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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옛날의 금잔디

아무도 몰랐다

by 언덕에서 2016. 1. 8.

 

 

 

아무도 몰랐다

 

 

 

 고등학교 반창회(班窓會) 동기들의 성화가 심해졌다. 앞으로 모임에 나오지 않으면 제명(除名)을 불사하겠다는 것이다. 내가 반창회 행사에 안 나가는 것은 나름의 핑계가 있었다. 모였다 하면 밤새도록 퍼마시는 분위기가 내 취향에 맞지 않았으며, 회식하지 않는 날에는 산행하기 일쑤인데 모두 전문산악인 수준이어서 내 저질 체력이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반창 중 왕대머리라는 별명을 가진 녀석은 선생님이 옆에 앉아 계신데도 불구하고 담배를 피우곤 했다. 제자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사제관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 모습이 민망해서 그에게 담배를 끄라고 충고했는데 그는 ‘별놈을 다 본다’는 식으로 무시하는 것이어서, 나는 ‘저런 자식이 나오는 모임에는 절대 나갈 수 없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총무 왈 왕대머리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서 이제 모임에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게으름 병이 절정에 오른 나는 혈압이 높은 관계로 너희들이 가는 높은 산은 절대 오를 수 없으니 모임 참석이 어렵겠다고 계속 버텼다. 그랬더니 설악산이나 태백산 같은 높은 산은 절대로 등산 계획에 넣지 않을 것이며 조금이라도 높은 산이라는 판단이 들면 무조건 참석 열외로 하겠다고도 했다. 이로써 내가 반창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우길 이유가 없어진 셈이었다.

 

 그날의 산행 코스는 김해시에 있는 신어산(神魚山)이었다. 김해시 삼방동에 위치한 신어산(631.1m)은 능선에서 김해 시가지를 바라보면서 산행할 수 있어 올라가는 재미가 있고, 기암절벽 사이로는 구름다리가 있어 산행을 더욱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북동쪽으로는 낙동강이 감돌아 흐르고 남쪽에는 광활한 김해평야가 펼쳐져 있는데 아래의 내외동 지역은 아버님이 태어나시고 자란 곳 내 마음의 고향이어서 감회가 더욱 깊었다.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 탄생지로 전해오는 구지봉은 이 산의 서쪽 끝 부분에 있었다.

 

 산행을 마친 우리는 식사와 뒤풀이를 겸하여 김해와 부산의 경계인 대저동에 가서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반창회 총무는 마당발로 부산의 변두리이자 과거 김해군 가락면인 현재 부산의 강서구 지리에도 훤했다. 총무가 예약한 식당은 낙동강의 지류인 서낙동강 강변에 있었다. 친구들을 따라 걷던 나는 식당이 위치한 거리가 무척 눈에 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식당에서는 주 요리로 민물장어구이를 팔고 있었고 잉어찜은 부메뉴인 듯했는데 우리가 앉은 홀은 아직 저녁 시간이 되지 않은 탓인지 썰렁했다. 흔히 카운터라 부르는 입구의 계산대 옆에는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70대의 정갈한 모습의 할머니 한 분이 앉아있었다. 주고받는 술잔 속에 우정이 싹튼다고 했던가. 50대 초로의 중년들에게는 주고받는 술잔 속에 숙취만 남을 뿐이라고 누군가 농을 던졌다. 건강원을 운영하는 국선이는 붕어즙이 여름에 땀을 많이 흘리는 태음인에게 좋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누군가는 바퀴벌레가 정력에 좋다는 속설이 생기면 우리나라에서 그 벌레는 간단히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술자리가 시작된 지 30분가량이 지나자 다들 거나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이렇게 불경기가 계속되다가는 10년 후에 자신은 폐지나 주우려 다녀야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고 또 누군가는 비아그라를 먹어도 발기가 되지 않으니 자신이야말로 당장 죽어야 할 놈이라고 했다. 또 어느 녀석은 애인을 믿고 이혼했는데 그 애인이 이혼한 자신을 만나주지 않으니 그 년이야말로 죽일 년이라는 말을 했다. 혼자 술마시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공통의 화제였다. 어떤 이야기는 새로운 이야기고 또 어떤 이야기는 전에도 몇 번 들은 것이어서 싫증이 나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중요할 리는 없었다. 원래 뭔가를 분출하기 위해 다들 마시는 법이고, 혼자서 마시는 술이 빨리 그리고 많이 취하는 것은 자신이 가진 고민이나 에너지를 분출하지 못하고 혼자서 삼켜야 하기 때문이다.

 

 모친이 치매를 앓고 있는 욱진이는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많은 듯했다. 모친께선 구덕산 근처의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데 하루의 반은 제정신이었다가 나머지 반은 기억력이 도통 없다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면회를 가는데 그때마다 아들 손을 잡으며 ‘얘야, 부탁이다. 제발 나를 여기에서 나가게 해줘!’를 반복한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던 누군가가 이유를 물었다.

 

 “네 어머니는 평생 칼클한 성격이셨는데 남자 환자들과 공유하는 시설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봐.”

 

 누군가 말을 보태었다.

 

 “그렇겠지. 아무리 늙어도 여자는 여자잖아. 그런 거에 불편해하시는 분은 못 견딘다. 어떻게 수를 찾아봐야겠네.”

 

 말 같지 않은 말들이 오가다가 갑자기 조용해졌고 다른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몇 년 전 국민학교 동기 모친상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삼 형제를 둔 동기의 모친 역시 치매를 앓았던 모양이다. 요즘의 세태가 그렇겠지만, 그 집의 형제들도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했는지 서로 홀로 된 모친을 모시지 않으려다 세 명이 번갈아가면서 모시기로 합의했다고 했다. 한 달을 삼등분하여 열흘은 첫째 집에서 또 열흘은 둘쨋집, 나머지 열흘은 막내 집 이런 식으로 말이다. 동기의 집에서 머물던 모친이 배변 조절을 못 해서 아들 앞에서 옷에다 그것을 묻히고 말았는데 그는 모친의 머리를 지어 박으며 “할망구, 그것도 제대로 못하요!” 하며 나무랐던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던 말이 그것이다. 쓰레기 같은 자식……. 말이 튀어 나오려다 멈추고 말았다. ‘장병(長病)에는 효자 없다’는 옛말이 있지만, 상가(喪家)에서 누구를 나무라는 일은 주제넘은 일이기도 해서 떨떠름했던 기억만 남았다.

 

 소주를 반병 정도 마시니 식당 근처의 위치가 눈에 익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가 스무 살 정도 되었던 시기에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무슨 보퉁이 하나를 전달하기 위해 어머니의 친구가 일식당을 운영하는 이 동네에 왔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식당 옆의 서낙동강 지류를 지나면 아주 어린 시절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바라보았던 외가 근처 강변의 풍경들이 기억 속의 들꽃처럼 다시 피어나기 시작했다.

 

 

 “저기 창문에 보이는 대사리를 넘어서 3~40분 걸으면 죽림동이라고 나온다. 내 외가거든. 외삼촌이 6.25 때 이곳 민청 위원장이었어요. 빨갱이 대장이었던 셈이지. 어머니는 죽림초등학교를 나오셨는데 내가 그 동네에 직접 가보니 대나무가 아주 지천이데. 죽림초등학교 남쪽에 외갓집이 있었고 앞에 강나루가 있었어. 지금은 무슨 가든 해서 오리고기 파는 집들이 즐비하지만 말이야. 내가 어릴 때 어머니한테서 들은 얘긴데 말이야.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이었다고 해. 급한 일이 생긴 동네 처녀가 강을 건너려고 나룻배를 타려 하는데 뱃사공이 그걸 못 본 모양이야. 처녀가 배를 타려 발을 배에 올릴 때는 사공이 배를 움직이기 시작하던 순간이었고 그만 처녀는 물에 빠져서 죽고 말았다는 거야. 저기 보이는 샛강이 그때는 수심이 깊었던 모양이야. 그때부터 비가 오는 날이면 저기 저 나루터에는 ‘뱃사공, 뱃사공…….’하는 소리가 들렸다는 거야. 요새도 그 소리가 들리는지 모르겠다.”

 

 내 이야기를 듣던 친구들이 탄성을 질렀다.

 

 “야! 너는 기억력이 어찌 그리 좋으냐?”

 

 “혁이는 교수가 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내가 대답했다.

 

 “나는 머리가 돌이라서 단단해. 그래 한 번 입력되면 단단해서 빠져나가질 않지. 그리고 나는 지금의 내가 좋아. 내 인간성으로 누구를 가르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안 그래?”

 

 순간 누군가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취중이지만 그 눈빛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카운터의 의자에 앉아 있는 할머니. 대낮이어서 홀에 있는 손님은 우리 일행 8명뿐이었고  내 목소리가 비교적 카랑카랑했기에 할머니는 내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부터 유심히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할머니와 내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잠시 망설이던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가 앉은 테이블 쪽으로 걸어왔는데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게 말을 걸었다.

 

 “보소, 아저씨요, 내를 모르겠능교?”

 

 각각 반병씩 마시던 소주가 한 병으로 불어나고 있던 참이어서 떠들썩했는데 할머니의 돌연한 행동으로 갑자기 조용해졌다.

 

 

 

 

 

 

 “글쎄요. 누구신지요?”

 

 “부산 서면에 살지 않았어요? 동양고무 근처에.”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갑자기 할머니의 목소리에서 톤이 높아지고 있었다.

 

 “아이고! 이기 누고? 종선이 아들 아이가?”

 

 아아, 할머니의 입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놀라며 그렇다고 하자 할머니의 격정은 봇물이 터진 듯 계속되었다.

 

 “하이고, 이사람아! 이거를 우짜노? 내 모르겠나? 니 엄마 친구 ○○다. 내 너그 집에 자주 갔었다이가. 아이고! 너그 엄마가 죽은 것도 모르고 소식이 없다, 소식이 없다 해서 전화를 해도 안받고 친구 몇몇이 모여 너그집 찾아가니 세를 사는 사람이 몇 달 전에 수술받다 죽었다고 하데. 그날 너그 엄마 집에서 우리 모두 통곡을 했다 아이가. 너그는 우째 그렇노? 알리 주다 안하고 말이다.”

 

 할머니는 눈물을 철철 흘리며 통곡하고 있었고 나는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 모양이 되어버렸다. 살아 생전 어머니의 둘도 없는 친구 분이였던 것이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그날 자리를 함께 했던 친구 중 누구는 세상이 참 좁다고 했으며 누구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또 누군가는 우리가 죽을 때도 꼭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40대 중반에 아버지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아들 삼형제를 키우며 홀몸으로 사시던 어머니는 당뇨병을 오래 앓으신 관계로 50대 이후에는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하셨다. 어머니 삶의 기쁨은 한 달에 한 번씩 갖는 국민학교 동기회 모임이었다. 그 분들은 수시로 우리집에 들렸던 관계로 모두들 어린 시절부터 40대 중반까지의 내 모습과 특징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7년 전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실 때 부음을 그분들께 알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들 세 명이나 며느리들은 각자의 직장이나 지인들에게 부음을 돌렸고 어머니의 부음을 알려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는 어머니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눈이 어두워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개인 전화수첩 같은 것이 있을 리는 만무했다. 모든 전화번호는 어머니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 친구 누구에게도 부음을 알릴 수 없었고 어머니 친구들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아무도 몰랐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상당한 고통을 어머니 친구들에게 안겨 드리고 만 것이어서 또 다시 죄인이 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흩어졌던 기억의 모자이크가 다시 조합되는 듯했다. 청년 시절,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강가의 식당에 심부름을 왔던 그 기억. 그때 어머니의 친구 분은 나를 그냥 보내기 미안했는지 술상을 차려 오시며 먹고 갈 것을 당부하셨는데 혼자 먹는 모습이 미안했는지 그 집의 아들을 불러 대작하게 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제 그 아들은 식당의 주인이고 그때 어머니 친구는 카운터에 앉아 계셨던 것이다. 

 

♣ 

 

 

 내게 지금껏 만나는 국민학교 친구가 몇 있다. 게 중 한 명은 일년에 한번씩 만날 것을 약속하고 그것을 깨지 않고 지속하고 있다. 그 친구는 몇 년 전 쓰러져서 심근경색 수술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 두 갑의 담배를 피우고 술자리를 할 때마다 말술을 마다하지 않는다. 일년에 한 번 만나는 날이 연말이어서 지난 연말에 전화를 했다. 그러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음날 다시 전화했으나 계속 받지 않는 것이다. 갑자기 불안한 생각들이 넘치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틀 후에 전화 연결이 되었다. 휴대폰을 분실했는데 찾지 못하여 새로 휴대폰을 구입하여 다시 개통했고 나로부터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있어서 즉시 전화했다고 했다. 그를 만나는 순간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적이 없었기에 내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을 보니 네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대답했다.

 

 “그랬구나. 우리 나이에 전화를 받지 않으면 그래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세 번 정도 전화해도 받지 않으면 죽었다고 생각해야 맞을 것 같다. 요즘은 휴대폰만 믿고 가족간의 교류는 물론이고 친구집 주소조차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잖아.“

 

 내가 말했다.

 

 “내가 세 번 전화를 안받으면 너도 그렇게 알아라.”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연말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취중에서 위와 같은 몇 개의 단어가 툭툭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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