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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옛날의 금잔디

미안함을 전하다

by 언덕에서 2016. 6. 7.

 

 

 

미안함을 전하다

 


 

땀을 많이 흘리는 관계로 여름이 오면 걱정이 앞선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더 길어진 여름을 어떻게 슬기롭게 이겨내느냐 하는 걱정 때문이다. 담배를 끊은 것은 2년이 넘지만, 그전에 끊은 것이 하나 더 있다. 여름을 이기는데 특효라는 보신탕을 안 먹기로 한 것인데 나 스스로 한 그 약속을 10년 전부터 지금껏 잘 지키고 있으니 이는 스스로 칭찬할 만한 일이다.

 열 살 즈음에 어머니가 ‘소고깃국’라고 천연덕스럽게 속였던 때문에 개장국을 먹은 적이 있다. 당시는 고깃국을 구경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먹게 되었지만, 개고기가 소고기나 돼지고기에 비해 유별나게 맛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제외한 형 두 명은 식성이 무척 까다로웠기 때문에 이후 우리 집 밥상에서 더는 개장국을 구경할 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 직장생활을 하면서 보신탕을 본격적으로 먹게 되었다. 직장 동료들이나 거래처 직원들과 점심을 함께하게 되는 더운 여름날에는 누군가가 ‘보신탕이 어떠냐? 고 권유하곤 했다. 처음에는 못 먹는다고 완강하게 거절했으나, 어느 선배로부터 ‘동료나 손님들과 식사를 잘하는 것이 직장생활을 잘하게 되는 첩경’이라는 충고를 들은 후부터 오기(傲氣)로 보신탕을 먹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로 인해서 분위기를 망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앞장서서 보신탕을 먹자고 나설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할 수 없이 따라가 먹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보신탕을 먹은 후에는 속이 비교적 든든한 느낌이 들었고, 늦은 저녁까지 버텨도 공복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동료들은 이 점을 강조하면서 보신탕이 건강과 정력에 좋은 이유라는 주장들을 하는 것이었지만 상상력이 과다한 듯보였다. 이후부터는 친구들을 만나 술자리를 갖더라도 누군가가 ‘개고기 어때?’하면 ‘그러지 뭐’하면서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름대로 몇 년은 개고기 음식을 먹고 다녔던 것 같다.

 

 

 그즈음에 방송에서는 애견 열풍이 불어 전국적으로 집집이 개 한 마리 정도는 키우는 분위기가 되었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과 6학년이었던 두 아이는 개를 키우게 해달라고 부모를 조르는 것이 하루의 중요한 일과였다. 나 역시 주인의 말을 잘 듣고 기쁨을 주는 개 한 마리 정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망설여지기 시작했다. 주변 지인들의 말을 들어보니 개 한 마리 키우는 것이 아이 한 명 키우는 것만큼의 정성과 비용이 든다고 모두 입을 모아서 충고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개가 집을 어지를 것이 뻔하고 개의 관리에 대한 책임 소재를 분명하게 하지 않는 상태에서 개를 키우는 것을 절대 반대한다고 공언했다. 아내와 아이들의 의견을 절충한 끝에 두 아이가 개밥 주는 일을 함과 동시에 배변을 처리하고 목욕과 산책 등은 가족 전체가 돌아가면서 맡기로 했다. 당시 텔레비전의 '동물농장'이라는 프로에서 인기를 얻던 ‘잉글리시 코카스파니엘’이란 견종 강아지를 샀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채 안 된 상태이니 아주 어린 강아지여서 귀여웠지만 배변 훈련이 안되어 있었고, 어미와 젓을 뗀 지 얼마 안 된 탓인지 자주 울었다.

 문제는 키우기 시작한 사흘 정도가 지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내는 개가 집안을 어지럽힌다며 활동 영역을 케이지(Cage) 안으로만 한정시키기 시작했고, 그렇게 하니 아이들의 개에 대한 관심은 점점 줄어갔다. 케이지 안에서만 키우니 개의 배변훈련은 점점 더뎌서 급기야 두 아이가 서로에게 개똥 치우는 일을 미루기 시작했다. 키우기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어서는 두 아이의 관심에서 가아지는 아예 멀어진 듯 보였다. 최초의 높은 관심과는 달리 강아지가 없어도 좋은 상태가 되고야 만 것이다. 외로우면 사람이 정신병에 들듯 개도 그렇게 된다고 한다. 아침 이후로는 집에 아무도 없다가 오후 늦게 아이들이 귀가하더라도 그들은 강아지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반려견에 관한 막연한 동경이 얼마나 큰 문제를 만드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이러한 나의 고민을 듣던 부하 직원 한 명은 자신의 아이들이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하니 그 강아지를 맡게 해달라고 부탁해왔다. 그 집은 엄마가 전업주부이니 우리 집보다 몇 배 유리한 상황이기도 했다. 강아지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심하던 차에 출구가 생긴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니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강아지를 돌보지 않으니 방법이 없다’며 양해를 구하고 강아지와 애견용품 일체를 부하 직원에게 주어버리기로 했다. 부하 직원은 휴일에 차를 갖고 우리 집을 찾아왔는데 마침 그때 큰 아이는 안타까운 마음이었는지 부하 직원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까지 따라 내려갔다. 강아지가 뒷좌석에 실리자마자 떠나는 차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자유와 선택이라고 불리는 모든 행동 뒤에는 책임과 의무가 뒤따른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인데, 아버지가 지녀야 할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음을 고백해야겠다.

 이후 몇 달이 지나서 그 부하 직원에게 강아지가 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놀랍게도 그는 그 강아지를 이미 다른 집에 넘겨버렸던 것이다. 나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가 내게 강아지를 양도받을 때는 최선을 다해 잘 키우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 그가 '못 미더운 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기대를 배신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는 상사들로부터는 책임감이 없다는 혹평을 받고 있었으며, 부하 직원들로부터는 과격하고 몰인정한 상사로 불리고 있었다. 뭔가 궁지에 몰렸다는 생각에 깊은 고려를 하지 않고 덥석 결정을 내려버린 나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이런 생각을 하는 그 밑바닥에는 내 어린 시절의 개에 대한 많은 기억이 얽혀있다.

 내가 너덧 살 때 집에서 키우던 작은 개 발발이는 친구에 다름 아니었다. 내가 옆집의 큰 개에게 물리는 장면을 목격한 발발이는 자신보다 덩치가 배는 큰 그 개를 향해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이었다. 거의 50년 전의 일이지만 그 광경을 잊을 수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부모님은 우리 형제들에게 발바리를 없앨 것이라는 말을 했다. 고모부 약에 쓸 리라는 것이었다.

 당시 같은 동네에 아버님의 누님인 고모님 댁이 있었는데 고모부님은 중증의 당뇨병을 앓고 있었다. 의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 당뇨병은 소갈증으로 불리고 있었고 치료법으로 고단백의 영양식을 권장하곤 했다. 한 번씩 우리집에 다니러 오면서 발바리를 눈여겨본 고모님께 부모님은 발바리를 양도했고, 어느 날 내가 보는 앞에서 발발이는 피투성이가 되어가면서 죽었다. 망치로 개의 주둥이와 머리 부분을 쳐서 도살하던 그 장면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몽골이나 카자흐스탄의 유목민들은 양이나 소 등의 짐승을 도축할 때 최대한 짧은 시간에 고통 없이 죽이는 것을 미덕으로 한다. 그날 발바리를 도살했던 이웃의 ‘개 잡는 이’는 전혀 그렇지 못했는데, 초보여서 그랬는지 한 시간여를 씨름하며 끌다가 겨우 발발이의 숨을 멈추게 했다.

 발발이 이후에 키웠던 또 다른 개 생각도 난다. 그때는 가난하기 짝이 없던 시절이어서 밥찌꺼기 버리는 것이 아까워서 개를 키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우리 집도 그랬다. 문제는 키울 때 정을 너무 많이 주게 되고 개는 그에 상응해서 주인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보답하기 때문에 마음 아픈 기억이 생기게 된다. 또 삼복 더위 때 키우던 큼직한 누렁이를 어머니에게서 산 개장수 둘은 동네 뒤편의 큰 소나무에 개를 매달았다가 떨어뜨렸는데 녀석은 용케도 목줄을 풀고 도망 와서 우리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와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물과 밥을 먹였는데 누렁이는 그 와중에서 꼬리를 흔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그 순간은 잠시였다. 누렁이를 놓쳐버린 개장수들이 집에 들이닥친 것이다.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가엾은 누렁이 모습에 어머니는 개장수에게 ‘받은 돈 다 줄 테니 없었던 일로 하자’며 거래를 취소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이루어진 계약을 파기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그때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하여 앞으로 벌을 받아도 많이 받겠다’면서 침통해 하셨는데 그 말씀은 나이가 든 지금에도 유달리 기억에 남는다.

 벌써 10년이 훨씬 지난 일이지만 부하 직원이 내 의사를 묻지 않고 강아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주어버린 일은 다시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 불쌍한 강아지는 유기견 보호소에서 안락사를 당했거나 보신탕 집으로 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 자신의 사려 깊지 못함으로 강아지와 가족들에게 깊은 상처만 남겼다. 그 일이 있은 이후 반성하는 의미에서 개고기를 먹지 않기로 했다. 물론 그 사이에 보도된 비위생적인 도축이라든지 보관상태에 대한 언론의 보도가 충격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반려견으로 인해 어린 시절 받았던 상처를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다시 주고 있다는 판단은 세상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세상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갖은 '수고'를 바쳐야 하지만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죽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깊어짐을 느낀다. 별을 노래할 능력은 되지 않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