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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박태순 단편소설 『무너진 극장』

by 언덕에서 2016. 4. 19.

 

 

박태순 단편소설 『무너진 극장』

 

 

 

박태순(朴泰洵. 1942∼2019)의 단편소설로 1972년에 출간된 창작집「무너진 극장」(정음사)에 수록되었다. 1960년 4월 19일, 혁명을 맞은 청년이 행동 대열에 끼었다가 자기 각성을 하는 이야기로 작가의 사회적 관심과 그 내적 반응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단편소설 『무너진 극장』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1960년대에 접어들자마자 일어났던 4.19 사태에 대하여 우리가 갖는 정직한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이 작품은 4.19 혁명이 일어난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인 1968년 월간중앙에 발표되었다. 바로 한 해 전에 부정선거라고 떠들썩했던 박정희가 재선 된 대선과 총선이 있었고, 동베를린 간첩단사건이 터졌으며, 1968년 1월 12일에 김신조 등의 무장공비사건, 미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에 뒤이어 예비군이 창설되었고, 통혁당 간첩사건, 울진 삼척 무장공비사건 등등이 연이어 벌어졌다.

 1968년 작가는 불안정한 사회 상황을 목도한다. 그런 연유로 ‘4.19 후일담’을 되짚으면서 ‘미완의 혁명’에 대한 추억을 되살려보려고 했던 것 같다.  4.19 혁명을 증언한 작품은 많지만, 이 작품처럼 4.19 혁명의 의미를 날카롭게 찾아낸 작품은 흔하지 않다. 

 이 작품은 이승만 정권의 붕괴 전야인 1960. 4. 25일 밤, 흥분한 군중들에 의해 임화수의 극장이 파괴된 사건을 마치 신문 기사처럼 그려내고 있다. 아마도 첫문장 뒤에 사람의 이름과 대화가 나오지 않았다면 대부분의 독자는 이 내용을 르포나 평문의 시작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이렇듯 르포 작가와도 같이 냉정한 시선이 사건의 전개 과정을 관찰, 보고하는 틈새로 작가의 비평적 분석이 섞여드는 구성은 특이하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인 ‘나’는 4.19 혁명을 무질서의 형식으로 파악하고, 그 무질서 속에 창조적 행위가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공은 이런 상황에서 공포를 느끼게 되고 새로운 방향과 힘을 찾게 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4ㆍ19 데모 때 무장경관에게 부상당한 몇몇 젊은이가 그날의 시위로 희생당한 친구의 묘를 찾는다. 그들은 삶의 성숙과 자유와 정의, 그리고 죽음을 거의 같은 시기에 경험하게 된 이들이다.

 묘지를 벗어난 일행은 부상자가 누워있는 병원으로, 대학 캠퍼스로 돌아다니다가 부정을 규탄하는 대열과 어울려 원흉(元兇)이 경영하는 극장을 파괴하는 행동에 가담한다. 극장은 산산조각이 난다. 극장은 화염에 휩쓸리고 동시에 악의 질서이고, 구질서인 현재의 질서는 여지없이 파괴되어 버린다. 오히려 무질서를 틈타서 절도와 폭력이 오히려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윽고 그곳에는 주인공인 나만 혼자 남게 되었고, 밤은 점점 깊어간다. 격렬했던 행동의 시간으로부터 나는 마침내 회의와 반성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과연 이 밤은 지나갈 것인가? 사람들이 아픔을 느끼며 희구해 마지않았던 새날은 찾아올 것인가?’

 세상이 바뀌어버린 26일, 나는 막상 피곤하여 잠만 잤다. 

 

 

5.16 이후 군사정부에 의해 구속된 깡패들이 전 반공청년단장실에서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왼쪽에 하얀 수의를 입고 있는 인물이 문제의 정치깡패 임화수다.

 

 

 차츰차츰 아침이 되어가고 있었다. 추웠다. 가슴속은 텅 비었으며 목이 탔다. 그러나 나는 점점 더 심해지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어둠이 물러나자 나의 육신을 숨길 수가 없게 되었다. 희미한 박명에 나의 몸뚱이는 드러나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군인들은 나를 발견하리라. 나는 소리를 내지 않으며, 비어 있는 무대를 벗어나서 객석으로 내려왔다. 아침이 찾아온 극장의 내부는 더욱 처참하게 보였다. 아침은 지나간 밤의 광포했음을 너무도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새날의 출발은 비참한 상처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것 같았다. 과거의 번창했던 극장은 여지없이 망가져버리고, 그 파괴된 폐허에서 새날은 우뚝 그 밝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부서진 객석을 서서히 포복해 나갔다. 몸은 비록 무겁고 정신은 혼미하였으나, 절실한 아픔과 함께 어떤 밝은 빛깔이 보여 오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가 확실히 무너져버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파괴된 극장과 함께 과거의 시간이 무너져 내려앉았다. 지난 십 년의 시간이 파괴당했다. 과거의 극장은 부서져버렸으나 과연 새로운 극장, 새로운 무대는 어떻게나 등장하려는 것인가? - 본문 185쪽 

 

 

소설 내에서는 4.19에 반응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극장을 파괴하는 데모대와 불을 끄기 위해 등장하는 동네 사람들이 그것이다. 전자는 극장을 파괴하며 무질서한 광기의 모습을 보이고 후자의 사람들은 혁명의 대열에서 비켜서 자신들의 재산과 안전만을 지키기 위한 모습을 통해서 각각의 한계를 드러낸다.

기본적으로 이 소설에서는 혁명을 위한 보통 사람들의 힘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엿보인다. 하지만 우상을 파괴하기 위한, 혁명을 진행하기 위한 데모대의 광기 어린 폭력적인 행위는 기존 정권의 수단의 그것과 다르지 않고 오히려 닮아가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기존의 폭력성에 반대하는 그들이 사용하는 수단이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시위대의 한계성이 발견된다.

그리고 두 번째 부류인 자신의 안위를 위해 불을 저지하는 마을 사람들의 행위는 전형적인 소시민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그들의 행동을 꼭 나쁘다고 만은 할 수 없지만, 혁명을 위한 움직임에 반한 일상을 유지하고자 하는 움직임 역시도 혁명의 수단에 있어서 그들만의 방식을 가지지 못한 데모단의 모습처럼 한계가 명확한 모습을 보여준다. 

도시소설의 면모를 발휘하며 모더니즘적 실험 정신으로 충만했던 박태순의 초기 소설은 4 · 19혁명에 대한 형상화를 통해 날카로운 세계 인식을 나타내며, 민중의 삶 속으로 자신을 투영하는 면모를 함께 보여준다. 더불어 도시 하위 계층과 함께 생활한 현장성을 바탕으로 개인적 세계 인식에서 공동체적 윤리 의식으로 진행해 간다.

 변화와 발전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이런 종류의 작품과 같은 관점의 인식이 모여서 작은 걸음을 계속한 결과일 것이다.

 

 

 

 


 

☞박태순(1942 ~ ) : 소설가. 황해도 신천(信川) 출생.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대 영문과 졸업. 1964년 [사상계]에 <공알앙당>이 가작 입선,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향연>이 가작으로 입선되고, 1966년 중편 <형성(形成)>으로 제1회 [세대]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창간된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단편 <연애>를 발표하였다.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회 발기인, 1980년 무크지 [실천문학] 발간, 출판사 [박우사] 주간, [실천문학]지 편집위원 역임. 요산문학상(1998), 21세기문학상(2000), 신동엽 창작기금수상, 한국일보 문학상(1988), 단재상(2009)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