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일 단편소설 『아메리카』
조해일(趙海一.1941∼ ) 의 단편소설로 1972년 [세대]지에 발표되었다. 1970년대 한국 사회의 구조적 취약성을 근본적으로 해부한 역작이다.
조해일은 1970년대에 활동을 한 가장 자유로운 작가 중 한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자유롭다’란 말은, 그가 창조해 낸 소설의 세계가 단순한 사건이나 공간의 법칙성에 묶여 있지 않다는 뜻에서이다. 그의 소설은 사회사(社會史)의 한 사건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며, 현실의 단순한 표현 또한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가장 자유로운 양식으로 소설을 썼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읽을 때는 군사정부이며, 미국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 시대를 감안해야 한다. 조해일은 이 작품에서 한국 사회의 구조가 피식민지적 상태에 매몰되어 있으며, 한국인의 비극적인 양상이 여기에서 연유한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80년대 이후에는 이러한 관점들이 재야나 '운동권' 등지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왔지만 소설이 발표되던 70년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파격적인 주장을 작품으로 서술하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검문 헌병을 하다 제대한 나는 당숙이 경영하는 기지촌 ㄷ읍의 한 클럽을 찾아간다. 그 클럽에는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기지촌 여자들이 서로를 의지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그런 클럽이었다.
나는 당숙 밑에서 그 클럽의 문지기 노릇을 하며, 그곳에서의 생활에 젖어들기 시작한다. 그 클럽에서는 하루를 사는 미군들과 하루를 파는 여자들이 서로 어우러진 채, 색전등 아래에서 온몸의 열기를 토해내고 있다.
첫 번째로 알게 된 옥화라는 여자를 시작으로 나는 그 도시와 그 생활에 차츰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그 조그마한 ㄷ읍의 모든 경제권은 거의 그 마을 사람들의 손에서 움직인다는 것과, 그곳 자산의 대부분이 그곳 미군들 호주머니로부터 떨어진 것이라는 것, 그런데 그 자산의 반 이상은 경제 활동으로 최저의 수단에 속하는 매춘에 의해 얻어진다는 것, 또한 그 종사자들인 이곳의 여자들은 뜻밖에도 윤리적 열등감 같은 건 조금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그 생활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 등을 알게 되었다.
양부인과 다름없는 댄서들과 환락의 생활에 젖던 나는 그녀들의 허황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삶의 양식을 목격하교 기지촌의 생계가 GI들의 돈을 버는 댄서들의 수입에 의존하는 기생적(寄生的) 경제 구조에 매어 있음을 깨달으며, 그녀들이 미군의 무자비한 린치로 목숨을 잃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댄서 지망자들이 계속 늘어난다는 암울한 현실을 거듭 확인한다.
이 조그마한 읍에 홍수가 들이닥침으로 해서 모든 가옥과 건물, 그리고 도시는 물에 잠기고, 사람들은 모두 넋 나간 사람처럼 가재도구며 물건들을 복구하느라 허둥댄다. 나 또한 당숙을 거들며 복구 작업에 여념이 없다.
동네의 뒤쪽 철둑가에는 젖은 살림살이를 말리는 여자들로 동네의 길이만큼 긴 대열이 이루어지고, 어디를 복구하러 가는 모양인지 곡괭이 같은 것을 든 선로 노무자 몇 사람을 태우고 수동차 한 대가 바퀴소리도 요란하게 지나갔다. 그리하여 나는 서울로 취직하러 가겠다는 뜻을 버리고 그녀들과 함께 생활할 것을 결심하고, 장마 이후 힘차게 새로이 각성된 삶을 향해 일어난다.
이 작품은 1971년 [세대] 지에 발표된 중편소설로 한국사회내의 분단의 현재적 의미와 그것이 우리의 삶에 가하는 상처난 부분들을 체험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은 급격한 도시화로 인한 사회적 소외계층이 늘어나면서 하층민이 나타나기 시작한 1970년대의 사회적 구조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보여준다. 분단 이후 한국 사회의 구조적 취약성을 근본적으로 해부하면서 피지배적 상태에 매몰되어 가는 현실을 기지촌 여성들의 수난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절실한 현실 감각에 바탕을 두고,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와 인간 행위의 합리성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이, 현실의 도처에서 반박당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
이 소설에서 군대에서 제대한 ‘나’는 기지촌에서 숙부가 경영하는 클럽에 취직하면서 모든 과거의 의식 혹은 미래에의 전망을 지워 버리는, 환락의 시간성 위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소설 속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무시간적이며, 그들의 삶 역시 허황되기 짝이 없다. 사소한 좌절감에 몸부림치면서도 때로는 자신이 하늘 한가운데 떠 있는 듯한 환락을 만끽하는 댄서들의 생활에서 ‘나’는 고통스러운 한국인의 삶의 양식의 한 단면을 확인하게 된다.
미군 병사들에게 기생하고 있는 기지촌의 댄서들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세계에 함께 있는 것이며, 그들의 삶 자체가 바로 우리들의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불행한 현실과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모순된 사회 구조와 대결하기 위해 서울에의 취직 길을 포기하고 만다. 이러한 ‘나’의 결의와 행동은 바로 적나라한 현실 속에서 각성된 삶을 지향하려는 태도를 담고 나타나 있다.
☞조해일(海一.1941.4.18∼ ) 소설가. 중국 하얼삔 출생. 본명 해룡(海龍). 경희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7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매일 죽는 사람> 당선 후 등단. 1975년 [중앙일보] 연재소설 <겨울여자>는 수십만 부 판매를 기록, 영화화되기도 했다. 경희대학교 교수 역임. 그는 70년대초까지는 작가의 상상적 세계였던 가정 파괴범에 의해 순박한 신혼생활이 산산조각난 <무쇠탈> 연작 등 일련의 작품을 통해 시대에 만연된 폭력의 정체를 우회적으로 밝히려 했으며, 80년대에는 눈에 보이는 뻔한 폭압적 상황에서 감추면서 이야기하는 우화적 수법 에 염증을 느끼고 글쓰기의 중노동에서 벗어나 문단과 담을 쌓고 교수생활로 들어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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