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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배뱅이굿

by 언덕에서 2015. 11. 25.

 

 

 

배뱅이굿

 

 

 

 

 

 

 

 

 

 

 

 

 

「배뱅이굿은 관서지방1에 널리 퍼져 있는 민속극을 한 사람의 소리꾼이 장구 반주로 소리와 말과 몸짓을 섞어 배뱅이 이야기를 서사적으로 공연하는 서도소리이다. 판소리와 공연방법이 비슷하나 판소리가 북 반주로 남도 육자배기토리(南道民謠調)가 주가 되는 데 비하여, <배뱅이굿>은 장구 반주로 서도 수심가토리(西道民謠調)가 주가 된다.

 지금까지 <배뱅이굿>은 평안도 용강의 소리꾼 김관준 창작설만이 알려졌으나, 1647년에 유인만한테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지는 황해도 계통 <배뱅이굿>의 채록본이 1983년에 발견되어 <배뱅이굿>의 유래는 더욱 복잡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전승되는 것은 평안도 김관준 계통을 이은 이은관 <배뱅이굿>과 황해도 문창규 계통을 이은 양소운 <배뱅이굿>이 있다. 1명의 배우가 등장하여 창(唱)으로 여러 사람의 역을 도맡아 죽은 처녀 배뱅이의 혼을 불러 위무한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

 

 

 

 

 「<배뱅이굿>은 조선시대 영조ㆍ정조 이래 구전된 것을 한말에 평남 용강의 김관준이 개작하여 아들 종조가 계승하였다. 김종조의 동료인 최순경ㆍ이인수 등이 부르면서부터 널리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성은 황해도 소리가 중심이 되나, 경기ㆍ강원ㆍ함경의 민요ㆍ잡가 등을 사이사이에 넣어가며 남도 판소리의 ‘아니리’를 본받아 창자(唱者) 한 사람이 주고받고 설명한다. 오늘날 부르는 것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훨씬 이후의 것으로 추측된다.

 구성은, 산천 기도 → 현몽(現夢) → 최정승의 딸 배뱅이의 출생 → 성장 → 연애 → 죽음 → 장사 → 무당의 굿 → 주막집 → 배뱅이의 마지막 굿날 → 귀로 등으로 되어 있다.

 반주는 장구 하나를 쓰지만 바라ㆍ피리ㆍ젓대ㆍ해금을 쓰기도 한다. 장단은 굿거리ㆍ볶는타령ㆍ막장단ㆍ중모리(산염불장단) 등으로 되어 있고, 소리는 수심가토리가 주가 되어 경토리(京畿民謠調)ㆍ메나리토리도 쓰이는데, 양소운 <배뱅이굿>에는 육자배기토리가 끼어 있다. <배뱅이굿>에는 <산염불><자진염불><서도무가> 등의 서도민요도 있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숙종 때에 경상도 태백산 아래 9대째 내려오는 무당 최씨라는 부자가 살았다. 어느 해 나라에서 귀천을 가리지 않고 과거를 보였으므로, 그도 이에 응시하여 급제하고 경상 감사 벼슬을 받았다. 그러나 부임 얼마 후 무당임이 탄로나 쫓겨나고, 황해도로 가서 최정승으로 행세하며 그곳에 사는 김, 이 두 정승과 형제의 의를 맺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모두 혈육이 없었다.

 어느 날 세 사람은 절에 가서 백일기도를 하여 각각 딸 하나씩을 낳았는데, 최정승은 딸의 이름을 ‘백의 백갑절’이라는 뜻으로 ‘배뱅(百百)이’라고 지었다.

 이 셋은 어느덧 자라서 처녀가 되었다. 하루는 금강산 어느 절에서 나온 탁발승이 최정승 집에 왔는데, 배뱅이는 그 중에게 첫눈에 반하여 그를 불러들여서 벽장에 숨겨두고 함께 지냈다. 중은 머리를 기른 뒤 오겠다고 기약하고 떠난 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중을 기다리다 지친 배뱅이는 끝내 상사병을 앓다가 죽고 말았다. 최정승 내외는 딸 배뱅이의 넋이나마 불러보고 싶어 이를 이루어주는 사람에게는 재산의 절반을 나눠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팔도의 이름난 무당들이 몰려들어 굿을 하였으나, 아무도 넋을 불러오지 못하였다.

 그 때 지나가던 평양의 젊은 건달 부랑자가 무당 행세를 하여 넋을 불러들여 주었으므로, 최정승은 그에게 약속을 지켜 재산의 절반을 주었다. 2

 

 

 그러면 배뱅이굿의 독보적 명인인 이은관☜의 절창을 들어보도록 하자.

 

 

 

 

 

 

 

 

 

배뱅이굿은 현대 연극으로 재탄생하고 있기도 하다

 

 

 

  

 <배뱅이굿>은 판소리로 인정되지 않았으므로 판소리 정리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다양하게 변이되었다. 원래 무당이었다고 설정한 배뱅이의 아버지가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다가 실패한 사건, 처녀인 배뱅이가 탁발승과 놀아나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사건, 지나가던 건달이 배뱅이의 혼을 불러낸다면서 탕진한 가산을 회복할 정도로 돈을 긁어냈다는 결말 중에서 어느 쪽을 강조하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작품이 되었다.

 한 사람의 창자가 등장하여 여러 사람의 역할을 도맡아 꾸며 나가는 것이 특색이다. 배뱅이 부모가 딸의 혼령을 위로하는 넋풀이를 하는데 엉터리 박수무당이 교묘한 수단을 써서 거짓 넋풀이를 해주고 많은 재물을 얻어 가진다는 내용은 익살적이다. 한 사람의 박수무당이 등장하여 각 과정에 등장한 총19명의 배역을 소리(노래)와 재담으로 연출해 내며, 굿의 미신적 요소를 풍자적으로 꾸며 흥미를 자아낸다.

 각 과정별 내용을 보면, 제1 산천기도, 제2 꿈이야기, 제3 배뱅이의 출생, 제4 배뱅이의 성장, 제5 배뱅이의 죽음, 제6 배뱅이 부모의 비통, 제7 배뱅이의 장사(葬事), 제8 배뱅이굿, 제9 이광옥(李光玉)의 회심, 제10 주막집, 제11 배뱅이의 마지막 날, 제12 귀로이다.

 이의 12과장에서 총 19명의 배역을 박수무당 한 사람이 소리(노래)와 재담으로 연출해 내며, 굿의 미신적 요소를 풍자적으로 꾸며 흥미를 자아낸다. 1984년 중요유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의 하나로 지정되었으며, 예능보유자로 이은관(李殷官)이 인정받았다.

 

 

 

 

 

 

 

 

 

 

☞이은관(1917 ~ 2014) :서도(西道)소리의 명창. 강원도 이천(伊川) 출생. 1932년 이천공립보통학교 졸업. 철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도소리명창 이인수(李仁洙) 문하에서 <배뱅이굿>을 전수받았다. 23세에 상경하여 최경식(崔景植)을 만나 경기민요와 시조를 배웠고, 조선가무단과 만담가 신불출(申不出) 일행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대한국악원 민요부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57년에는 영화 <배뱅이굿>에 출연, 배뱅이굿의 대명사로서 자리를 굳혔다.   국악협회이사와 민속예술학원장으로서 국악의 보급과 후진양성에 힘쓰는 한편, 이은관민요단을 구성하여 전국순회공연과 해외공연을 가졌다. 8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배뱅이굿>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82년 KBS국악대상, 90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 ‘관서’는 고려 때 관내도(關內道)라고 불리던 서울·경기 지방의 서쪽지방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는 고려시대에 설치된 철령관이라는 관문의 서쪽지방이라는 데에서 관서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 철령관은 함경도로부터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이어서 한강유역을 지키는 한편 변방에 대한 통행을 제한하던 곳이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동쪽을 관동, 서쪽을 관서, 북쪽을 관북이라 하였다. 관서지방의 위치로 보면, 관내도의 서쪽이라는 의미보다 철령관의 서쪽이라는 의미가 더 타당하다. [본문으로]
  2. 전승되는 이야기들을 모아서 분석하면 약간의 차이가 난다. 1)문벌 높은 집안의 귀한 무남독녀로 태어난 배뱅이는 태어날 때 어머니의 꿈에서 비둘기 목을 비틀어 버렸다고 하여 이름을 배뱅이라고 지었다. 귀엽고 곱게 잘 자랐으나, 18세에 우연히 병을 얻어 죽었다. 2)무럭무럭 자라 출가할 나이에 배뱅이가 덜컥 죽었기 때문에 영감과 마누라는 죽은 딸의 넋이나마 보려고 팔도의 유명한 무당을 다 불러들이게 되었다. 3)문벌 높은 집안의 귀한 무남독녀로 태어난 배뱅이는 태어날 때 어머니의 꿈에서 비둘기 목을 비틀어 버렸다고 하여 이름을 배뱅이라고 지었다. 귀엽고 곱게 잘 자랐으나, 18세에 우연히 병을 얻어 죽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