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디즘의 유래는 무엇일까? - 사드 장편소설 『소돔의 120일』
사디즘(sadism)이라는 용어의 유래가 된 프랑스 작가 마르키 드 사드(MarquisdeSade, 1740~1814)가 바스티유 감옥에서 집필한 소설이다. 1785년 집필을 시작했지만 이후 분실되었다가 1930년대 경 출간되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2000년 첫 완역판이 나왔으나 수거ㆍ폐기된 바 있으며, 2012년 9월 6일에는 음란성과 선정성ㆍ반사회성이 포함되었다는 이유로 유해간행물 판정을 받아 배포 중지, 즉시 수거ㆍ폐기 고시가 내려졌다. 그러나 출판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반민주적 조치라는 반발로 10월 11일 진행된 재심위원회에서 청소년유해간행물로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19세 미만 구독불가' 문구를 넣어 비닐로 포장해 서점에서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사디즘(sadism: 加虐愛慾)이란 말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말이다. 후작(侯爵)인 이 귀족은 젊어서부터 방종(放縱)하여 부녀자 유괴∼부녀자 확대 등의 죄명(罪名)으로 여러 번 투옥되었다. 1791년 음탕한 소설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행>을 익명으로 발표, 호색작가(好色作家)로서 이름을 날리고, 이어 <쥘리에트, 또는 악덕의 승리>(1797)를 발표, 이 작품을 나폴레옹에게 바쳤다가 샤롱통의 정신병원에 유폐(幽閉)되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루이 14세의 통치 말기에 특권계급에 속하는 4명의 귀족들이 그들의 부를 이용하여 그들의 권능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42명의 희생자를 거느리고 어느 외딴 성에 칩거한다. 4명의 부인, 여러 명의 소년 소녀들과 요리사 및 하인들로 구성된 이 집단은 성 안에서 온갖 변태성욕을 경험하면서 논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교와 고위귀족 등 4명의 친구들이 한 성에서 120일간 모여 온갖 가학적인 성애를 즐기는 것이다. 4명의 친구들은 자신의 딸들을 서로 나눠서 결혼관계를 맺고 젊은 남녀 수십 명을 성에 가두고 난잡한 행위를 즐긴다. 전개는 일기체로 되어 있는데, 11월 1일부터 이듬해 2월 18일까지 넉 달 동안 날마다 하나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에 따른 에로틱한 실습의 내용이 기록된다.
대수롭지 않은 성희들로부터 점점 더 대담하고 무시수시한 성행위들과 만나게 된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는 잔혹한 고문과 살인으로 발전한다.
이들은 “식사시간에 도덕철학에 대해 토론”하고 “약자에게 힘을 남용할 때 맛보는 전제와 지배라는 무상의 기쁨을 생각해보라”며 자신들의 사상을 피력한다. 이들의 쾌락을 위한 가학적 향연은 점차 잔인해지면서 고문, 강간, 살인 등의 행위를 일삼다가 결국 12명만 살아남으면서 끝이 난다.
이 소설에서 실험되는 사디스틱한 성희들은 사디즘을 이야기할 때 흔히 등장하는 것처럼 상대방을 ‘채찍질’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사디즘의 성 심리만을 단순하게 묘사하는 소설이라고 볼 수 없다. 사디즘뿐만 아니라 마조히즘, 페티시즘, 동성애, 항문성교, 시애, 관음증, 소아성욕 등이 골고루 실험되어 마치 온갖 변태성욕의 전시장 같은 느낌을 준다.
또한 이 작품에는 “하느님은 개새끼!”라는 말이 중간 중간 나온다. 인간을 비극적인 인생 속으로 던져놓은 조물주에 대한 저주인 셈인데, 역시 작가가 가지고 있는 허무주의적 인생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드는 파리 출생으로 ‘사디즘'이란 용어를 낳은 성애문학(性愛文學)의 저자이다. 아버지는 백작이며 외교관이었다. 페트라르카의 애인이었던 라우라의 가계(家系)를 가진 사드 가는 프로방스 지방의 명가로서 순수한 귀족이었다. 10살 때 예수회의 명문교인 파리의 루이 르 그랑에 입학했으며, 1755년에는 국왕근위보병연대 사관에 임명되어, 7년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후에 사법관의 딸과 결혼을 하였으나, 아르퀴에유의 거지여자 구타사건(1768)과 마르세유의 봉봉사건(1772) 등의 스캔들을 일으켜 투옥된 것을 시작으로 생애의 1/3 이상을 옥중에서 보냈다.
그는 여자거지를 감금ㆍ고문했다는 ‘아르크유 사건’(1768), 창녀들을 모아 추행했다는 ‘마르세유 사건’(1772) 등의 추문을 일으켰으며, 독살미수와 동성애를 이유로 쫓기는 몸이 된 사드는, 입옥(入獄)과 탈옥을 되풀이하다 1784년부터 바스티유 ‘자유의 탑’에 감금되었다. 이 무렵에 이미 수인작가로서 출발하고 있었으나 당국으로부터 위험시되어 샤랑통 정신병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대혁명을 맞았다. 대혁명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1793년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었고, 출옥 후에 <신(新)쥐스틴>(1797)이 사회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다시 체포되어 샤랑통에서 죽었다.
사드는 감옥 생활의 지루함과 분노를 극복하기 위해 성애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소설과 희곡을 썼다. 1782년 7월에 <한 성직자와 죽어가는 남자의 대화>를 완성했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선언했다. 아내와 변호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깊게 맺힌 반항 정신과 번득이는 재치가 뒤섞여 있다.
1784년 2월 27일에 그는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그는 약 12m 길이의 종이 두루마리에 <소돔의 120일>을 썼는데, 수없이 다양한 성적 도착 행위를 그림처럼 생생하게 묘사했다. 1787년 <미덕의 재난>을, 1788년 중편소설 및 단편소설들을 썼는데, 이 작품들은 나중에 <사랑의 범죄>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가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기 며칠 전에 사드는 창문을 통해 "놈들이 죄수들을 학살하고 있다. 빨리 와서 죄수들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외쳤다. 그는 샤랑통의 정신병원으로 옮겨져, 1790년 4월 2일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아내와 헤어진 그는 젊은 여배우이며 과부인 케네와 함께 살면서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운>과 <쥘리에트>라는 장편소설을 썼다. 그러나 그는 공포정치 시대에 반혁명의 혐의를 받고 재차 투옥되었다. 그리고 나폴레옹 체제하에서는 필화(筆禍)로 인하여 죽을 때까지 샤랑통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
그의 작품은 도착성욕을 묘사한 것이라고 하여, 외설과 부도덕의 이유로 모든 검열을 받아야 했던 관계로 오랫동안 묵살되어 왔다. 따라서 그의 문학적 가치가 드러난 것은 19세기 말엽부터이며, 독일의 의학자와 20세기의 초현실주의 문학자와 실존주의자의 노력에 의하여 복권, 사회와 창조자에 대한 대담한 반항자로서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그는 성본능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을 시도하여 인간의 자유와 악(惡)의 문제를 철저하게 추구하였다. 그러므로 사드의 문학은 현재와 같은 소외(疎外)의 시대에 다시 돌아보게 되는 필연성을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아폴리네르1가 "이전에 존재하였던 가장 자유로운 정신"이라고 극찬하면서부터 더욱 그 사상적․문학적 가치가 재인식되었다.
- 프랑스의 시인․소설가(1880~1918). 전위 예술의 기수로서 초현실주의의 길을 열었다. 작품에 시집 《칼리그람》, 소설집 《이단 교조 주식회사》 따위가 있다. [본문으로]
'참고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인의 길 (0) | 2016.05.27 |
---|---|
2015 블로그 어워드 결과에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0) | 2016.01.28 |
다시 새 달력으로 바꾸며 (0) | 2015.12.31 |
배뱅이굿 (0) | 2015.11.25 |
진정지견(眞正之見) (0) | 2015.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