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자키 준이치로 장편소설 『치인의 사랑(痴人の愛)』
일본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1886∼1965)의 소설로 1924년에 발표되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1924년 3월부터 <오사카아사히신문>과, 11월부터 후편을 <여성>에 연재한「치인의 사랑」을 한곳에 모은 책이기도 하다. 관능적 분위기가 짙은 애욕소설로, 무자각적이고도 퇴폐적인 여주인공인 나오미의 이름은 이 작품에 의하여 일본 천하를 휩쓸었다. 교만하고 잔인한 미녀에게 학대 받으면서 희열을 느끼는 작가 특유의 마조히즘적 취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여주인공 나오미의 모던한 생활양식과 자유분방한 연애관이 당시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얻으며 ‘나오미즘(ナオミズム)’이라는 신드롬을 낳았다.
주인공 죠오지(讓治)가 나오미의 분방한 성격과 요염한 육체에 끌려 타락해 가는 과정은 탐미적인 이 작자가 애호하는 바로써, 마음으로부터 싫어하여 미워함과 반발을 느끼면서도 주인공이 그 매력에 끌려가는 치밀한 묘사 등에 이 작자의 비범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이 일반의 환영을 받은 최대의 이유는, 그 당시 이미 그러한 양상을 보이고 있던 퇴폐적 여성의 관능적 자태를 여지없이 밝혀 그려냈다는 그 풍속소설적 흥미에 있었다.
나오미에 의하여 대표되는 여성의 타입이 이 작품 이래로 흔히 나타난 사실은 이 작품의 선구적 의의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다니자키의 출세작이자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그 당시의 일본 독서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 여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만든 ‘나오미즘’이란 말이 유행될 정도였다. 이 소설은 요부(妖婦)인 나오미와 소설의 화자인 조지의 기묘한 애정생활에 대한 일종의 자서전적 고백 형식으로 되어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소설의 주인공 가와이 조지는 28살 된 독신이며 미국계 전기회사 기사이다. 집안은 우쓰노미야 근방에서 알아주는 자산가이다. 게다가 체격이 건장하고 남자다우며 회사에서는 ‘군자’라는 평판을 받을 정도로 성실하다. 이렇듯 남부럽지 않은 재력에 성실하고 외모도 괜찮은 편이지만 아직 독신이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 온 여자는 아사쿠사(浅草)에 위치한 카페 다이아몬드에서 일하는 여급 ‘나오미’다. 그녀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우선 이름 때문이었다. ‘나오미’라는 이름에서 서양의 이미지를 떠올렸던 것이다. 이름만이 아니라 외모 또한 어딘지 ‘혼혈아’ 느낌이 나는 것이 미국인 여배우 메리 피크포드를 닮았다. 게다가 15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서양인을 닮은 길쭉길쭉한 손발과 잘록한 허리도 마음에 꼭 든다.
나오미에게 푹 빠진 조지는 마침내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다. 빨간 슬레이트 지붕에 성냥갑같이 하얀 벽으로 포장된 외관. 곳곳에 깎여 있는 장방형의 유리창 그리고 정면에 지붕이 달린 현관, 그 앞에 정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잘 것 없는 공터가 위치한 ‘문화주택’에서 둘만의 기묘한 동거생활이 시작된다. 집 안은 서양식으로 커튼이 달려 있고 소파와 안락의자까지 갖추었다. 조지는 약속대로 나오미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치고 음악 수업을 하는 등 ‘서양화’ 교육에 돌입한다. 그런데 나오미는 이런 면에는 전혀 재능이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예의범절도 엉망이고 낭비벽도 심했지만, 동거를 시작한지 2년 뒤 실질적인 부부관계를 맺게 되기까지 조지는 나오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오미에 이끌려 댄스홀에 간 조지는 그녀가 수많은 남자들에 둘러싸여 문란하게 노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집주인에게 물으니 조지가 출근한 뒤 매일같이 남학생들과 어울려 논다는 것이었다. 화가 난 조지는 나오미에게 외출 금지령을 내리지만 이번에는 남학생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놀았다. 이에 격분한 조지는 나오미를 집에서 내쫓았지만 그녀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결국 헌신적인 삶을 택한다. 나오미가 다시 조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고 둘의 기묘한 결혼생활이 계속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남자는 여체의 관능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예술적으로 연마하여 결국에는 그 매력에 빠지는 마조히스트가 되고, 반대로 여자는 사디스트가 되어 간다는 것이 처녀작인「문신」이래의 谷崎文學의 정석이다. 이 작품 역시 여자는 교만한 미녀임과 동시에 사디스트이고 남자는 그녀의 관능미의 노예가 되어버리는「치인(癡人 : 바보)」으로 설정되어 있다.
소설 속 여주인공 ‘나오미’라는 새로운 캐릭터는 바로 이러한 아메리카니즘의 강한 영향 속에 등장하였다. 작가는 여주인공 이름을 ‘나오미’라는 서양풍 이름에 외모 또한 어딘지 모르게 미국인 여배우 메리 피크포드를 닮은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무엇보다 관능적이고 탐미적인 표현에 그의 서양 취미가 결합하여 “버터 냄새가 나는 감각”(가라타니 고진 외, 송태욱 옮김, 『현대 일본의 비평(1868-1989)』, 소명, p.121)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작품을 들어 “서양 숭배사상의 총결산”(김춘미, 『다니자키 준이치로』, 건국대학교출판부, p.83)이라고 평가한 것처럼, 이후 다니자키의 문학 경향은 ‘동양(일본) 회귀’라 일컬어질 만큼 커다란 변화를 보인다.
♣
자유분방한 주인공 나오미는 현대 여성의 전형으로 평가받으며, 아름다운 것은 강한 것이라는 작가의 문학 이념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이 작품은 인습적 정조 관념이 없는, 여성의 변태성욕적인 연애를 뜻하는 나오미즘이라는 유행어를 낳기도 했다. 관능미 앞에서 바보처럼 약해지는 인간의 연애철학을 그려 인기를 모았던 저자의 중기 대표작이다.
서양의 소설들은 겉으로는 여성예찬(가톨릭의 마리아 숭배에서 기인됨)과 남녀평들을 주장하는 것 같지만, 실은 철저한 남성우월주의를 내포하고 있다.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가장 적절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페미니즘을 외치면서도 이제까지 여자가 결혼을 하면 남편의 성(姓)을 따라가고 미시즈(Mrs, 즉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뜻)라는 호칭을 거침없이 사용한다.
다니자키는 <치인의 사랑> 이외에도 <자청(刺靑)>, <열쇠>, <미친 노인의 일기>, <갓 쓰고 박치기도 제 멋>, <춘금조(春禽抄)>, <세설(細雪)> 등의 소설을 남겼는데 대부분 마조히스트 남성의 심리를 다룬 것들이다. 한 개인의 마조히즘 심리가 ‘권위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한 복종’으로 작용할 때 그 사람은 최고의 행복감에 다다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다니자키가 주장한다는 사실은 심리학적으로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1886∼1965) :
일본의 대표적 현대 소설가. 도쿄 출생. 초기에는 <문신(刺靑)>(1910) 등 에드거 앨런 포 및 프랑스 데카당파의 작품들과 비슷한 단편소설들을 많이 썼다. 그러나 도쿄에서 좀더 보수적인 오사카[大阪] 지역으로 이주한 1923년 이후에는 일본의 고전미를 탐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 같다.
<여뀌를 먹는 벌레>(1929)는 작가의 이러한 가치관 변화가 잘 반영되어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이 소설은 불행한 결혼생활을 그리고 있는데, 실제로는 새로운 것과 낡은 것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으며 결국에는 낡은 것이 이기리라는 암시가 들어 있다. 1932년에는 일본 고전문학의 백미인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의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현대 일본어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1930년대 내내 <겐지 모노가타리>의 배경인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의 산문을 그대로 본뜬 만연체의 서정적 작품을 여러 편 썼으며 이러한 점으로 비추어볼 때 <겐지 모노가타리>가 그의 문체에 깊은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하다. 이 작품에 매료되어 그는 여러 해에 걸쳐 몇 차례 개정판을 냈다. 대표적 장편소설 <세설(細雪)>(1943~48)은 일본 고전문학 특유의 느슨한 문체로 현대세계가 전통적인 귀족사회를 가차없이 잠식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열쇠(鍵)>(1956) <미친 늙은이의 일기(癲老人日記)>(1961~62) 같은 전후 작품에는 젊은 시절로의 복귀를 암시하는 에로티시즘이 엿보이며 <문장독본(文章讀本)>(1934)은 뛰어난 비평서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영원한 여성'을 문학 속에서 추구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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