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길
- 사진 출처 : 부산일보 -
산에 산에 산에는 산에 사는 메아리
언제나 찾아가서 외쳐부르면
반가이 대답하는 산에 사는 메아리
벌거벗은 붉은산엔 살수없어 갔다오.
산에 산에 산에다 나무를 심자.
산에 산에 산에다 옷을 입히자.
메아리가 살게시리 나무를 심자.
메아리 메아리 메아리가 사는 산
언제나 찾아가서 외쳐불러도
아무도 대답 없는 벌거숭이 붉은 산
메아리도 못살고서 가버리고 없다오.
산에 산에 산에다 나무를 심자.
산에 산에 산에다 옷을 입히자.
메아리가 살게시리 나무를 심자.
위의 시는 '메아리'라는 노래로 유명하지만 누가 지은 시인지를 아는 이는 드문 듯하다.
정답은 '청마 유치환'.
카메라를 매고 산복도로를 걷다 내려오는 길에 수정동 경남여고 앞쪽에서 ‘시인의 길’이라는 안내간판을 발견했다. 주지하는 바처럼 수정동에서 살았던 청마 유치환은 경남여고 교장을 지냈고, 남여상 교장 재직 중 윤화로 사망했다. 폐쇄된 역사(驛舍)인 부산진역 맞은 편인 이 곳 '시인의 길'은 유치환 시인이 재직하던 경남여고에서부터 당시 살았던 집 앞을 지나 시인이 잠든 수정가로공원까지 총 648m 구간이다. 이 길은 유치환 선생이 1963년 7월 경남여고 교장으로 부임한 후 1967년 2월 좌천동 봉생병원 앞 대로에서 교통사고로 운명 할 때 까지 늘 걸어 다녔던 흔적과 추억이 묻어있는 길이다.
그러나 외지인이 이 길을 운치있는 길로 기대하고 찾는다면 실망이 앞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장과 상가가 복잡하게 뒤엉킨 곳이고 평소 인파가 많기 때문에 혼잡하기 짝이 없다. 그러므로 통영 출신인 청마가 생애 많은 시간을 보낸 곳으로 그것만을 음미하며 살펴보는 것이 답일 듯하다. 연상 작용 때문인데 비슷하게 윤화로 세상을 떠난 소설가 전영택, 김수영 시인, 채광석 시인, 프랑스 작가 알베르토 카뮈가 생각났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스크랩 해두었던 신문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청마의 마지막 날
청마는 미세한 동작으로 어깨춤을 추었다
예총 선거에 관한 시덥잖은 일은 잊어버렸고
거나해진 청마는 눈에 띌까말까 어깨로 춤추었다
그런 흥겨운 모습은 여태 본 적이 없었다
"김형, 청만데, 오늘 나 좀 봅시다."
좀처럼 전화 목소리를 듣기 어려웠던 청마의 전화다. 국제신문 문화부 기자 시절이다. 청마 유치환은 필자와는 두 가지 점에서 연분이 있다. 한 가지는 그가 동래고보 출신이기 때문이고 다른 한 가지는 문단 대 선배이기 때문이다.
술이 거나해진 자리 말고는 아무리 처진 후배라도 하대를 잘 하지 않는다. 그런 성품이므로 새까만 후배에게도 '형'자를 붙인다. 지금은 업종이 바뀌었지만 광복동 책방 골목의 모란다방으로 나갔다. 청마는 영도에 있는 부산 남여상 교장이었다. 부임한지 이태 해인 1967년이다.
청마는 호쾌한 미소를 띠면서 나타났다. 얼굴이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뒷날 안 일이지만 이날은 졸업 예정 학생들의 취업률이 좋아 점심 무렵에 동료 교직원들과 중국집에서 '배갈'을 흥건히 들고 난 다음이었다. 집에도 필요 이상의 전화를 하지 않는 그가 드물게 목욕물을 데워놓으라고 부인에게 일러 둔 상황이었다. 청마가 문인협회 부산회장으로서 부산 예총지부장에 당선된 지 며칠 안 된 날이다.
청마는 자리에 앉자마자 J 모라는 사람이 당선에 이의를 제기한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 J란 사람은 아동문학가로 사사건건 시비를 일삼는 말썽꾼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존재였다. 항시 못 먹는 밥에 재나 뿌리자는 식의 투정으로 마치 정의감이 걸출한 위인인 것처럼 남 헐뜯기를 일삼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 자신도 문인협회 회원이므로 청마가 예총지부장으로 추대되다시피한 마당에 생트집으로 당선 무효 운운 하면서 딴 소리를 한다는 것은 분명 반역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으로 J는 일찍이 문인협회 사상 초유인 제명을 당하는 기록을 남겼다.
필자가 그런 무뢰한의 작태에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한마디로 잘라 말했더니 청마가 허허 웃으면서 또 예의 "김형 소주나 한잔" 하러 가잔다. 청마를 추대했던 각 분야의 주역들이 모란다방에 모여들었다. 이미 J가 평지풍파를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있는 터라 청마가 나오는 시간에 맞춰 모여들었다. 문인협회쪽은 윤정규와 필자가, 무용협회쪽은 강이문, 미술협회쪽은 김인근, 그리고 한때 예총 사무국장을 지냈던 오재정 등이 그 면면들이다.
우리 일행은 광복동 입구를 지나 지금은 부산데파트가 들어 선 자리이지만 동광시장 안 속칭 '짬보집'으로 갔다. 여기 모인 인사들은 평소 청마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었다. '짬보집'은 낮에는 밥집이고 밤에는 술을 파는 10평 남짓한 식당이다. 술이 한 순배씩 돌았다. 청마는 말 대신 너털웃음이 이어졌다. 대체로 말수보다 웃음의 횟수가 더 많은 편이다. 듣는 쪽이지 앞서 얘기를 끌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당시 술을 절제한다는 소릴 들었으나 여전히 그는 잔을 사양치 않고 있었다. 술자리에서 "그만"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대인풍의 호주가임은 말할 나위 없다. 이미 예총 선거에 관한 시덥지 않은 일은 잊어버렸고 술이 거나해졌다. 필자가 불쑥 "청마 선생 , 혈압이 걱정이라는데 얼마나 되십니까" 했더니 "이미 술을 마신 걸 혈압이 무슨 상관이겠느냐"는 반문이다. 우리는 1시간 쯤 머물다 다시 광복동으로 나와 모란다방 앞 선술집으로 옮겼다. 이른바 2차다. 술 한 잔 씩이 돌았다. 청마는 스탠드의 모퉁이에 앉아 눈에 뜨일까 말까 그런 미세한 동작으로 어깨춤을 추었다. 사실 이런 흥겨운 모습은 여태 본 적이 없었다. 필자가 바로 옆 자리에 앉았으니까 지금도 눈에 선하다. 청마가 일어나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가 조금은 취한 듯해서 윤정규더러 찻길까지 모셔다드리는 게 어떻겠느냐고 청했더니 그러마 하고 배웅나갔다가 10분쯤 뒤에 돌아왔다. 잘 갔느냐고 물었더니 본인이 얼른 합승차에 올라 타버렸다고 했다. 그리고 일행도 곧 하나씩 흩어졌다.
아침 출근이 좀 늦었으나 신문사에 들어서자마자 최계락 부장을 비롯한 문화부 기자들이 필자를 보며 "청마 선생 돌아가셨다"고 외치듯이 말했다. 아니 이럴 수가…. "너 때문에 죽은 것 아니냐"는 질책으로 바뀌어 울려왔다.
그 때 청마의 죽음을 알리는 통신기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정동 댁으로 가던 중 수정동의 중앙로를 건너다 버스에 치인 것이다. 1967년 2월13일 밤이었다. 향년 60세였다.
그렇게 배웅한 게 그의 마지막이 될 줄이야…
-시인 김규태의 인간기행
국제신문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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