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밥벌이의 지겨움

by 언덕에서 2016. 3. 18.

 

 

 

밥벌이의 지겨움

 

 

청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30년 전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에도 취업이 어려웠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문과 출신만. 더 범위를 좁히면 상경계 외의 문과는 취업이 어려웠다는 말이 솔직할 것이다. 학과(學科)에서 50명가량이 졸업을 앞두고 있었으나 졸업식 당일, 취업이 결정된 이는 나를 포함한  5명에 불과했다. 9급 공무원 자리는 널리고 널렸으나 대졸이 어떻게 그런 곳에……. 라는 생각에 응시하지 않았고, 7급 공무원 시험은 행정고시 떨어진 이들이 갈 곳 없어 치는 자리인 줄 알았다. 7급 공무원 갈 바에야 방향을 틀어서 그 노력으로 대기업이나 공사에 시험 치자는 의식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졸업 후 2년 정도가 지나자 대강의 동기생들이 취업을 마친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9급 공무원 시험도 몇 백 대 일이라고 한다. 불경기 탓이다. 세상이 이리 바뀔 줄 어찌 알았겠는가?

 대학 4학년 그때, 당시도 온통 절망적인 말들뿐이었다. 노력하다보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긍정의 생각으로 버텼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첫 직장은 지금까지 살던 환경과 너무나 달라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내가 싫으면 안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았는데 날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사랑해주던 사람들만 있었는데 학교가 아닌 사회는 그야말로 갑과 을의 계약관계. 딱 그거였다. 밥값을 해야 했고, 상사들의 비위를 맞추고, 눈치를 봐야하는 이 상황들이 도무지 적응이 안 되고, 행동은 더 힘들던 것이었다. 밥벌이의 고달픔이 인생의 본질임을 알게 된 시절이었다.

 

 

 영업처를 방문하여 쫓겨나던 날이면 밤마다 눈물을 흘리며 잠들었고, 출근길은 감옥에로 끌려가는 죄수의 심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잊지 못할 사건이 일어났다. 세상살이란 아무리 어두운 곳이라도 한줄기 빛은 비치기 마련인데, 두 해 정도 선배 중에 명문대 출신으로 전사영업왕(全社營業王)으로 불리던 K가 있었다. 그가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고 영업을 총괄하던 임원은 이를 계속 반려하고 있다는 소문이 그것이었다. 당시 우리가 판매하던 포크레인 즉, 굴삭기라는 고가의 건설 중장비는 요즘 굴착기로 불리는 듯하다. 경쟁사는 IMF때 공중 분해된 D중공업이었는데 6 : 4 정도로 내가 다니던 회사가 시장 점유율에서 뒤지고 있었다. 회사는 D사에 시장점유율이 뒤지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고 영업부서에 압박을 가했다.

 잘 나가던 K가 사표를 제출한 이유는 의외였다. 당시 매월마다 실적 압박에 시달리던 우리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내걸며 영업을 하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이를테면 일단 팔아놓고 뒤에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의였다. 돌산(石山)에 부적합한 장비를 그곳에서 작업하더라도 끄떡없다며 허언하며 팔기도 했으며 생산계획상 그달 출고가 불가능함에도 경쟁사에 수주를 뺐기지 않기 위해 엉터리 출고 약속을 하기도 했다. 그중에서 가장 문제는 ‘장비를 구입하면 그룹 건설회사에 이야기하여 작업장(일터)을 마련해주겠다’는 약속이 그것이었다. K는 재래시장에서 참기름 가게를 하던 이로부터 구매 문의를 받았던 모양이다. D사와의 시장점유율에 스트레스를 받던 K는 참기름 가게 사장에게 굴삭기 사업 전망이 좋으며 초보사업자임을 감안해서 작업장을 마련해보겠다고 하여 기계를 팔았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 이후 건설업에 문맹과 같았던 참기름 사장은 할부금을 제대로 갚지 못했고 무너지고 말았다. 구입 시 할부 때문에 근저당 되어있던 굴삭기는 압류되고 말았다. 빚 갚기에 급급하던 그는 참기름 가게를 팔았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K의 실적 압박은 단란한 한 가정을 박살내고 말았던 것이다.

 K와 영업총괄 임원이 면담을 하는데 그 장소가 내 책상과 멀지 않아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다.

● 전무 : 자네 잘못이 아니지 않는가? 회사일 잘하려다 결과가 이래 된 것이지.

○ K    : 저 때문에 한 가정이 파탄났습니다. 저는 과장(誇張)된 언행으로 그분의 삶을 망쳤습니다.

● 전무 : 영업 사원이 더 팔려고 하다 그렇게 된 것을 누가 나무라겠는가? 책임자로서 당신의 사표를 반려하고 싶네. 지금 회사를 떠나면 뭘 할 건가? 젊은 사람 미래를 망치고 싶지는 않네.

○ K    : 어떤 이유로도 제가 지은 죄는 그분들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제 입장만 생각하고 한 가정을 파탄냈습니다.

● 전무 : 그렇게까지 생각한다면 나도 더 이상 말리지 않겠네. 이건 자네의 철학이구만. 자네와 같은 양식 있는 사람과 근무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하겠네.

 

 

 그들의 대화를 통해서 직장생활, 즉 밥벌이를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기업이라고 해도 실적을 위해서는 비윤리적인 활동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어린 내가 간과했기 때문일 것이다. 구성원이 이익을 추구할 수밖에 없으며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기에 일어난 일이다.

 금수저를 물었던 사주(社主)는 노사분규를 밥 먹듯 하는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그 굴삭기를 만들던 그 회사는 스웨덴의 자동차 회사로 팔리고 말았다.

 회사의 배려로 그룹에서 운영하던 무역회사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그 회사에서 나의 업무는 영업부서를 도와주는 이른바 허드렛일이었는데 내 책상 바로 옆에 위치한 영업 부서에는 마흔을 바라보는 사원이 한 명 근무하고 있었다. 어찌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얼굴은 항상 검게 보였다. 근무하면서 이 사람이 일본 거래처와 통화하는 것을 들으니 일본 원어민처럼 유창했다. 그러나 그는 고졸(高卒)출신이라는 자신의 흙수저에 늘 좌절하곤 했다. 그는 내게 영업 실적 때문에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곤 했다. 어느 날부터 회사에서 그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그 부서 여사원에게 물어보니 건강이 좋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했다. 5년 후 그를 거리에서 우연히 만날 수 있었다. 동남아인을 연상시키던 검은 얼굴이 하얀 얼굴이 되어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간장 대리점을 차렸는데 수입은 많지 않지만 마음이 편해서 몸의 병이 완전히 다 나았다고 했다. 건강이 최고의 재산이다. 행복은 돈을 많이 버는 것과 비례하지만은 않는다.  

 

 

 당시 내가 사원일 때 모시던 부장은 K고와 S대 상대를 졸업한 재원이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당시 그룹 계열사 사장들의 필수 코스라는 J모직 경리과장 출신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가 윗사람에게 아부나 아첨은 아닐지라도 그와 비슷한 덕담이나 낮은 자세를 보이지 못한다는 면이 그것이었다. 예를 들어 회사의 공식행사로 1박 2일 일정으로 산행을 가서 그곳에서 회식이 시작되면 대부분의 간부들은 힘 있는 임원 옆에서 술시중에 열중하기 마련인데 그는 독야청청 혼자서 외딴 곳에 텐트를 치고 독서나 단전호흡 등에 열중해 있곤 했다. 사내영업에 무관심했던 그는 결국 임원이 되지 못했는데 반강제로 명예퇴직 당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좌절하고 말았다.

 “아, 능력과 성실함만 가지고는 잘 살 수 없구나!”

 그와 닮았던 나는 10년 후, 그의 모습 그대로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다. 21세기의 대한민국 그 천민자본주의 속에서 송양지인(宋襄之仁)이 지켜지리라 믿는 헛된 망상은 그저 허망한 꿈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IMF가 터지고 내가 근무하던 회사가 공중 분해될 때 그 순간을 함께 했던 친구들 중 유독 기억되는 친구가 있다. 미국에서 자라나 그곳의 유명공대를 나온 김승환 과장. 당시 우리는 사십을 바라보는 나이였는데 회식자리가 시작되면 그는 망설이지 않고‘흥부가 기가 막혀’라는 노래를 서양식 율동을 곁들여 부르곤 했다.

 자녀들이 게임에 빠져있으면 야단치기보다는 함께 즐긴다는 이 신세대 아버지는 한국이 싫어서 미국이란 나라로 이민을 가고야 말았다. 어릴 때부터 미국에서 자랐던 그는 한국의 위계질서가 강한 직장 분위기가 힘들었음에도 잘 견뎌내었다. 그러나 회사가 공중 분해되고 그 과정에서 사원들의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는데 그 무질서함과 폭력적인 면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메일로 편지를 보내봤는데 답장이 왔다. 그 답장은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한국 대기업에서의 간부생활보다 이곳에서 노가다 하는 것이 내 정서에 맞는 것 같소. 그러나 한번씩 비 오는 여름날 경복궁 앞 그 식당에서 후후 불며 먹던 칼국수가 왜 이리 자주 생각나는지 모르겠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시절 아쉬웠던 만남과 함께 자조했던 말이 떠오른다. '성실한 사람이 잘 산다'는 말은 진실에 가깝기는 하지만 살아보니 반드시 그렇게 적용되지 않아 아쉽기 짝이 없는 경구(警句)이기도 하다.

 “아아, 성실한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잘 살지 못한다. 시대는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