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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옛날의 금잔디

장군(將軍)과 군중(群衆)

by 언덕에서 2016. 1. 15.

 

 

장군(將軍)과 군중(群衆)

 

 

 

 

 

1980년대 초반 어느 해의 늦은 봄이었다. 당시 5.18 사태라고 불리던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 전해의 일이었다. 대학 2년생인 우리에게는 이수하지 않으면 학교 졸업을 하지 못하는 ‘필수 과목’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교련’이라는 과목이었다. ‘교련’은 ‘학생에게 가르치는 군사훈련’을 의미한다. 대학에 와서 학군단이라는 곳에서 교련을 배워보니 고등학교 교련 시간에 배우던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다만 차이점은 1~2학년에만 배우는 이 과목을 학년마다 필수적으로 직접 군부대에 입소해서 열흘가량 숙식하며 교육을 받아야만 한다는 점이었다. 통제되고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군사 훈련을 받는다는 점은 당시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던 우리에게는 다소 수치스러운 측면이 있었다.

 전해인 1학년 때는 학교가 속한 지역의 향토사단에 입소해서 열흘 동안 군사 기본훈련을 받았다. 각 학교별로 입소 훈련은 4월 말부터 진행되다가 5월 하순부터는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는데 가을에 재개되었다. 그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후 알게 되었지만, 전남 광주에서 시민을 향한 군부의 대형 살상극이 일어났던 탓이었다. 우리가 훈련 중인 열흘 동안 해당 사단의 장교나 조교들은 부대에 교련 교육받으러 온 학생들에게 본때를 보이기로 작심한 듯했다. 구보나 각개전투 등의 훈련에서 체력이 약해서 뒤처지는 학생들에게 ‘얼차려’라고 불리는 정신적ㆍ육체적 고통을 주는 것은 기본이었고 군인이 아닌 학생 신분임에도 각목이나 야전삽 등으로 심한 구타를 가하는 것도 예사였다. 군사 정부 때였고 그들 또한 군사 정부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해야 하는 하수인들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일제강점기 때 그 협조자가 자신의 행동을 애국으로 착각했듯이 말이다.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는 그곳에서의 모욕은 우리에게 지급된 군복의 등판에 페인트로 인쇄된 ‘삼청교육대’라는 표시였다. 그것은 각개전투 등 격한 훈련을 하는 훈련병들에게 지급되는 허드레옷이라고 생각 없이 지급하다 보니 일어난 촌극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말로만 듣던 삼청교육대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했고 그 장소에서 ‘병영 집체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우리가 군사교육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비참한 심정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물며 그들이‘인간쓰레기’라며 정화 대상으로 부르던 사람들이 입던 옷을 대학생인 우리에게도 입히니 더욱 그랬다.

 당시 우리는 자신이 속했던 폐쇄된 사회 탓에 선진 민주주의의 실상을 몰랐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왕처럼 군림하던 군인 출신 대통령이 죽으니 그 아래 군인들이 정권을 잡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판단을 하는 이들도 많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부당성을 외치는 시민들을 총칼로 진압했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용납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선량한 시민을 무력으로 근거 없이 잡아 가두고 고통을 가한다는 것은 시대를 역류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역사에서 보는 악랄한 독재자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란 점도 그랬다.

 지난해의 우울한 기억을 뒤로하고, 신촌역에서 갈아탄 열차는 파주에 위치한 사단급 군부대로 향하고 있었다. 중간에 금촌이라든가 파주역이라는 작은 시골 역이 보였으나 그곳을 지나 문산역에 도착할 즈음에는 난생처음 ‘전방((前方)’이라고 부르는 장소에 발을 딛게 되었다. 북한군이 수시로 출몰하는 지역에서 철책 근무를 하게 된다는 사실에 얼마간의 공포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 시대를 같이 한 관심 있는 이들은 알겠지만 우리가 도착한 부대는 12.12 군사쿠데타가 성공하게끔 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부대였다. 정치군인이 도모했던 군사쿠데타가 반대세력에 의해 위기에 처하자 친구인 공범이 자신이 사단장으로 있던 그곳 부대의 병력을 서울로 진입하게끔 해서 사태의 반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각종 과학 장비가 발달하여서 전방 철책선 근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디지털화된 열 감지 카메라가 경계병 역할을 대신 할 수 있다는 것이 의견이 있고, 철책을 넘은 북한군이 아군 초소에 노크로 귀순하는 보도를 접하면 현시점에서 철책선의 경계병 의미는 과대평가 된 측면이 있다.

 우리가 그 부대에 도착한 후, 열흘 동안 ROTC 출신 중위가 각각 50명씩으로 구성된 대학생 교육 소대를 직접 지휘했다. 우리에게는 밤마다 경계병들과 함께 철책선 저편에서 누군가 침투하는 것이 아닌지를 감시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그 부대에서는 1년 전의 향토사단에서와는 달리 아주 신품인 군복과 보급품을 지급했고 식사 또한 그곳과는 차원이 다른 고급스러운 것이어서 과연 전방은 전방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열흘 동안 간단한 구보와 각개전투 같은 것을 훈련했는데 장교나 기간병들이 비인간적인 모욕을 주거나 구타를 가하지는 않았다. ROTC 출신 소대장 중위는 우리와 같은 수준 정도의 병력을 갖고 부대를 지휘한다면 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부대를 만들 자신이 있다는 말을 했고 하루는 대대장인 중령이 내무반에 와서 자유스러운 대담 시간을 가졌다. 다음날은 대령 계급장을 단 연대장이 내무반에 와서 전날과 같은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그들은 뭔가 양해를 구하고 타이르는 투의 논리로 교육을 도모했는데 ‘나라가 조용해야 북한이 쳐들어오질 않고 또 정치적인 안정이 나라 발전의 첩경이니 다들 면학에 열중했으면 좋겠다’는 요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육체적으로 괴로울 것이라는 걱정과 달리 열흘은 금방 지나갔고 퇴소식 날이 밝았다.

 문산역 앞에서 교련복을 입고 도열하고 있으니 사단 군악대가 나타나 무슨 행진곡 같은 것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검은 안경에 별 두 개의 계급장을 단 모자를 쓴 장군이 나타났다. 그 연주가 ‘스타 마치(Star March)’라는 것은 훗날 실제 군입대하여 훈련소를 마치고 자대에 가기 위해 훈련소 퇴소식 할 때 알게 되었다.

 ROTC 출신 소대장은 퇴소식 때 사단장이 일일이 악수를 청할 것이니 장군이 악수를 청하면 손을 꼭 잡지 말고 가볍게 잡힌 상태에서 우렁차게 관등성명을 외치라고 주문했다. 그때 우리의 신분은 무엇이었고 뭐라고 했는지 지금 기억에 남지 않는다. 아마 ‘예! 교육생 김 아무개!’ 이런 식이 아니었나 싶다.

 300명에 가까운 학생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더니 사단장 훈시가 시작되었다.

 “전체 차렷! 사단장님께 경례!”

 지금 생각해보면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순간이었다.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독재자는 ‘국가’라는 명목으로 ‘복종 표시’를 당연시하는 폭력을 가하고 있었고 대부분은 그것을 폭력이라고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훈시가 마치면 우리는 열차를 타고 귀가하게 될 것이고 적어도 실제로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는 ‘군대’라는 낱말을 잊고 생활해도 될 터였다. 정치의 안정이 국가의 안정이라는 논조의 훈시를 끝낸 장군은 “질문 없나?”라고 물었다. 대개 그런 자리는 조용하게 끝나기 마련이었는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우리 중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뭔가?”

 “군부는 왜 정치에 참여하는 겁니까?”

 갑자기 전체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러다 학생들 사이에서 조금씩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누군가가 ‘아, 쓸데없는 저런 질문을 왜 하지?’라는 불만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또 한 쪽에서는 '저놈 때문에 전체가 행여 피곤해지는 건 아닌가?' 하는 푸념도 튀어나왔다. 그러나 사단장의 신경질적인 고함 한마디는 금방 좌중을 진압했다.

“학생은 본분인 공부만 하란 말이야!”

 질문한 친구 또한 만만하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면 군인은 왜 본분에 충실하지 않는 겁니까. 나라만 지키면 되는 것 아닙니까?”

 학생들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웅성거림의 내용은 전과 같았다.

 ‘답은 뻔할 것인데 동료들에게 왜 피해를 주느냐’는 이기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곧 조용해졌다. 장군의 연이은 고함 때문이었다.

 “학생은 공부만 하란 말이야! 알겠어? 자네! 개인적으로 꼭 한 번 찾아와, 속 시원하게 설명해 줄 테니까!”

 

 

 

 

 질문자는 옆 학과에 다니는 내 친구의 친구로 나와도 안면이 많은 사이였다.

 당시 학교 도서관에서 사회학과 역사철학에 몰두하고 있던 내가 볼 때 그는 운동권은 아니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 끼리끼리 사용하는 몇 가지의 용어만 살펴도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를 파악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인연이 되어 졸업 후 그와 같은 그룹 군의 회사에 다니게 되었는데 신입사원 연수 때는 같은 방에서 장시간 생활하게 되었다. 둘이 있을 때 그날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를 물어보았다. 정치외교학이 전공인 그의 답은 이랬다. '정치사에 만연한 군사 정변에 참가하는 이의 본심이 무엇인지 궁금했다는 것이다. 그만의 학구열이 그런 질문을 하게 했던 것이다.

 그날, 검은 안경의 장군과 학생들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발을 들여놓고 있는 시대는 군중의 시대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프랑스 사회학자 르봉은 "군중은 진실을 갈망한 적이 없다."며 새로운 '군중의 시대’에 대해 비관적이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군부가 왜 정치에 개입하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학생들은 그 질문 자체를 외면하고 말았다.

 개인이 군중에 속하면 더 큰 힘을 갖게 된 것처럼 행동한다. 군중 속에서 자기를 잃고 익명화되어 무책임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그날 상황에서는 군중이라는 학생들 대부분은 질문한 동료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내가 볼 때는 군중이 된 학생들은 권력자 앞에서 비이성적이었으며 동료의 행동이 참인 줄 알면서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군중 속에 숨는 일은 쉽지만, 빠져나오기란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날이었다.

 

 

- 월간 소식지 『맑고 향기롭게』 2016. 8월호 게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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