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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잘 가시오, 가까이서 오래 사귄 이여

by 언덕에서 2016. 7. 1.

 

 

 

 

 

잘 가시오, 가까이서 오래 사귄 이여

 

 

 

 

 

요즘 나는 가슴 한군데가 텅 비어 있는 느낌이다. 그런 경험은 없지만, 수술을 받아 신장이나 폐와 같은 중요한 장기 하나를 베어낸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것은 지난주 친구 한 명이 죽어 빈소에 다녀왔기 때문인데 두 가지 사항이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첫째는 아직 생생해야 할 나이의 그가 갑자기 죽었다는 사실 때문이고, 또 하나는 그의 부음을 받은 지인들의 이기적인 모습에서였다. 죽은 친구는 최근 타지방에 살았던 관계로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해마다 한 번 정도는 만나왔으며 매월 한 번꼴 이상 통화를 주고받아 왔다.

 내가 서른다섯 살이던 해, 새로 전입한 회사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그 회사는 갓 설립되어 회사의 뼈대를 만드는 중이었는데 임시로 만들어진 부서에서 상사와 부하의 관계로서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나보다 두 살 나이가 많았지만 ‘대리’ 직함을 갖고 있었고 ‘과장’의 직함을 가진 내게는 부하 직원 격이었다(육 개월 후에 그는 과장이 되었다).  서먹하게 지내던 어느 날 부서 회식이 있었고, 그날 자리가 파하자 같은 방향이었던 그와 택시를 함께 타게 되었는데 친해지려고 그랬는지 그가 내게 한잔 더 할 것을 청했다. 그는 우리가 근무하던 그룹사의 전자회사에서 노사(勞使) 관련 업무를 하고 있었고 나는 무역회사에서 자재(資材) 관련 업무를 하고 있었기에 업무상 관련이 없음을 서로 확인하게 되었다. 그는 내게 ‘누군가가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나를 내려보낸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며 그간 마음을 열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자신의 옹졸함이 한심하다고 진솔하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밥벌이의 지겨움이란 이런 것일 것이다. 많은 시간을 직장에서 밥벌이하기 위해서 보내야만 했지만 가장 큰 애로사항은 참으로 가엾고 가벼운 인간사를 봐야만 하는 일이다. 사람 대부분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없는 사실을 만들어 특정인을 비방하기 일쑤고, 자신이 잘 되기 위해서 선량한 특정인을 매장하기도 한다. 이른바 성실한 사람이 잘사는 사회가 되지 않고, 약삭빠르고 기회주의에 민감하며 아첨과 아부에 익숙한 이들에게로 우선순위가 귀결되는 사항이 비일비재한 조직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처세술에서 능수능란하지 못한 나는 주변의 모함으로 몇 번의 구설에 올라 곤경에 처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는 ‘정의는 항상 승리한다’든가, ‘하늘이 당신의 진실을 안다’는 등의 응원을 하며 나를 격려해주었다. ‘정의는 항상 이긴다’는 투의 격언이야말로 패자들이 자신을 격려하기 위해 만든 상투적인 변명에 불과한 것이지만 당시 그의 언변이나 지식을 고려한다면 그가 내게 할 수 있었던 최고의 격려였을 것이다.

 이후, 그가 회사의 감사를 받으며 중징계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회사를 위한다는 소명 하에 수행한 업무가 징계로 결론 났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밤늦은 시간까지 그와 술잔을 나누었는데 ‘인생이 별것 아니니 용서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내 말에 ‘어떻게 그들을 용서해!’하며 서운해하던 모습도 떠오른다. 당시의 나도 조직 내의 특정세력에 많은 고통을 당한 뒤여서 서슴없이 그런 표현을 할 수 있었던 듯하다. 그 특정세력이라는 것은 오늘날 신문이나 방송에서 접하는 학연, 지연, 특정 조직 출신 등과 겹치는 사람들인 것을 보면 그 세력들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지도 늦게나마 알 것 같다.

 이후 우리가 함께 근무하던 그 자동차 회사가 프랑스 계열의 다국적기업에 넘어가고 난 후 헤어지게 되었는데, 우리의 만남은 공적인 관계만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틈만 나면 그가 근무하는 그 도시로 찾아가서 그를 만나서 세상사의 괴로움을 털어놓았고 그 역시 그랬으니 말이다.

 

 

 

 어쨌든 친구의 죽음이 계속해서 내게 생의 허무함을 느끼게 한다는 자체가 나 자신을 놀라게 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나는 한두 사람 외에는 우정이나 친구와의 신의 같은 것에 큰 비중을 두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여러 명의 좋은 친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젊은 시절에는 그들과 어울려 함께 술을 마시며 많은 나날을 지내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어쩌다 친구들과 함께 자리하면 친구라는 존재가 서로의 영혼을 교감하는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  일종의 사교적 파티에 동참한 의례적인 손님처럼 느껴지곤 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생명까지 나눌 수 있는 참된 벗 하나만 있으면 그의 인생은 성공한 것이라는 옛 격언에 동의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얼마 전 죽은 이 친구는 결과적으로 이러한 나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친구의 죽음이 이토록 큰 여운을 내 가슴에 남길 줄은 미처 몰랐다. 그 친구와의 기억들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일생을 통해 받았던 큰 우정에 대해 때늦은 후회를 느끼고, 그리고 가슴이 쓰리도록 아프다.

 그와는 20년 이상 만나서 악수하고 술을 마시고 때로는 못된 짓도 하는 중년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다른 친구들처럼 하루라도 못 보면 죽고 못 사는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그는 나보다 나이도 두 살 많고 학력도 낮았는데, 게다가 그는 군 미필이었으며 인문학에 대해서도 문외한이었다. 굳이 서로에게 맞는 부분이 있었다고 한다면 둘 다 음주와 가무를 좋아하고 회사 내에서 소외당하는 이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는 점 정도였을 것이다.

 이런 고백을 하면 고인에 대해 좋지 않은 증언이 될지도 모르지만, 한때 그와 그는 색줏집에서 회사사원증을 맡기고 술을 마신 적이 있다. 마침 장마철이어서 태풍이 닥친 날이었다. 거리에 차란 차는 모두 끊겨서 승용차 안에서 억수처럼 내리는 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밤을 새운 적이 있었다. 새벽이 밝자 차를 몰고 회사로 향하려는 내게 ‘건강이 제일 아니냐, 모두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니 밥이나 먹고 가자’고 하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내 친구들과의 모임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아마 짐작으로는 그의 부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느낌을 받은 즈음이었다. 늦은 저녁 시간이었다. 내 친구들에게 ‘○○씨는 이제까지 좋은 친구였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라는 소개에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 손을 꼭 잡으며 취중에 눈물을 흘렸던 그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와 내가 한울타리인 ○○그룹의 회사를 각각 자의반 타의반 그만두고 독립적인 일을 하고 있으면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은 5년 전이다. 그때 그는 술과 담배를 아주 끊은 상태라고 했다. 혈압과 안압이 높아서 그런 것이라고 했는데 그즈음에 그는 안압이 높아서 안구의 실핏줄이 다 터져서 고생을 많이 했고 병원에서 생사를 오가는 고생을 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도 그는 나를 비롯하여 K라는 전 직장 동료에게 어떻게든 맛있는 것을 먹여주고 싶어서 자갈치 시장의 단골집에서 줄돔회를 사주고 고래 고기를 특별 주문하곤 했다. 우리가 맛있게 먹으면 그 모습을 보는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말을 했던 것도 잊히질 않는다.

 작년 여름 그가 부산으로 온 적이 있다. 내가 갑자기 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낮술을 하지 않는 것을 생활신조로 하고 있지만 그날은 예외여서 이른 오후 시간에 대작해야 했다. 그날 전화로 불렀던 K는 오지 않았다.

 둘이서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데 그가 말했다.

 “친구, 참 오랜만에 술을 마신다. 그동안 몸이 안 좋아서 술을 금했는데 역시 친구랑 마시니 좋네.  K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을 말도록 하자. 나나 자네가 보살펴야 할 사람이잖아. 오늘 너와 술을 마시니 몸이 가뿐하다는 느낌이 온다. 세상이 우리를 배신할지라도 우리가 세상을 배반하면 안 되는 것 아니오!”

 

 

 

 

 

 

 놀랍게도 그날, 장례식장은 텅 비어 있었다. 10년 전, 그의 동생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장은 발 디딜 틈 없었던 기억이 났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지만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옛말이 생각났다. K를 포함한 그와 친했던 지인들에게 함께 문상 가자고 전화를 했으나 모두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것을 보고는 나는 쓴웃음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빈소가 부산에서 먼 천안이고 다녀오는 데 하루가 걸리니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앞으로는 그와 만날 일이 없으니 그런 셈법이 작용했을 것이다. 세상인심이란 원래 이런 것인데 나 홀로 외면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이런 장례식장도 다 있다고 하는 탄식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영정 앞에는 그의 아내와 두 딸이 검은 상복을 입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 직장 한 부서에서 근무했었고 오랜 시간 친구인 아무개’라고 내 소개를 하는데 모두 침묵만을 유지하고 있어서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빈소의 식탁 앞에 앉았다 일어설 때까지 그 누구도 조문객인 나를 응대하는 이 없었다.

 이윽고 빈소를 나서며 부의금을 받는 친척에게 그의 사인(死因)을 물었다. 유럽 여행 중 스위스의 산정에서 비를 맞았고 저체온 증으로 인한 심장마비라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인공호흡과 헬기까지 부르는 등 조치를 다 했으나 무위에 그쳤다는 것이다. 쓸쓸한 장례식장을 보며 생전에 그가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K가 생각났다.

 문득 중학교 영어 교과서에서 보았던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에서의 '호각'이라는 일화가 생각났다.

 "You pay too much money for the whistle."

 이를 직역하면 "너는 호르라기 값을 너무 많이 지급했구나."인데, 쓸데없는 데다 지나친 비용을 치르는 어리석은 경우를 의미한다. 순진하고 정 많았던 그는 불필요한 호각을 사느라 너무 큰 비용을 지불한 것은 아닐까? 그 호각을 사느라 좋은 나이에 몸을 망치고 누적된 피로로 인해 유명을 달리 했으니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빈소를 나서는 내게 '뭐락카노 뭐락카노…….'하며 그가 부르는 듯했다. 무더위 속에서 땀을 흘리며 목월의 '이별가'에서처럼 나는 대답했다.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

 

 

 유럽여행을 떠나기 전날까지 그는 나와 K에게 카카오톡으로 재미있는 경구와 그림을 하루도 빠짐없이 보내곤 했다. 이제는 그로부터 전화나 소식을 받을 일이란 없을 것이다. 부산한 열차 안에서 스마트 폰을 열어보았다. 카카오톡 대화방에는 그가 나와 K에게 보냈던 많은 문자와 그림들이 끝도 없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의 휴대폰이 사용 중지되었어도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었다. 그가 내 메시지를 받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다시 인사를 하기로 했다.

 

 “잘 가시오, 가까이서 오래 사귄 그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는 그곳에서도 다시 친구로 만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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