름의 그 남자(조승우 분)는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다가 명성황후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돕는다. 듣자하니 ‘뮤지컬 명성황후’에서도 그녀를 사모하는 홍계훈1이라는 무인과의 로맨스가 등장한다. 역사책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러다 보니 어릴 때 보았던 신상옥 감독의 명성황후를 소재로 한 역사영화도 떠올랐다.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라는 제목의 영화로 기억하는데 명성황후를 ‘민비’라고 부르는 것도 일제의 잔재거니와 영화에서 명성황후는 자신을 시해하려는 일본 낭인들에게 권총을 쏘며 저항하는 여전사로 등장한다. 조선의 안젤리나 졸리? (아래 사진)

 

 

신상옥 작,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1965

 

 

 

 역사적 사실을 영화로 만들 때에는 객관적 사실(史實)에 입각해야 한다는 내 생각이다. 역사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없는 어린 학생들이 이런 영화를 본다면 과연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지 걱정된다. 이 영화 <덕혜옹주>를 본 이들에게 나라를 말아 먹은 이씨 왕실에서 망국 후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이 정설로 될까 걱정된다.

 <영화  ‘덕혜옹주2’>는 망국 황실 후예들의 서글픈 이야기다. 덕혜옹주 자신이 일본 땅에서 미쳐버린 것이나 망국의 백성들이 일제의 수탈에 신음할 때 그녀의 배다른 오빠인 영친왕은 일본군의 중장으로 호사를 누렸던 것도 그렇다. 영화 말미에서 덕혜옹주가 미쳐서 울다가 웃다가 하는 장면은, 나라를 일제에 통째로 헌납한 후 제 정신 갖고 살아내기 힘들었던 우리 민족의 혼란상을 상징하는 듯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史實, fact)과 극적 허구(fiction)는 구분해야 한다.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2009>의 한 장면, 명성황후와 호위무사 무명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덕혜는 고종의 고명딸로 늦둥이로 태어났다. 환갑에 얻은 늦둥이 외동딸을 고종은 무척 아꼈다. 아버지의 죽음, 일제의 독살로 의심되는 장면을 덕혜옹주는 직접 목격한다. 그 후 덕혜는 일본의 강요로 일본의 소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강제로 일본 땅에 와서 배다른 오빠인 영친왕의 집에서 살던 중 어렸을 적 약혼자였던, 김장한을 만나게 된다. 일본 육사를 차석으로 졸업했다는 일본군 장교 김장한을 보고 덕혜는 그가 친일파인 것으로 알았지만, 덕혜옹주를 위해서 왔다는 말을 듣고 오해를 거두고 친절하게 대하게 된다.

 어머니 양귀인을 만나기 위해 조선에 돌아가려 하지만 일제는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덕혜에게 일본을 위한 연설을 하면 조선으로 보내주겠다는 친일파 왕직 장관 한택수의 압력에 의해 연설을 하게 되지만, 연설 중 도열한 불쌍한 재일조선인의 모습을 보고 마음을 바꾸어 조선어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는 위로의 말을 하게 된다. 덕혜 때문에 일본 장군들로부터 혼이 난 한택수는 덕혜의 유일한 수족인 궁녀 복순을 한국으로 보내어 앙갚음을 한다. 이후 어머니 양귀인이 세상을 떠나고 덕혜는 혼자가 된다.

 독립운동 세력에 의해 덕혜옹주와 영친왕 부부는 중국으로 망명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김장한은 체포되고 덕혜는 소 다케유키(宗武志)라는 대마도 도주 집안의 일본 백작과 결혼한다. 덕혜는 딸인 정혜(소 마사에, 宗正惠)를 낳게 된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대한민국이 독립하자 귀국하려 하지만, 이승만 정부에 의해 입국 거부당한다. 이후, 덕혜는 정신분열증에 걸려서 정신병원에서 살게 된다. 기자가 된 김장한3은 5.16 이후 군사정부의 허락을 받아서 귀국하게 하고, 덕혜옹주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생을 마감한다.

 

 

 

 

 

 서두에 거론한 영화들도 그러하지만 이 영화는 유독 역사왜곡이 심하다.

 덕혜가 징용조선인들을 위로한 장면, 덕혜가 임정이 있는 상해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면, 강제로 도일하는 장면, 조선어 학교 세우고 싶다는 장면, 김장한의 독립운동 장면, 이우4 왕자의 독립운동 장면 등등...

 김장한의 형인 김을한은 일제 때 와세다 대학으로 유학하고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로서 친일활동을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김을한은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도 귀족으로 살다가 한국전쟁이 터지자 특파원이라는 구실로 온 가족이 일본으로 피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척 관계인 덕혜옹주를 다시 만난다. 덕혜 옹주는 우리말이 서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년에 그림처럼 그린 한글 실력이 전부였다고 전한다.

 

혼마 야스코;저. <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고종과 생모 귀인 양씨는 어려서부터 덕혜옹주를 일본유치원, 일본가정교사, 일본귀족소학교 등에서 키웠다. 덕혜옹주를 모시는 궁녀들이 걱정할 만큼 일본옷을 입고 일본어를 쓰며 자라났다는 증언도 있다. 일본어 동시(童詩)를 많이 지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선어로 지은 시는 없다고 하니 당시 이왕실(李王室)의 교육관을 엿볼 수 있다.

 역사적 사실(fact)와 극적 허구는 구별되어야 한다.

 덕혜옹주의 일본 유학은 왕족학교인 기쿠슈인으로 갔다고 알려져 있다. 오빠인 영친왕과 왕궁 수준의 대저택에 살며 시종, 하인, 말동무, 가정교사 등등 부족함이 없이 일본 왕실로 교육받던 중 정신병(조현병)이 발병한다.

 

 

신혼 때의 덕혜옹주와 남편; 소 다케유키(宗武志)

 

 

 

 덕혜옹주의 삶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서울·도쿄·대마도를 오가며 취재하고 자료를 모아 풀어낸 혼마 야스코(本馬 恭子)라는 일인 학자 덕분이다. 혼마의 조사에 따르면, 덕혜옹주는 18세 때부터 불면증을 겪다가 조발성치매 진단(1930년 5월)을 받았고, 증상이 약간 진정되자 혼담이 나오기 시작해 그해 11월 소 다케유키와 선을 보았다고 한다.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외동딸은 메이지대학을 나와 스즈키란 성의 남성과 1955년 결혼했으나 다음해 8월 행방불명됐다고 전한다.

 

 

 

 

 

 일제는 대한제국 황실을 붕괴시키고 우리 민족의 기를 꺾었다. 고종 황제를 ‘이태왕(李太王)’으로, 순종 황제는 ‘이왕(李王)’으로 격하했고, 이왕직(李王職)이란 기구를 만들어 황실을 관리했다. 영화 속의 한택수는 허구의 인물로 왕직 장관이라는 직함을 갖고 왕족들을 괴롭히는데 극적 재미를 위해서 일 것이다. 일제는 황실의 부활을 막기 위해 후예들을 일본으로 데려갔다. 고종과 순비 엄씨(淳妃嚴氏) 소생인 영친왕 이은(1897~1970)이 1907년 황태자로 책봉되는데, 당시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영친왕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시키고, 일본 여인 마사코5(方子)와 결혼시켰다. 그는 일본 육군 중장까지 지냈다.

 

 

 

덕혜옹주 입국 장면

 

 

 도쿄대를 졸업하고 갓스이 여대 교수를 지낸 혼마 야스코6는 1998년 일본에서 덕혜옹주 평전 『도쿠케이 히메(德惠姬)』를 펴냈다. 한국에선 2008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이훈 옮김·역사공간)로 번역됐다. 이 책에서는 도쿄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시인·화가·대학교수로 활동한 덕혜옹주의 남편 소 다케유키(宗武志)를 재평가 하는 등 일본인의 관점이 녹아 있지만, 덕혜옹주의 삶을 통해 일본이 한민족을 어떻게 정책적으로 말살해갔는지를 밝혀내고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행복> 등의 영화로 탄탄한 매니어층을 갖고 있는 허진호 감독은 혼마 야스코의 책 이후에 나온 권비영의 소설 『덕혜옹주』(2009년· 다산책방)를 영화 도입부에 자막으로 잠깐 언급했다. 권비영의 소설은 2010년, 혼마의『도쿠케이 히메(德惠姬)』를 표절했다고 논란이 일었다. 권비영의 소설은 팩트에 근거 두지 않은 감성에만 호소하는 황당함 자체여서 과연 ‘소설’이구나 하는 감탄을 불러 일으킨다.

 2시간(127분) 런닝 타임의 이 영화는 픽션의 극적 재미가 있었지만 이후에는 역사왜곡으로 두고두고 시비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간 쌓아온 '허진호 표' 영화의 명성은 탄식이 될지도 모르겠다. 

 

 

 

 

 

 

 

 

 

 

 

 

 

  1. (? ~ 1895)본관은 남양. 초명은 재희(在羲). 자는 성남(聖南), 호는 규산(圭珊).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 민비를 궁궐에서 탈출시킨 공으로 중용되었다.1893년 3월 동학교도들이 충청도 보은에서 척왜척양(斥倭斥洋)의 기치를 내걸고 대규모 집회를 갖자, 장위영정령관(壯衛營正領官)으로 경군 600명을 이끌고 출동했다.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되어 장위영 군사 800명을 거느리고 출전, 4월 7일 전주에 이르렀다. 농민군이 부안·영광 등 인근의 여러 읍을 휩쓸자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으며, 이어 영광으로 출진했으나 관군의 힘으로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도록 했다. 4월 27일(양력 5. 31) 전주성이 함락되자 완산에 진을 치고 농민군과 대치했다. 성내로 포격을 가하고 농민군의 공격을 격퇴하기도 했으나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는 않았다.전봉준(全琫準)의 폐정개혁안이 받아들여져 5월 7일(양력 6. 10)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고 농민군이 철수하자 강화병 200명을 남겨 성을 지키게 했다. 서울로 돌아와 농민군의 예봉을 꺾은 공으로 훈련대장에 임명되었다. 1895년 8월 일본군이 궁궐을 습격하자 군부대신 안경수와 함께 시위대 병력을 이끌고 방어하다가 전사했다. 1896년 군부대신에 추증되었으며, 1900년 장충단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본문으로]
  2. (1912 ~ 1989) : 조선시대에 왕실에는 후궁 소생의 수많은 옹주들이 있었지만 정비 소생의 공주보다 서열이 낮은 신분의 한계 때문에 역사적으로 조명 받지 못했다. 그나마 세간에 알려진 인물로는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사도세자의 동생 화완옹주와 망국의 황제 고종의 말년을 행복하게 해주었던 덕혜옹주를 들 수 있다.고종에게는 일찍이 9남 4녀의 자식이 있었지만 대부분 어렸을 때 죽고 장성할 때까지 생존한 사람은 명성황후 민씨 소생의 순종 이척, 귀인 장씨 소생의 의친왕 이강, 황귀비 엄씨 소생의 영친왕 이은, 복녕당 양씨 소생의 덕혜옹주까지 3남 1녀뿐이었다. 그 때문에 덕혜옹주는 고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애지중지 키워졌다.덕혜옹주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희망을 잃고 살아가던 한국인들에게 조선의 추억을 일깨워주는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발랄하던 어린 시절 아버지 고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부터 공포에 휩싸여 살았으며 신식 여성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간 뒤에는 우울증에 고독감까지 겹쳐 실어증에 걸렸다.몇 년 뒤 어머니 귀인 양씨의 죽음으로 덕혜옹주의 심리 상태는 벼랑 끝까지 몰려 정신분열증으로 비화되었지만 냉혹한 일제는 정략결혼을 통해 그녀를 더욱 비좁은 새장 속에 가두어 버렸다. 그 때문에 병세가 심화된 그녀는 딸과 생이별하고 사방이 가로막힌 정신병원에서 청춘을 흘려보내다 남편에게 버림받았다. 말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창덕궁 낙선재에 안주했지만 이미 영혼이 떠나버린 그녀의 육신은 아득한 유년의 기억만을 남긴 채 파랑새처럼 저 세상으로 훌쩍 날아가 버렸다. [본문으로]
  3. 김장한(1910년 ~ ?)은 고종 황제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기자인 김을한의 동생이며 덕혜옹주의 약혼자였다. 고종이 덕혜옹주와 어릴 때 부터 정해 놓은 약혼자이지만 고종이 독살을 당하면서 약혼은 깨지고 말았다. 형은 김을한이며 박정희 정권 당시 기자로써 덕혜옹주의 귀국을 도왔다. [본문으로]
  4. 이우(李鍝, 1912년 11월 15일 ~ 1945년 8월 7일)는 대한제국 황실의 후예이자 일본 제국의 군인이다.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의 차남이다. 본관은 전주, 초명은 성길(成吉)이며, 아호는 염석(念石), 상운(尙雲)이다.[1] 1917년에 흥선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이 사망하자 당숙의 양자로 입적되어 운현궁의 4대 종주가 되었다. 운현궁을 상속한 후에 공위를 세습 받아 ‘이우공 전하’라는 공족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사망 이후에 사시인 흥영군(興永君)에 추봉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사동궁에서 태어나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계급이 중좌에 이르렀다.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인과의 결혼을 강요받았지만, 조선인과 혼인하기 위해 저항하여 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와 결혼하였다. 1945년 8월 6일에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자 폭탄에 피폭되어 8월 7일에 히로시마 시 니노시마에서 사망하였다. 1945년 8월 15일에 경성운동장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의 운현궁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 [본문으로]
  5. (1901 ~ 1989) : 일본왕족 나시모토(梨本宮)의 장녀로 1918년 일본 가쿠슈원[學習院]을 졸업한 뒤, 1920년 4월 한일융화의 초석이 되라는 일본왕의 명령에 의해 대한제국의 황태자인 이은과 강제로 정략혼인을 하였다. 그 뒤 일본에서 왕족의 대우를 받으며 생활하였다. [본문으로]
  6. 일본 나가사키현 출신의 여성사 연구가. 일본 도쿄대학 문학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88년까지 나가사키 현립 및 사립 고등학교에서 국어과 교사로 근무하였고, 그 후 캇스이 여자대학 문학부 일본문학과에서 전임강사로 후학을 지도하였다. 저서로는 『오우라 케이죠덴 노트』가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