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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연산군은 과연 폭군이었을까?

by 언덕에서 2022. 9. 6.

 

연산군은 과연 폭군이었을까? 

 

 

 

조선 시대 27명의 왕과 519년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마디로 왕권과 신권이 대립하여 그중 한 세력이 비대해지면 다른 세력이 그를 뒤엎고 정권을 장악하여 국가를 유지했던 정변의 역사로 정의할 수 있다. 현대식으로 이를테면 대통령중심제를 주장하는 세력과 내각책임제를 외치는 세력이 항상 대립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왕권강화를 주장하는 왕실세력과 신권강화를 주장하는 사대부1세력의 대립은 현대의 정당정치에서도 비슷한 면을 찾을 수 있다.

 

 

 유교적 이상향을 꿈꾸었던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왕을 절대적인 신적 존재라기보다는 사대부의 우두머리 정도로 인식했다. 왕권이 지나치게 강화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자신의 존재와 정통성에 치명타가 될 것임은 뻔한 일이었다. 사대부들은 왕 혼자서만 권력을 가지지 말고 신하들도 그에 상응하는 권력을 누려야 한다는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절대적 권력을 가진 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쉽게 용납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절대적 권한을 가진 군주나 자신들이 속한 정당의 이념에 맞지 않는 왕을 정변을 통해 제거하곤 했다. 신하가 군주를 제거할 때는 명분이 필요한 법이다. 그 와중에 생겨난 희생자 즉 제거된 왕을 우리는 ‘군’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그러한 왕이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개봉 예정인, 연산군을 소재로 한 영화에는 이런 근거없는 역사적 장면이 등장한다. 과연 사실일까?

 

 

 역사책을 볼 때마다 늘 궁금한 것이 있었다.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는 역사 속의 왕들은 온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일까? 대충 손가락으로 계산해도 몇 안 되게 떠오르는 우리 역사 속의 왕들이 몇 있다. 백제 의자왕, 신라 진성여왕, 태봉국의 궁예왕, 고려 충혜왕, 연산군, 광해군 등이다. 왕의 치적보다는 그와 대결을 벌이다 승자가 된 이들이 평가하는 결과에 따라 그가 성군이 되기도 하고 폭군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승자독식의 불편한 진실이 역사서에는 늘 존재하고 있다. 오늘은 그런 왕 중에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연산군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연산군을 폭군으로 부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박영규 :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정리)

 

1. 12년 집권기 중 두 번에 걸친 사화를 통해 엄청난 인명을 죽이는가 하면,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는 단 한 사람도 곁에 두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군주로 군림했다.

 

2. 자신의 사냥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민가를 철거하는 등 극악무도하고 패륜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3.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하였으며, 기타 모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은 남김없이 철폐해 버렸다.

 

4. 성균관, 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의 본산인 홍천사를 마구간으로 바꾸었으며, 민간의 국문 투서 사건이 발생하자 훈민정음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는 등 광적인 폭정을 일삼았다.

 

5.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거나 자신의 친족과 상간 하는 등 패륜적인 행동을 끊임없이 자행하였다

 

6.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어들였으며 이때 궁중으로 들어온 기생들을 흥청이라고 했다.

 

7. 향락적인 궁중생활에 제동을 거는 대신들뿐만 아니라 인수대비의 머리를 받아 절명케 하는가 하면, 어머니 윤 씨 폐출에 가담한 후궁과 그 자손들, 그리고 내시와 궁녀들까지 모조리 죽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폭군이 쫓겨날 때는 으레 폭군을 모셨던 대소 신료들 대부분은 간신으로 내몰려 죽임을 당하거나 배척을 당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중종반정의 경우는 임사홍과 왕비 신 씨의 오라비인 신수근 등을 빼놓고는 연산군 때의 신료들 대부분이 반정 후에도 거의 그대로 자리를 유지했다. 이는 통상적인 반정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연산군(燕山君. 1476. 성종 7∼1506. 중종 1)을 폭군으로 규정하는 근거가 되는 위의 사항들은 온당할까?  신동준2을 비롯한 역사연구자들의 비판을 항목별로 보도록 하자.

 

 

 

 

1. 당시 외가가 궤멸된 상황에서 지원세력이 거의 전무했던 연산군은 즉위 초기부터 이들 신권세력의 도전에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마침내 재위 4년째에 들어와 김종직을 추종하는 사림세력은 연산군의 증조부인 세조의 왕통을 부인하면서 왕권에 정면도전을 감행하고 나섰다. 무오사화 및 갑자사화는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당시 이 사건은 설령 세종이나 성종이 보위에 앉아 있었을지라도 비슷한 결말이 날 수밖에 없었다. (신동준, 변원림)

 

2. 무오·갑자 등 양대 사화를 비롯해 선왕의 후궁인 엄 씨와 정 씨를 장살한 문제와 사냥터 확보를 위해 금표를 경기도 절반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에 설치한 문제 등 많은 사안이 연산군을 매도하는 공격 자료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을 과장·왜곡·날조한 면이 많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 (신동준, 변원림)

 

3. 연산군은 자신의 치세와 같이 풍요를 구가하는 시기에는 성리학에 얽매인 무미건조함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언론혁파는 성종조에 이르러 더욱 강력해진 신권세력에 맞서 왕권을 되찾고자 하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지금의 잣대에서 언론억압은 용납될 수 없겠지만 왕권체제인 조선왕조에서는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신동준)

 

4. 철거 대상은 국법에서 주택 건축을 금하고 있는 궁궐 담장 아래 100척 이내, 즉 30m 이내 주택들이었다. 게다가 강제 철거도 아니었다. 연산군은 먼저 병조·공조·한성부의 당상관(堂上官)을 보내 ‘집주인들을 모아 철거의 뜻을 효유’시켰다. 담당 부서의 고위직들이 먼저 설득작업에 나서게 했다. 게다가 연산군은 “철거되는 사람들에게 비록 넉넉히 주지는 못하지만 면포(綿布:무명)를 조금씩 나눠주어 나라의 뜻을 알게 하라”라고 명했다. (이덕일)

 

5. 사관은 또 연산군이 백모(伯母)인 월산대군 부인 박 씨를 강간했다고 주장했다. 연산군 12년(1506) 7월 박 씨가 세상을 떠나자 사관은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 연산군은 서른한 살이었다. 당시 사대부들의 부인이 남편과 동갑이거나 한두 살 많은 풍습과 비교해 보면 세조 12년(1466) 열세 살의 나이로 월산대군과 혼인한 박씨가 사망할 때 나이는 53~55세 정도다. 당시 이 나이의 여성이 잉태할 수는 없었다. (이덕일)

 

6.『경국대전』은 지방에서 뽑아 올리는 선상기는 여기(女妓) 150명, 연화대(蓮花臺:가무극 배우) 10명, 여의(女醫) 7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악에 대해 사대부들이 분노한 것은 자신들과 접촉을 차단시켰기 때문이다. 그간 여악은 사대부들의 예비 첩이나 마찬가지였다. 연산군은 재위 11년 1월 부모의 장수를 비는 헌수연(獻壽宴)을 제외하고 여악들을 조사(朝士:벼슬아치)의 집에 가지 못하게 하고, 이듬해 2월에는 광희를 사천(私賤:사노비)으로 만들어 첩을 삼을 수 없게 했다. 연산군은 흥청을 최고의 예술가로 대접했을 뿐이었다. (이덕일3)

 

7. 연산군이 갑자사화 당시 '부관참시'와 같은 혹형을 행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죄가 거듭 드러난 데 따른 가중처벌의 성격을 띤 형벌이었다. 중종 때 일어난 기묘사화는 무오사화 및 갑자사화와 비교할 때 그 규모가 컸을 뿐만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훨씬 자의적이고 참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종은 폭군으로 몰리지 않았다. (신동준)


 

 

『연산군일기』는 사실(fact)을 기술한 부분과 사관(史官)의 의견(opinion)을 개진한 부분을 분리해서 읽지 않으면 함정에 빠지기 쉽다. 사관의 의견을 사실로 읽다 보면 사관의 의도대로 연산군을 해석하게 된다. 연산군은 국왕과 사대부가 공동 통치한다는 신흥사대부들의 건국이념을 부정했다. 연산군이 사대부 계급의 공동의 적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산군은 백성들에 대해서도 폭군이었는가?

 

 

 

 변원림4의 「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일지사)은 사료비판을 소홀히 하는 국내 학계의 잘못된 관행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이 말도 되지 않는 <연산군일기>의 내용을 모두 사실로 믿고 있으니 이들의 무비판적인 학문 연구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고 국내 학계의 통폐를 지적했다.  그는 국내 역사학계가 연산군에 대해 잘못된 평가를 내리고 있는 단서를 1962년에 출간된 이상백5의 <한국사>에서 찾고 있다. 후대의 야사를 모아놓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과 안정복의 <열조통기> 등을 근거로 면밀한 고증도 없이 반정공신들이 귀양 간 세력과 연결해 연산군을 몰아내었다고 기술한 사실이 왜곡의 시작이라는 주장이다.

 변원림의 연산군에 대한 분석은 기본적으로 연산군의 치세를 크게 전기와 후기로 양분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재위 8년까지의 전기와 갑자사화 이후 폐위되는 12년까지의 후기가 그렇다. 그는 연산군의 전기 행보를  국방에 힘을 기울이고, 권세가들의 군왕에 대한 능멸을 차단하며 힘없는 백성을 위해 애쓰고, 예술을 사랑하는 명군의 행보로 파악했다. 연산군의 업적이기도 하다. 후기에 들어와 문득 폭군으로 오해될 만한 면모를 보이다가 끝내 폐위된 것과 관련해서는 왕권과 신권의 첨예한 갈등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양전(量田·논밭 측량)과 노비추쇄(奴婢推刷·도망한 노비를 붙잡아 원래 주인에게 돌려보내던 일) 시도 등을 논거로 들었다.

<연산군일기>의 기록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잔치를 너무 적게 열며 검소한 모습을 보인 데서 군신 간의 갈등이 증폭되었다고 분석한다. 그는 연산군의 후기 행보와 관련한 <연산군일기>의 악의적인 기록에 대해 이같이 개탄하고 있다.

 “연산군은 도덕군자였음에도 ‘연산군일기’는 재위 9년 이후의 기록에서 그를 색광(色狂)으로 묘사해 놓았다. 그가 알면 관 속에서도 돌아누울 일이다.”

 

   

 

 변원림은 독일의 에를랑겐 대학에서 ‘사상사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튀빙겐 대학 등에서 강의를 한 재독 사학자다. 그는 위의 책 저에서 <연산군일기>의 내용이 얼마나 두서없이 날조된 것인지를 정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연산군의 패륜행보에 대한 기술이 <고려사>에 나오는 충혜왕 및 우왕 등과 꼭 닮아 있고, 심지어 연산군보다 한 살 많은 체사레 보르자6에 대한 정적(政敵)들의 악의적인 기술과 흡사한 점 등을 밝혀내고 있다. 신동준 역시 반정공신들이 연산군을 폭군으로 몰아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한 사실을 심각하게 우려한다.

 이들 저자는 연산군을 과감히 ‘당대의 명군’으로 평가한다. 변원림은 연산군을 ‘당대의 명군’으로 평가하는 이유를 이같이 밝히고 있다.

“성리학자들은 자신들의 말에 순종하는 용렬한 군주를 성군으로 칭송했으니 연산군이 폭군의 이름을 얻은 것은 오히려 대왕다웠음을 알리는 것이다.”

 그는 조선조를 쇠망으로 이끈 성리학의 폐해를 통찰하고 있다. 변원림이 연산군을 ‘대왕’에 준하는 인물로 호평한 것은 이나바7가 ‘택민주의(澤民主義)’를 언급하며 광해군을 칭송한 것에 비유할 만큼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연산군에 대한 국가의 공식기록인 <연산군일기>는 63권 46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종반정에 의해 폐위되었으므로 이를 실록이라 하지 않고 일기라고 했다. 그러나 체제는 일반 실록과 같다.

 연산군이 반정에 의해 쫓겨난 왕이라는 이유로 그에 대한 자료는 대부분 악행에 대한 것만 기록하고 있다. 때문에 연산군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단적으로 ‘패륜적 행위를 일삼은 폭군’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연산군일기>는 정확한 사료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과 연산군의 폭정에 대해 과장된 서술을 했을 가능성이 항상 지적되고 있다. 또 연산군의 폭정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다 보니 정작 기록해야 할 구체적인 사건들이 너무 소홀히 다룬 문제의 기록이라는 점도 마찬가지다. (박영규 :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또 실록에는 의당 사건에 대한 관점, 평, 의미 등을 적은 사론이 따라붙게 마련인데 <연산군일기>에는 사론이 25개 정도밖에 수록되어 있지 않아 실록으로서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 그나마 이 사론들도 연산군의 폐륜적인 비행에 대한 것뿐이어서 객관성을 의심하게 하고 있다.

 

 

 

 

 거사에 돌입한 반란군들은 성종의 계비이자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정현왕후 윤 씨를 찾아가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하라는 교지를 내어줄 것을 간언 한다. 정현왕후가 이들의 청을 거절했다는 사실은 연산군이 폭군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한다.

 그러다가 버티기 못하고 결국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 교동에 안치하도록 한다. 두 달 뒤인 1506년 음력 11월 그는 그곳에서 3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중종반정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역사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연산군을 성군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승자에 의해 기록된 실록에도 약육강식의 법칙은 철저하게 적용된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1506년 9월 2일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돼 위리안치 됐고 9월 24일 폐세자와 창녕대군, 양평군 등은 반정 공신들의 주장에 의해 사사됐다.

 연산군이 역질(疫疾)에 걸려 눈도 뜨지 못하고 물도 마실 수 없이 괴로워한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 1506년 11월 7일이다. 연산군의 배다른 형제인 중종은 의원을 보내라고 했으나 다음 날인 8일 "연산군이 6일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중종반정과 '연산군 독살설'은 왕을 무시한 사대부가 정당성 없이 저지른 하극상에 다름 아니다. 유배된 지 겨우 두 달 만에 31세 젊은 나이의 연산군을 죽음으로 몰아간 겨울철 학질이라는  '역질'의 정체는 무엇일까.  암살이었을 것이다.

 

 

※ 참고서적 :        신동준 저 <연산군을 위한 변명> (지식산업사 2003)

                    변원림 저 <연산군 그 실상과 허성> (일지사 2008)

                    이덕일 저 <조선왕을 말하다 2>(역사의 아침 2010)

                    박영규 저 <한 권으로 보는 조선왕조 실록> (웅진지식하우스 2004>

 

 

 

 

 

 

  1. 「1」사(士)와 대부(大夫)를 아울러 이르는 말. 문무 양반(文武兩班)을 일반 평민층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다.「2」벼슬이나 문벌이 높은 집안의 사람. ≒사부01(士夫). [본문으로]
  2. 고전연구가이자 역사문화 평론가다.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안목을 바탕으로 이를 현대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경기고등학교 재학시절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의 대가인 청명 임창순 선생 밑에서 사서삼경과 『춘추좌전』, 『조선왕조실록』 등의 고전을 배웠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조선일보》와 《한겨레》 등에서 10여 년 간 정치부 기자로 활약했다. 1994년에 다시 모교 박사과정에 들어가 동양정치사상을 전공했고, 이후 일본의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을 거쳐 『춘추전국시대 정치사상 비교연구』로 모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21세기정경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그는 서울대학교·고려대학교·한국외국어대학교 등에서 학생들에게 동양 3국의 역사문화와 정치사상 등을 가르치고 있다. [본문으로]
  3. 1961년 충남 아산 출생. 숭실대 사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고 「동북항일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필두로 한국사의 쟁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대중역사서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우리 역사의 온갖 미스터리를 객관적 사료를 토대로 선명하게 풀어낸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3』『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조선 왕 독살사건』 등의 문제작을 펴내면서 우리시대의 대표적 역사저술가로 자리매김했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이덕일의 여인열전』 등 생존 당시 주목 받지 못했던 불운한 천재들이나 역사 속에 안타깝게 묻혀버린 인물을 복원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본문으로]
  4. 1948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취득, 독일 에어랑엔대학교 사상사학과에서 철학박사학위 취득했다. 고려대학교, 트리어, 튀빙엔대학교 등에서 강사 역임했다. 논문으로 ‘안정복의 역사인식’, “사총”, 권 17·18 합본, 저서로는 『역사 속의 한국여인』, 『고종과 명성』 등이 있다. [본문으로]
  5. 이상백은 시인 이상화의 동생으로 유년시절에 한학을 공부했고, 와세다대학 사회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8.15해방 전후에는 독립운동과 정치활동에 참여했고, 국사분야 및 한국의 체육발전 및 국제적 지위향상에 기여했다. 1945년 서울대학교 교수에 취임한 이후 같은 대학에 사회학과를 창설하고 교수로 재직했다. 사회학과 역사학의 학제 간 협동연구를 최초로 시도하여 한국사회사 연구에 기념비적 업적을 남겼다. 또한 그는 체육이론가이자 행정가 및 지도자로 활약하며 1964년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및 국제 올림픽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건국문화훈장 대통령장,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받았다. [본문으로]
  6. 로마냐 공작이자 교황군 총사령관으로서, 부친 알렉산데르 6세의 권력을 강화하고 이탈리아 중부에 자신의 공국을 세우고자 했다. 그의 정책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그를 새로운 '군주'의 본보기로 인용했다. [본문으로]
  7. 이나바 이와키치(일본어: 稲葉 岩吉, 1876년 ~ 1940년)는 일본의 역사학자이다. 전공은 조선사, 만주사. 원래 성은 고바야시(小林)이며, 호는 군잔(君山)이다.도쿄외국어학교에서 중국어를 배운 뒤 중국으로 건너가, 러일전쟁 당시 일본 육군의 통역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부터 1915년까지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역사조사부에서 《만주역사지리》 편찬에 참여했고, 1915년에 육군대학 교관으로 취임했다. 1922년 12월 28일, 조선사 편찬위원회 위원 겸 간사로 임명되었고, 총독부 수사관, 조선사 편수회 간사직을 맡아, 《조선사》 편찬 사업에 참여했다. 1937년, 만주국의 건국대학 교수에 취임하였다. [본문으로]
  8. 1996년에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문학,철학,역사 분야에서 수많은 저서를 출간하며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 ‘다산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은 역사와 철학 분야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최근에 그는 자신의 저술활동을 이끌어 주었던 생각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동서양의 여러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에 대한 연구에 매진한 끝에 방대한 분량의 『생각박물관』 집필을 마무리했다.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실계보』, 『환관과 궁녀』, 『교양으로 읽는 중국사』,『대한민국 대통령실록』 등이 있다. 사상서로는 『특별한 한국인』, 『생각의 정복자들』, 『달마에서 성철까지』, 『도덕경 읽는 즐거움』, 『생각 박물관』, 『체질과 인간 유형을 알면 사람 만나는 것이 즐겁다』 등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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